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터슨>의 작품 포스터.

영화 <패터슨>의 작품 포스터. ⓒ 그린나래미디어


우리는 산다. 여기서 산다는 '살아가다'의 완성형이다. 그런데 사실 삶은 완성되지 않는다. 삶의 끝에 죽음이 있으니 삶의 완성이란 죽음이기 때문이다. 즉 '산다'라는 말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적절치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산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어떻게 살았느냐 묻기도 하고 반대로 물음을 듣기도 한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이 삶의 끝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영화와 우리는 공통점이 많다. 영화 속의 시간은 명백하게 '죽은' 시간이다. 영화가 촬영되던 그 순간은 스크린 위에서만 존재한다. 우리의 삶도 죽어버린 시간을 매 순간 생산해내고 있다. 잠시 뒤의 식사 메뉴 선택에 공을 들이지만 일주일 뒤 같은 시간에 지금 먹었던 메뉴를 기억해내라 하면 눈앞이 깜깜하다.

하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될 때 두 시간은 하나가 된다. 매일 마주하는 일상 속에서 미래와 과거는 하나가 된다. 어제 일이 오늘 일 같고 오늘 일이 어제 일 같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지만 역설적으로 죽어버린 시간 위에 서 있기도 한 것이다. 일상의 문제는 그것에서 온다.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월요일에 목격한 쌍둥이다. 이러한 목격은 일주일 내내 계속된다. 덧붙여서 영화에서 언급되는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과 '패터슨'시의 '패터슨'씨도 쌍둥이처럼 반복된다.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월요일에 목격한 쌍둥이다. 이러한 목격은 일주일 내내 계속된다. 덧붙여서 영화에서 언급되는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과 '패터슨'시의 '패터슨'씨도 쌍둥이처럼 반복된다. ⓒ 그린나래미디어


자신의 삶에서 타인으로 산다는 것

홍상수는 우리의 일상을 거울처럼 비추지만 짐 자무시는 의미 없는 것들을 나열해 보여준다. 그는 <커피와 담배>(2003)를 통해 커피와 담배를 맛깔나게 먹는 방법이 11가지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지상의 밤>(1991)에서는 택시를 타고 끝없이 달리기만 한다. 이 영화에서도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 정말로 일상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가 일상을 다루는 방법은 대표작 <천국보다 낯선>(1984)에 잘 드러나 있다. 그 영화에 나오는 세 인물, 윌리, 에디, 에바는 가난한 청춘이다. 가난한 뉴욕에서 클리블랜드로 떠나도 삶은 지루하다. 푸른 폭포를 상상하며 떠난 플로리다는 꽁꽁 얼어 있다. 한마디로 그의 영화에서 행동과 사물은 의미가 없다. 마치 우리가 아무 뜻 없이 던지는 말처럼 말이다. 

여기서 '아무 뜻 없다'는 건 소위 속된 표현으로 '막말'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위에서 말했듯, 반복되는 일상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해주며 그때 우리는 아무 뜻 없이 행동한다. 짐 자무시의 영화는 그러한 일상을 그리고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것들, 이를테면 이른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샤워를 하고 차 키를 들어 회사에 출근해 점심 메뉴를 상상하고 몰려오는 잠에 고통받으며 다가오는 퇴근 시간에 즐거워하는 일상.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패터슨은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출근길의 풍경을 시로 옮기곤 한다. 그것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한 몸부림 처럼 보인다.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패터슨은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출근길의 풍경을 시로 옮기곤 한다. 그것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한 몸부림 처럼 보인다. ⓒ 그린나래미디어


의미 없는 것들의 모임, 일상

숱한 감독이 일상을 표현하기 위해 그러한 것들에 주목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저 멀리 흐르는 삶 일부를 끊임없이 재생산해내는 것처럼. 홍상수의 영화가 끝없는 자기 반복 속 타인의 시점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짐 자무시는 위의 두 감독과는 다른 방법으로 일상을 그려낸다. 항상 주변에 있고 싶다는 그의 말처럼 그의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주변인이다.

사실 우리의 일상에서 '나'는 내 뜻대로 사는 게 아니다. 그저 여태껏 해왔던 걸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과거의 '나'가 현재를 대신 살아주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것이고. 일상을 그리는 영화들이 주변인으로서의 나를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짐 자무시의 영화는 '의미 없는 것'을 모아 하나의 의미를 생성해낸다.

