영화 <레이디 버드> 포스터.

영화 <레이디 버드> 포스터.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주변인. 질풍노도의 시기. 중2병. 모두 사춘기를 묘사하는 표현들로 온 세상이 나로 가득한 시기이기도하다. 주변의 것들은 모두 시시하기만 하고 내가 주인공인줄 알았던 세상은 나라는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만 같아 좌절하기도 한다.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서 우리는 방황하고 길을 잃기도 하지만 차이의 인정과 존재의 발견을 지나 우리는 어른이 되고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에 연민과 향수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레타 거윅의 첫 솔로 감독 데뷔작 <레이디 버드>는 열여덟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와 같은 영화다. 시종일관 터지는 웃음에 깔깔거리다가 영화가 끝나고 나면 가슴이 묵직해지는, 유머와 따뜻한 기운이 가득한 '그레타 거윅' 표 여자 캐릭터에 확실한 따옴표를 다는, 여러모로 기억될 영화였다.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가톨릭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은 자기 자신에게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특별히 예쁘지도 않고 공부를 잘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남다른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 그녀는 자신이 좀 더 특별해지기를 바란다. 이 특별한 이름이 그녀가 원하는 인생을 가져다줄까?

'캘리포니아의 쾌락주의를 말하는 사람들 중 새크라멘토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낸 사람은 없다.'

영화는 새크라멘토 출신의 작가 조안 디디온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이 도시는 캘리포니아주의 인구 50만이 안 되는 작은 도시로 직접 대본을 쓴 감독 그레타 거윅의 고향이기도 하다.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크리스틴에게 새크라멘토는 지루하고 시시하기만 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늘 다른 곳에 있다. 뉴욕을 동경하는 크리스틴은 동부에 있는 대학에 가고 싶지만 그녀의 성적은 충분하지가 않고 그곳의 비싼 학비를 감당할 만큼 집이 부유하지도 않다. 가까이 있는 것, 매일 마주하는 것에서 가치를 찾기란 쉽지 않다. 특히 '여기보다 어딘가'를 꿈꾸는 크리스틴과 같은 십대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절대로 그리울 것 같지 않은 것이라도 막상 그것에서 멀어졌을 때 향수를 느끼는 것처럼 크리스틴에게 새크라멘토는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는 애정을 지닌 자신의 일부이다.

 영화 <레이디 버드>의 한 장면.

영화 <레이디 버드>의 한 장면.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크리스틴이 자신에게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은 새로운 정체성의 확립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누구인지 찾고자 방황하는 소녀의 콤플렉스를 메우기 위한 방책으로 보인다. 교내 활동으로 뮤지컬을 시작한 크리스틴은 자신의 배역이 작다는 데에 실망한다. 지원자 모두가 배역을 맡았다는 사실에 그녀는 뮤지컬 자체가 시시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보는 '나'사이의 괴리감을 영화는 유쾌한 코미디로 그려낸다. 크리스틴의 콤플렉스는 약점이 아니라 그녀를 더 사랑스럽게 만든다. 뮤지컬에서도 일상에서도 주인공 자리는 그녀를 비껴간다. 그러다가 학교에서 잘나가는 제나와 친해질 기회가 생기자 크리스틴은 절친한 친구 줄리를 멀리하고 거짓말까지 하는데 그 모습이 왠지 밉지가 않다.

'네가 될 수 있는 선에서 최고의 너'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엄마의 말들이 크리스틴에게는 모두 잔소리로 들린다. 서로의 신경을 건드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이들 모녀는 서로 핏대를 올려가며 싸우다가도 많은 모녀들이 그러하듯 어느 순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싸움을 멈추고 같은 편이 된다. 엄마는 벗어나고 싶은 둥지이자 누구에게보다도 인정받고 싶은 애증의 대상이다. "내가 엄마 딸이 아니어도 날 좋아할 거야?" 라고 엄마에게 묻는 그녀의 모습이 짠하다.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첫사랑은 어이없이 끝이 나고 온갖 기대와 환상들로 가득했던 첫 섹스는 실망스럽다 못해 시시하기까지 하다. 앞으로 그녀는 수많은 시시함에 실망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녀 특유의 명랑함과 에너지로 잘 살아갈 것이다. 약점이 오히려 강점이 되고 환상의 미지가 알고 보면 별거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부정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면서 그녀는 한층 성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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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배우로 많은 영화에 참여한 그레타 거윅 감독은(그녀가 대본에 참여한 이전 영화들을 보면) 어딘지 조금 이상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재미있고 따뜻한 사람인 것 같다. 적당히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그녀의 캐릭터는 '레이디 버드'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데 전혀 새로운 캐릭터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레타 거윅'만의 개성은 뚜렷이 보인다. 시얼샤 로넌의 뛰어난 연기는 캐릭터의 매력을 배가시키고 감독의 안정된 연출은 차기작을 기대하게 만든다.

유쾌하면서도 가슴 따뜻해지는 영화를 보고 싶다면, 그리고 그레타 거윅이 작가로 참여했던 영화들을(프란시스 하, 미스트리스 아메리카 등등)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레이디 버드>를 놓치면 안 될 것이다.

이 영화와 함께 보면 좋을 영화들
<여기보다 어딘가에> 1999년 작
수잔 서랜든과 나탈리 포트만이 모녀지간으로 나온 이 영화에서 나탈리 포트만 역시 캘리포니아를 떠나 동부로 가고 싶어 한다. 철없는 엄마와 너무 일찍 철든 딸의 관계라는 설정은 <레이디 버드>와 다르지만 고향을 떠나 더 큰 세상을 보고 싶어 하는 십대의 모습이 닮았다.

<판타스틱 소녀백서> 2002년 작
고등학교를 졸업한 괴짜 소녀의 이야기. 도라 버치가 연기한 이니드 역시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서 방황한다.

<프란시스 하> 2014년 작
그레타 거윅이 출연하고 대본에도 참여한 작품. 아마도 프란시스는 크리스틴의 십년 후 모습이지 않을까?

<애니 홀> 1977년 작
그레타 거윅과 노아 바움벡 감독의 공동 작업은 때로 우디 알렌의 변주로 보이기도 한다.
우디 알렌의 <애니 홀>은 새로운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어 냈고 다이앤 키튼이 연기한 '애니'라는 캐릭터 또한 전에 없던 새로운 여성 캐릭터의 등장이었다. 그레타 거윅의 캐릭터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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