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토르: 라그나로크>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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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마블의 어떤 캐릭터를 좋아하는가?"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는 2017년, 지난 수년 간은 마블의 시대였다. 2016년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아래 <시빌 워>)가 끝난 후 필자의 친구들은 팽팽하게 두 파로 나뉘어 '아이언맨' 혹은 '캡틴 아메리카'를 지지했다. 직장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 필자가 다니던 언론사에서는 20대 초반부터 50대 중반까지의 다양한 연령대의 직장 동료들이 <시빌 워>를 봤고 점심시간마다 그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당시 필자는 '양쪽 다 이해가 간다'는 입장이었는데 대부분은 한쪽을 극단적으로 지지하는 경향이 커서 흥미로웠다. 그리고 각 캐릭터를 지지하는 성향을 분석하고 이유를 들어보면 그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도 이해하게 됐다. 이제 마블은 사람들을 분석할 수 있는 지표가 될 정도로 대중의 의식 속에 자리 잡았다.

마블 스튜디오의 세계관은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시빌 워>의 이야기는 영화 <스파이더맨: 홈커밍>과 <토르: 라그나로크>로 이어진다.

토르, 헤르만 헤세의 골드문트가 떠오르는 이유

필자는 마블에서 '토르'를 가장 좋아한다(그리고 <데드풀>과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를 사랑한다).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뒤늦게 읽었던 스물두 살, 내 머릿속의 골드문트는 금발의 소년이었다. 하지만 <토르>나 <러시>에서의 크리스 햄스워스를 접하고 나면 '사실 골드문트는 저런 모습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던 순간이 있었다. 골드문트의 성인 버전을 시각화한 듯한 건강하고 매력 넘치는 약간의 백치미를 가진 캐릭터와 '아버지의 차별로 인해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형제'라는 테마, 북유럽 신화에 대한 호기심과 환상은 영화 <토르>에 대한 흥미를 자극했다.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 크리스 햄스워스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 크리스 햄스워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토르>는 배우진도 출중하다. <토르: 다크 월드>에서 오딘 역을 맡은 앤서니 홉킨스 같은 대배우는 물론이고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한 내용 때문인지 지구인 역으로 스웨덴의 거물 배우 스텔란 스카스가드도 등장한다. 북유럽 신화를 모티브로 한 <토르>의 캐스팅은 여성 관객에게 짜릿할 정도로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 캐스팅 중 한 명인 이드리스 엘바를 보자. <토르> 시리즈에서 헤임달 역을 맡은 이드리스 엘바는 '영국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라는 수식어를 달 정도로 섹시함의 대명사 격인 배우다. 그가 단독으로 나와 여성들에게 말을 거는 발렌타인 데이 특집 광고도 영국에서 유명세를 탔다. 크리스 햄스워스, 톰 히들스턴, 이드리스 엘바가 총 출동한 영화라면 여성에게는 섹시함의 극점을 찍는 환상 캐스팅인 것은 분명하다.

▲토르에서 헤임달 역으로 열연한 이드리스 엘바의 발렌타인 특집 광고. 이드리스 엘바가 섹시한 모습을 강조해 기부를 촉구하는 광고다.

신화를 기반으로 한 영웅 스토리와 캐릭터가 매력적이었던 <토르: 천둥의 신>과는 다르게 두 번째 편이었던 <토르: 다크월드>는 팽팽한 갈등이 빚어내는 긴장감, 반전, 유려한 영상미, 트릭스터인 로키의 캐릭터가 훌륭한 재미를 선사했다. 너무 재밌게 봐서 한번으로는 부족해 다시 한번 극장으로 향했던 영화였다.

미드 <섹스 앤 더 시티>를 처음 감독하고, 미드 <왕좌의 게임> 시즌 1 과 시즌 7을 연출한 앨런 테일러의 연출도 취향이었다. <토르: 다크 월드>에서 제2제작진 감독으로 참여했던 영화 <데드풀>의 감독 팀 밀러는 필자에게 '앞으로 영화를 만든다면 꼭 보고 싶은 취향 100% 적중의 감독'으로 급부상했다.

한편 할리우드 가십지는 '제인 역을 맡았던 나탈리 포트만이 <토르: 다크월드>의 촬영장에서 자기 주장을 관철하고자 벌인 소란과 행패 때문에 다시는 마블 영화에 출연하지 못할 것'이라는 풍문을 전했다. 하지만 그런 잡음이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토르: 다크 월드>는 매끄럽고 환상적이었다.