짐 자무시의 최신작 <패터슨>(2016)은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 '씨'의 이야기를 다룬다. 한국으로 치면 수원시의 김수원 '씨'정도 된다. 인구 14만 명의 패터슨은 버스 기사로 일한다. 이른 아침 일어나보면 아침 6시에서 6시 반 언저리다. 시리얼 한 그릇을 먹고 전날 개어둔 옷을 입는다. 버스에 올라타 업무를 시작하기 전 노트에 시를 적는다. 관리인과 잡담을 나누고 출발해 승객들의 대화를 엿듣는다. 점심시간에는 폭포가 보이는 공원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 퇴근 후에 애완견과 산책하며 바에 들러 술을 마신다. 그리고 반복. 영화는 그의 일주일을 보여준다.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패터슨은 항상 폭포 앞에서 밥을 먹고 남는 시간에 시를 쓴다. 어찌 보면 그의 삶도 시의 운처럼 짜여져 있다.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패터슨은 항상 폭포 앞에서 밥을 먹고 남는 시간에 시를 쓴다. 어찌 보면 그의 삶도 시의 운처럼 짜여져 있다. ⓒ 김선호


그와 그곳의 일주일, 쌍둥이

이 영화에서 패터슨은 도시의 이름이자 그의 이름이지만, 동시에 그가 태어난 곳이자 그가 사는 곳이기도 하다. 즉 '그'의 일주일이거나 '그곳'의 일주일이다. 영화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패터슨에게 시 쓰는 취미를 부여한다. 패터슨이 듣고 보는 모든 게 그의 시에 담긴다. 어떻게 보면 쌍둥이와도 같은 이 조합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그의 아내가 "쌍둥이를 낳는 꿈을 꾸었어"라고 말하는 것으로 확정된다.

당연하게도 꿈은 의도된 사항이 아니니 별 의미가 없다. (정신분석을 할 것이 아니라면)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패터슨의 시야엔 유독 쌍둥이가 많다. 벤치에 앉은 노인부터 버스의 승객까지, 영화가 그리는 일주일 동안 하루에 한 쌍을 마주친다. 만약 다른 영화였다면 그것이 어떤 상징인지 분석하기에 골똘했을 것이다. 하지만 딱히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다. 패터슨의 시선을 따라가니 그렇다.

하지만 그 의미 없는 것들의 모임에서 하나의 의미가 생겨난다.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것에 꽤 큰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 패터슨 본인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패터슨의 무미건조한 표정에서 일상을 읽는다. 앞서 말했듯 그러한 일상성은 짐 자무시의 필모그래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다시 말해 <패터슨>은 일상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상을 말하는 영화다.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패터슨이 하루를 마감하는 술집이다. 그의 애완견은 항상 이 앞에 묶인다.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패터슨이 하루를 마감하는 술집이다. 그의 애완견은 항상 이 앞에 묶인다. ⓒ 그린나래미디어


살아간다는 건 꿈을 꾼다는 것

시와 꿈에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가 느꼈던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는 점이다. 차이점은 이것이다. 시는 물리적인 것을 정신적으로 변환한다. 꿈은 정신적인 것을 물리적으로 변환한다. 바다가 예쁘다던가 황금 돼지를 꾸었다던가 하는 것들. 눈에 담긴 푸른빛을 마음에도 담고 찬란한 황금색이 돈이 되었으면 한다. 패터슨은 시인이지만 그의 아내는 항상 꿈을 꾸는 '몽상가'다. 두 사람은 아주 완벽한 부부인 셈이다.

다르게 말해 패터슨이라는 인물과 공간은 아내와 대비를 이룬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녀는 노래 부르고 싶어 기타를 사고 심심치 않기 위해 소소한 미술을 하며 주말 장터에 내놓을 컵케이크를 굽는다. 패터슨의 일상이 침대에서 술집까지 매번 같지만 그녀는 기타가 이틀 만에 배송된다며 손꼽아 기다린다. 대화는 아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말을 거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어찌 보면 패터슨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패터슨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변화에 익숙해진 사람이다. 매번 반복되는 일상에서 소소한 변화가 일어나지만 패터슨은 한결같다. 운전하던 버스가 갑자기 주저앉아 기분이 조금 상해도 이틀 만에 훌훌 털고 일어난다. 오히려 아내 쪽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녀는 항상 흑과 백으로 여러 무늬를 집안 곳곳에 그려놓는다. 그것은 컵케이크에서도 기타에서도 벽지에서도 커튼에서도 발견된다. 그녀는 무늬 속에 자신의 일상성을 가두어 놓는다. 그것은 마치 부적처럼 기능한다.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익숙한 무늬를 찾아볼 수 있다.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익숙한 무늬를 찾아볼 수 있다. ⓒ 그린나래미디어


긴장이 없다는 건 그만큼 유려하다는 뜻

평소와 다름없이 개와 산책하며 바에 가는 패터슨에게 지나가던 남자가 말한다. 그 개는 비싸 보이니 납치당하지 않게 조심하라고. 하지만 영화 내내 애완견에게 아무 일 없고 패터슨도 아무 반응 없다. 그저 낯선 이의 의미 없는 말이었을 뿐이다. 패터슨이 아는 건 우리도 알고, 우리가 아는 건 패터슨도 안다. 패터슨이 조심하지 않으니 우리도 개가 납치될까 조마조마하지 않다.

