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 <패터슨> 속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의 직업은 버스 기사다. 마법의 시계 덕분에 그는 알람소리 없이도 6시 10분이면 잠에서 깰 수 있다. 그가 아침에 눈을 뜨면 그의 옆에는 아름다운 아내 로라가 잠들어 있다. 잠시 잠에서 깬 그녀는 지난밤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패터슨에게 들려주고 다시 잠에 빠진다. 패터슨은 의자 위에 가지런히 개켜진 유니폼을 챙겨서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온다. 그가 아침으로 시리얼을 먹는 동안 반려견 마빈은 그에게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소파에 턱을 대고 엎드려 있다.

출근한 패터슨에게 동료 도니는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고달픈지 하소연을 늘어놓지만 패터슨은 별다른 반응이 없다. 패터슨이 운전하는 버스에는 매일같이 다양한 군상들이 타고 내린다. 그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는 그들의 모습만큼이나 다양하다. 점심시간이 되면 그는 파사익 강 폭포 앞에서 아내 로라가 준비해 준 도시락을 먹으며 폭포를 바라본다. 퇴근 후에는 식사와 함께 아내와 각자의 하루를 나누고 마빈과 저녁 산책하러 나가서는 단골 바에 들러 맥주를 한 잔 마신다. 영화는 그의 일주일을 따라가는데 그의 하루는 대부분 위와 같이 흘러간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평범한 패터슨의 일상을 가지고 짐 자무쉬는 가장 특별한 영화를 만들었다.

패터슨은 조용하다는 것이 그의 캐릭터라고 할 만큼 말수가 적고 감정 표현도 강하지 않다. 기쁠 때는 수줍게 웃고 당황했을 때는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파악하기 어렵다. 매일 같은 곳을 돌지만 매번 다른 승객들을 태우는 그의 버스처럼 매일 똑같은 그의 일상에도 변주는 있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그러하고 그에게 영감을 주는 주변의 모든 것이 그러하다. 그는 아침 식사 중 식탁 위에 놓은 성냥갑을 만지작거리며 그것에서 영감을 받아 시를 쓴다. 그렇다. 그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시를 쓴다. 식탁 위에 놓인 '오하이오 블루 팁' 성냥을 보고 떠오른 첫 문장은 출근해서 버스 운전석에 앉아 노트에 옮겨 적기까지 그의 목소리로 몇 번이고 곱씹으며 반복된다. 틈이 날 때마다 (출근해서 버스 시동을 걸기 전에, 점심을 먹으면서, 주말에도) 그는 자신의 비밀 노트를 펼치고 시를 쓴다. 아침에는 성냥에 대해 산문처럼 시작한 글이 오후에는 사랑에 대한 시로 완성된다. 그가 시를 완성해가는 과정은 창작이라는 것이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관객으로 하여금 목격하게 하고 이 경험은 잔잔한 가슴의 파문처럼 천천히 멀리 퍼지는 감동이 된다.   

찢어진 패터슨의 노트, 그를 위로한 것은 바로...

 아내에게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읽어주는 패터슨

아내에게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읽어주는 패터슨 ⓒ 그린나래미디어(주)


아내 로라는 그의 유일한 독자이자 그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무던한 패터슨과 달리 그녀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신나는 일도 많은, 새로운 것에 거침이 없다. 기타를 배워서 컨츄리 가수가 될 수도 있고 컵케익 장사를 해서 많은 돈을 벌 수도 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로라의 무한 긍정과 그녀의 손길로 매일 같이 달라지는 집을 보면 그녀의 존재는 거의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로라는 패터슨의 도시락 박스에 샌드위치와 함께 매일 다른 자신의 사진을 넣어두고 남편 패터슨의 몸에서 풍기는 옅은 맥주 냄새를 좋아한다. 그녀는 행복한 사람이다. 적어도 영화에서는 그렇게 보인다. 그녀가 집을 꾸미는 모습을 보면 변덕이 심할 것도 같지만 그녀는 패터슨에 특별히 요구하는 것이 없다. 그를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것은 패터슨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패터슨은 패터슨 시를 벗어나지 않는 데다가 그의 매일은 비슷하지만 영화를 보면 그의 하루하루가 마치 여행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는 짐 자무쉬의 전작들을 생각하게 한다. 짐 자무쉬는 첫 번째 장편영화 <영원한 휴가>에서부터 주인공 알리가 지나가는 공간에서 그가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리의 방랑을 카메라에 담았고 이러한 형식은 그의 많은 영화에서 반복된다.

패터슨 또한 각각의 공간에서 각기 다른 인물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일상을 완성하고 있다. 일터에는 동료 도니가 있고 도니는 사소한 골칫거리들을 패터슨에게 하소연하듯이 털어놓는다. 대출금이 밀려 있는데 아내는 여행을 가자고 하고, 딸아이의 바이올린 소리 때문에 쉴 수가 없는 데다가 등에는 뾰루지가 났다는 식으로 그의 푸념거리는 매일 바뀐다. 하루도 성가신 일이 없는 날이 없다.

