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만에 재방영된 MBC <하얀거탑>은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려낸 정치적 드라마다.

11년만에 재방영된 MBC <하얀거탑>은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려낸 정치적 드라마다. ⓒ MBC


최근 MBC <하얀거탑> (이기원 극본, 안판석 연출) 재방영이 끝났다. 하얀거탑이 2007년에 방영되었으니, 10년도 훨씬 넘은 드라마다. 10년이 지난 드라마임에도 다시 시청자들 앞에 선보일 수 있다는 것은, 드라마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이다. 속도감 있는 연출,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이 드라마 최고의 미덕이다. 덕분에 지금 보아도 촌스럽다는 생각이 크게 들지 않는다. 마치 처음 보는 드라마인 것처럼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한 가지를 굳이 뽑자면 여러 남자 캐릭터들의 헤어스타일이랄까)

"누가 봐도 좋은 기회라는 건 말입니다. 말 그대로, 누가 봤기 때문에 절대 좋은 기회가 아닙니다." 우용길(김창완 분)

이 작품을 고화질로 다시 보니, 우용길 부원장의 미묘한 표정 변화도 더욱 잘 보인다. '영국 신사'처럼 무게를 잡고 다니지만, 졸렬한 속내를 숨기고 있는 이주완 과장(이정길 분)의 위선은 언제 봐도 보는 이의 웃음을 자아낸다. 그럼에도 <하얀거탑>은 철저히 외과 의사 장준혁의 전기다.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구도로부터 탈피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주인공 장준혁은 선인이나 악인으로 단정 짓기 어려운 입체적 인물이다. 그저 철저히 성공을 위해 질주한 사나이가 있었을 뿐이다.

자타공인 최고의 실력을 갖춘 장준혁은 과장 자리를 위해 로비도 서슴지 않는 자다. 작중 후반부 의료 사고의 책임을 면피하고자 애쓰는 모습을 보면 안하무인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많은 시청자는 그에게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그의 삶과 시청자 사이에는 접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독한 '흙수저'였으며,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사회적 성취를 얻어냈다. 언뜻 차가운 인물처럼 보이지만, 빈농이었던 어머니 앞에선 따뜻한 아들로 변한다. 그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매달려 왔을지, 시청자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장준혁은 김명민이 연기한 캐릭터 중 가장 강한 구심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일 것이다. 조직의 구습에 젖은 박건하(한상진 분), 함민승(김용민 분) 등 젊은 의사들이 그에게 보내는 존경심은 진실한 것이다. 시청자들 역시 그에게 빠져들어 갔다. 이 드라마를 완성하는 것은 시청자들의 태도였다.

 장준혁(김명민)과 최도영(이선균)은 서로의 안티테제인 동시에, 가장 소중한 친구다.

장준혁(김명민)과 최도영(이선균)은 서로의 안티테제인 동시에, 가장 소중한 친구다. ⓒ MBC


환자에 대한 선의를 가지고 움직이는 의사 최도영(이선균 분)은 시청자들의 큰 지지를 받지 못했다. (도영을 연기한 배우 이선균 역시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도영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주완 과장의 딸인 윤진(송선미 분) 역시 마찬가지다. 시민운동가인 윤진은 의료사고의 피해자들을 헌신적으로 돕고 있지만, 시청자들은 윤진에게 '오지라퍼'라는 별명을 붙이며 조롱할 뿐이었다.

외과 과장 선거를 앞두고 준혁이 친구 도영을 찾아갔을 때, 준혁은 도영에게 병리학과 오경환 교수(변희봉 분)와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한다. 원칙주의자인 도영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의 부탁을 거절한다. 이 때 장준혁은 "너처럼 형제가 줄줄이 의사 집안인 놈은 몰라.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라고 일갈한다. 그렇다. 이제 시청자는 캐릭터의 정의감만을 보고 그들을 응원하지 않는다. 얼마나 감정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인물인지가 더 중요하다. 장준혁이 소송 끝에 몰락하고, 희소암에 걸려 죽어갈 때, 시청자들도 함께 울었다. (심지어 당시 인터넷 공간에서는 '장준혁 49재'도 찾아볼 수 있었다.)

장준혁은 욕망을 좇은 끝에 점점 괴물로 변해갔지만, 그 과정조차도 많은 사람과 맞닿아 있었다. 물론 나는 훗날 태어날 아이에게 장준혁 같은 삶의 자세를 권장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개인의 욕망과 보편적 정의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면, 나는 어느 쪽에 서게 될 것인가.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장준혁이라는 캐릭터가 사람들에게 애틋하게 기억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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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음악과 공연,영화, 책을 좋아하는 사람, 스물 아홉.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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