그런데 영화에서 우리만 아는 단 하나의 사실이 있다. 매일 패터슨이 퇴근하며 바로 세우는 우체통을, 사실은 그의 애완견이 매번 쓰러트려 놓는다는 사실. 관객에게 일상의 소소한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러한 정보의 격차가 긴장감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것을 생각해보자.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선 일체의 긴장감조차 없다. 심지어 애완견이 시가 담긴 노트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을 때조차 화 하나 없다.

패터슨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내내 무미건조하다. 패터슨은 시를 쓰고, 그가 앉는 모든 곳이 시적이다. 심지어 술집조차 그렇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만 그렇다. '그처럼 시를 쓰는' 어린 여자아이는 그와는 다르게 무척 환한 미소를 가졌다. '같이 사는' 아내는 매번 싱글벙글 웃으며 패터슨에게 말을 건넨다. 그가 가는 술집엔 이별한 여자와 이별 당한 남자가 들러붙어 매번 시끄럽다. 일주일의 끝으로 갈수록 패터슨을 표현한다고 생각했던 풍경들이 사실은 어울리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의 머리 위엔 보이지 않는 스포트라이트가 항상 존재한다. 그는 자기 삶의 주변인이다.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이 장면에서 아주 많은 무늬를 찾을 수 있다.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이 장면에서 아주 많은 무늬를 찾을 수 있다. ⓒ 그린나래미디어


일상 속에서 자신을 찾다

영화는 패터슨을 보여준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패터슨은 도망갈 곳이 없다. 모든 곳이 그의 일상이지만 도피처가 몇 군데 있다. 폭포 앞과 집 지하실, 술집이다. 폭포 앞에서 그는 승객들의 대화를 곱씹으며 시를 구상한다. 집 지하실에서 그는 시를 쓴다. 술집에서 그는 남들과 나누지 않는 진솔한 얘기를 풀어놓는다. 그의 일상은 겉으로 드러난 것에서 시작해 지하실이라는 마음의 중층부, 마침내 욕망이 집약된 초자아의 공간으로 나아간다. 패터슨이라는 공간에서, 마음에서 점점 은밀한 곳으로 향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하실과 술집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밀한 공간이며 폭포는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자신보다 훨씬 큰 버스를 마음껏 부리는 패터슨은 자신보다 훨씬 작은 개에게 끌려다닌다. 아내와 승객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대화는 그를 삶의 주변인으로 만든다. 하지만 술집 안에서 그는 총기를 든 손님을 제압하는 영웅이 된다.

술이 들어가면 사람이 솔직해지듯 술집은 패터슨이 주체로서 완성되는 가장 마지막의 공간이다. 패터슨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은 '시'는 그 술집의 벽에 차곡차곡 쌓인다. 패터슨 시를 무대로 활동하는 유명인들을 모아둔 그 벽에, 패터슨도 '시인'으로서 걸리기 원한다. 패터슨의 아내는 그의 시가 무척 좋다며 시집으로 내자고 졸라대지만 그는 그것이 진심인지 알 수 없다. 가장 편안하고 진솔해야 할 집에서조차 그는 주체가 되지 못한다. 오로지 술집 주인만이 그를 온전히 이해한다.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술집에서 그는 하루를 마무리 한다. 술집은 그의 욕망이 발현되는 은밀한 공간이다.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술집에서 그는 하루를 마무리 한다. 술집은 그의 욕망이 발현되는 은밀한 공간이다. ⓒ 그린나래미디어


지하실에 있던 시를 무심코 거실에 놓은 순간 그것은 애완견에게 찢기고 만다. 다시 한번 반복, 마음속에 있던 이야기를 무심코 내놓은 순간 그것은 타인에게 찢기고 만다. 패터슨의 집에 대한 불신은 그것을 통해 의식의 층위로 올라온다. 여태껏 무덤덤하게 '살아가던' 패터슨은 그제야 동요하게 된다. 그것은 분명 아주 큰 변화다. 그는 그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방황하고 만다. 그럼에도 화는 내지 않는다. 그 순간은 마치 주변인 패터슨이 자신의 감정을 피해 가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말할 수 없다. 지금 극장에서 상영 중이니 찾아가서 보시길.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폭포 앞에서 영화가 끝난다. 마음을 드러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누군가에 의해 그는 일상을 회복한다. 여기서 회복이라는 단어는 일상을 탈피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패터슨>은 갑갑한 일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마치 연어처럼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오는 게 패터슨에겐 '일상'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동시에 개재되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하여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짐 자무시 패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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