패터슨이 매일 밤 찾는 바의 주인 닥은 체스 매니아로 스스로를 상대로 체스를 두면서 "오늘은 쉽지 않겠어"라고 하며 미간에 힘을 준다. 바의 또 다른 단골 애버렛은 대책 없는 사랑꾼으로 여자 친구 마리와의 관계가 끝났음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실연에 괴로워한다. 닥을 비롯해 사람들은 에버릿이 자신의 과장된 감정에 빠져 연기를 하고 있다며 비웃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집에는 로라와 마빈이 있다. 이들이 그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매일 달라지는 승객들이 주고받는 대화. 그것은 때로, 자주 패터슨을 미소 짓게 만들고 퇴근길에 우연히 마주친 소녀와의 만남은 그에게 예상치 못한 감동을 준다. 소녀는 자신이 쓴 시를 패터슨에게 읊어준다. 그리고 소녀는 패터슨에게 에밀리 디킨슨을 좋아하는지 묻는다.

"멋져요! 에밀리 디킨슨을 좋아하는 버스 운전사라니!"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패터슨과 소녀 시인과의 만남.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패터슨과 소녀 시인과의 만남. ⓒ 그린나래미디어(주)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직업이 규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정체성은 자신의 직업으로 설명된다. 패터슨을 경쟁자로 생각하는 마빈이 그의 비밀 노트를 갈기갈기 찢었을 때, 패터슨은 파사익 강 폭포 앞으로 가서 하염없이 폭포를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기도 하고, 별일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는 한순간에 자신의 작품들을 잃은 상실감을 애써 달래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일본인 관광객이 그의 옆에 앉아서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 '패터슨'을 펼친다. 패터슨은 곁눈질로 일본인이 펼친 시집을 살핀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패터슨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의사이기도 했고, 윌리엄스는 패터슨 시에 살면서 일상을 시로 기록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일본인이 패터슨에게 "무슨 일을 하시나요?"라고 묻는다. 잠시 망설이던 패터슨은 "저는 버스 운전사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뉴저지, 패터슨의 버스 운전사라. 그것 참 시적이군요." 일본인의 말에 패터슨이 어색하게 웃는다. "왜죠?"라고 패터슨이 묻자 일본인이 답한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 소재가 될 수도 있었잖아요. 때로는 텅 빈 노트가 더 큰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하지요. 아하!"

시로 숨을 쉰다는 일본인은 패터슨에게 새 노트를 선물한다. 시를 좋아하는 버스 운전사가 그에게도 새로웠던 것일까? 일본인이 선물한 노트는 패터슨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는 관객에게도 위로가 된다.

일상과 맞닿은 예술, 패터슨에서 만날 수 있는 감동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주)


예술은 때로 삶보다 거대해 보인다.

패터슨의 마지막 시 'The Line(더 라인)'에서 패터슨은 할아버지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언급하며 "노래에는 노새도 있고 돼지도 있는데 내 머릿속에는 물고기만 기억이 난다고, 마치 노새와 돼지는 애초에 없어도 되는 것처럼"이라고 노래한다. 이것은 닥의 바에 있는 명예의 벽과 같다. 패터슨 시와 관련한 유명인들의 기사를 엄선해서 붙여놓는 벽을 보면 마치 패터슨 시에는 이들만이 존재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생에도 예술에도 기억되는 것보다 잊혀지는 것이 더 많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들에 의미를 두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가치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예술로 완성되었을 때 우리는 아름답다고 얘기한다. 꿈에서 쌍둥이를 가졌다는 로라의 말을 듣고 나서 신기하게도 패터슨의 눈에는 쌍둥이들이 많이 보인다. 전에 없던 쌍둥이들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패터슨 시에 등장한 것일까? 아니다. 그들은 전에도 계속 있었지만 자각하지 못하고 지나쳤을 뿐이다.

예술가들의 삶은 그들의 예술 못지않게 큰 영감을 선사한다. 그들의 기행은 세대가 바뀌어도 계속해서 회자되고, 그들의 수도승과 같은 엄격한 루틴은 많은 이들에게 자극이 되기도 한다. 일상에서 멀어져야 예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래서 예술은 특별하고 매력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패터슨 시에 사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의 일상과 그의 시를 보면서 우리는 그의 작품이 윌리엄스의 시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과 맞닿아 있는 예술을 느끼게 해주어 더 감동적이다.

영화 <패터슨>은 일상 속에서 틈틈이 예술을 완성해나가는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패터슨들을 위한 짐 자무쉬의 헌정이자 위로의 영화다.

덧붙이면, 영화에서 패터슨이 쓴 시들은 미국의 시인 론 파젯이 영화를 위해 쓴 시들이다. 시인은 처음 짐 자무쉬 감독의 제안을 받았을 때 거절했지만 스크립트를 받아 읽고 패터슨이라는 인물에 공감하고 빠져들어 결국에는 감독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영화 속 소녀 시인이 쓴 시 '물이 떨어진다'는 짐 자무쉬가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패터슨 영화리뷰 일상 예술 짐자무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