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밀은 없다>(2016)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었다. 일부는 "역시 이경미"라고 극찬했지만 필자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모호하다고 생각했다. 이경미 감독의 세계를 존중한다고 해도 영화의 톤이 울퉁불퉁하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이경미 감독 영화의 장점은 분명하다. '이경미 월드'에서 여배우들은 독특한 캐릭터로 분해 매력을 발한다.

영화 <미쓰 홍당무>(2008)에서 배우 공효진이 맡은 양미숙 캐릭터도 그러했고 <비밀은 없다>에서 연홍으로 분한 손예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해 여우주연상을 손예진에게 준다면 <덕혜옹주>보다 <비밀은 없다>의 연홍이 더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2017 춘사영화제는 <비밀은 없다>의 손예진에게 여우주연상을 수여했다. JTBC 예능 프로그램 <전체관람가>에서 이경미 감독이 만든 단편 '아랫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12년 만에 돌아온 이영애는 희지 캐릭터로 분해 인상 깊은 연기를 펼쳤다.

 비밀은 없다

비밀은 없다 ⓒ CJ 엔터테인먼트


히로인을 통해 빛나는 이경미월드

'괴랄하다'는 말은 사전에는 없는 인터넷 신조어다. '괴이하다'와 '악랄하다'가 합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이 단어는, 이경미 감독 영화를 표현하는 말로 자주 사용된다. 이경미 감독 영화의 주인공인 여배우들이 '괴랄한' 캐릭터를 연기하기 때문. 일반적이지 않은 장면에서 이경미 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흐뭇하다 못해 흡족한 듯한, "아하하하하" 고성의 웃음을 터뜨린다. 이는 물론 이경미 감독의 취향에 기반을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저 취향 이전에, 이경미 감독은 '정상'의 세상에 '정상'처럼 살아갈 수 없는 인간들을 포착하고 있다.

 미스 홍당무

미스 홍당무 ⓒ 빅하우스(주)벤티지홀딩스


고등학교 러시아어 교사의 짝사랑 수난사를 그린 <미쓰 홍당무>에서 양미숙(공효진 분)은 안면홍조를 앓고있는 데다 비호감의 언어를 툭툭 내뱉는 '사랑스럽지 않은' 여주인공이다.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의 '사랑'을 내세우는, 역설적인 이 작품은 상처받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또 어떤가. 전라도 출신의 여성 연홍은 경상도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지역으로 시집오게 된다. 그는 정치인의 현모양처를 자처한 '딜레마'의 응집체다. 딸을 잃고 무당 앞에서 접신을 하며 자신을 드러낸 연홍은, 고향 사투리를 숨기고 타지역에서 이방인으로 묻어가야 했던 그 수난의 시절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자신의 희생을 통해 지탱하고 있던 가정이란 신기루는 사라졌다. 그야말로 '아노미'의 상태를 이경미 감독은 적나라하게 연출한다.

이경미 감독의 영화에는 사회가 제시하는 고정 관념 속에서 살아가지만 끝내 그 틀에 끼워맞추기 어려운 인간의 몸짓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이경미 감독의 작품 속 여성들은 '제 정신이 아닌듯' 하지만 그래서 공감이 가고 마음을 울린다.

 전체관람가

전체관람가 ⓒ JTBC


겨우 15분 여의 단편이지만 <아랫집>에서 이영애가 분한 희지 역시 다르지 않다.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신사임당 역을 맡은 이영애는 여전히 예뻤지만 어쩐지 박제된 인물을 보는 듯했다. 반면 <아랫집> 속 희지로 분한 이영애는 무표정으로 일관하지만 훨씬 생동감 있다. 그 원천은 바로, 아파트 담배 연기에 하소연하면서도 상실의 노이로제로 어찌할 줄 모르는 위기의 여성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층간 갈등에서 아파트 공동체에 대한 화두까지

 전체 관람가

전체 관람가 ⓒ JTBC


'미세먼지'의 주제를 선택한 이경미 감독은 그 '미세먼지'를 아파트 담배 연기로 인한 층간 갈등으로 풀어가고자 한다. 말이 서로 다른 독립 세대지, 화장실과 하수구 등을 통해 서로가 연결된 공동체 아파트. 그 406호에 사는 희지는 아랫집 306호에서 올라오는 담배 연기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그리고 그 고통에 대한 화답으로 그녀는 매일 아침 청소기를 들고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고, 그걸로도 풀리지 않은 마음을 결국 편지에 담는다.

영화는 담배 연기로 인한 층간 갈등을 주제로 삼았지만, 그 갈등의 주체가 되는 인물의 내면과 그 인물이 부닥치는 또 다른 인물들을 통해 아파트란 공동체가 가지는 다양한 층간 갈등의 유형을 드러내고자 한다. 영화는 마치 '너구리잡기' 게임처럼 그 짧은 시간에 희지라는 인물의 상처와 그 상처입은 인물이 마주한 세상의 잔인함, 그리고 그것의 역설까지 두루두루 섭렵하고자 애쓴다. 정작 윗집에 담배 연기 고통을 호소하는 희지가 흡연자였다는 반전처럼 이경미 감독은 평범한 일상의 틈을 비집고 나오는 일탈의 기운을 곳곳에서 포착해 내고자 한다. 덕분에 영화는 '괴랄한' 아파트 공동체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가 하면, 동시에 더 '괴랄할 수밖에 없는' 희지의 개인사에 대해 깊은 스펙트럼까지 더한다.

 아랫집

아랫집 ⓒ JTBC


이경미 감독은 아파트 공동체의 층간 갈등의 요인들을 '이영애'가 분한 '희지'란 대표적 인물과 '개구리'를 통해 풀어냄으로써, 실험적인 묘사의 계보를 잇는다. 메이킹 영상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이해하려 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이경미 월드!

이경미 감독의 괴랄함은 이경미 감독이 그 어느 때보다도 편하게 작업했다는 소감에서도 느껴지듯이 '상업 영화'라는 궤도에서는 순항이 어려운 시도들이다.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이경미 감독의 작업이 <전체 관람가>의 의의를 빛낸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전체 관람가 -아랫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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