다수의 마블 영화들은 시리즈 각각을 연출한 감독들이 다른 경우가 많다. 같은 시리즈라도 개별 영화들은 연출을 맡은 감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마블은 다양한 변주를 선보이면서도 <어벤져스> 시리즈를 제외하고는 한 영화에 한 영웅을 집중시키는 전략을 기본으로 그간의 모든 영화를 성공시켜 왔다. 이제까지 마블이 한 차례의 큰 상업적 실패도 없이 많은 영화들을 성공시킨 것은 놀라운 성과지만 그 첫 번째 실패가 언제가 될지도 주목하게 됐다.

2008년 영화 <아이언맨>으로 시작된 마블의 첫 성공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2018년 개봉 예정인 우주를 배경으로 마블 유니버스가 펼쳐지는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이전에 이미 마블의 잦은 시리즈 영화화에 너무 익숙해진 관객들이 생길 시기다. 언젠가 마블의 첫 번째 흥행 실패작이 발생하고, 관객들이 등을 돌리면 인기의 거품이 빠지면서 이미 문화 현상이 되어버린 마블의 쇠퇴기가 오지는 않을지 예의 주시하게 된다. 마블도 이 위험성을 알기에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며 공을 들여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럼 <토르: 라그나로크>는 어떤 영화인가?

<토르: 라그나로크>는 이전의 <토르>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어벤져스>가 합쳐진 하이브리드 영화였다.

<토르: 라그나로크>의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뉴질랜드 출신으로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모아나>의 각본을 썼다. 북유럽 신화 배경의 <토르>에 어울리는 188cm의 거구인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이 그간 만들어 온 영화는 비평가들에게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접해보지 못한 관객이 많은 한국에서는 아직은 이름조차 꽤 신선한 감독이다. 그가 <토르>에 새로운 색을 입혀줄 것에 대한 기대감 반, 그리고 <토르: 라그나로크>가 마블의 첫 번째 실패작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의 마음도 반 있었다.

결론적으로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토르: 라그나로크>에 자신의 색을 입혔고, 캐릭터의 성격을 완전히 뒤집었다. 복고풍 팝송이 끊임없이 나오는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처럼 70년대 명곡 레드 제플린의 '이미그랜트 송'을 흩뿌리며, 유머를 마구 집어넣고 사카아르 행성에도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가 생각나는 디자인을 입혔다. 유머, 음악, CG 디자인 등 많은 부분에서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를 연상케하는 토르의 마지막 대관식을 지켜보니 <어벤져스:인피니티 워>의 우주로 가는 길목에서 <토르: 라그나로크>가 안내인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하단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토르>의 팬이었기에 4년 간의 기다림도 길지 않게 느껴졌지만, <토르: 라그라로크>는 아쉬움도 많은 영화였다. <토르: 라그라로크>의 아쉬운 점은 크게 네가지다.

첫째, 감정 이입을 느끼기 어려운 장면 전환

만약 이 영화가 마블의 이름표를 붙이고 나온 작품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이 영화에서 마블이라는 요소를 제거하면 흔한 그리스 신화를 다룬 판타지 영화처럼 한국에서는 흥행에 실패하지 않았을까? <토르: 라그나로크>는 스토리 전개에 따른 감정선을 관객이 가슴으로 느끼기도 전에 장면이 연달아 너무 빠르게 전환되어서 내내 감정 이입할 시간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극중 인물들의 변심이나 결단에서도 큰 공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그 대표적인 예는 지나간 기억을 보여주는 로키의 손길이 한번 닿고 나서 바로 돌변하여 팀 리벤져스로 합류하는 발키리의 모습이다. 기억 속의 아름답고 처절한 멸망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외에 발키리의 결심을 공감케 할 각본 상의 탄탄한 근거는 발견할 수 없었다.

중요한 장면이지만 감정적으로 와닿지 않았던 또 다른 예는 헬라의 집행인이 되었던 스컬지의 변심이다. 이런 전반적인 감정 이입 부족 현상은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 VOL.2>에서 '욘두'에게 관객들이 감정 이입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연상되도록 많은 부분을 연관되게 연출했는데 유머와 호쾌함은 닮아가려 노력했지만 진한 감동을 전달하는 부분에서는 실패한듯 보인다.

영화 속 캐릭터에 대한 생생한 감정 이입을 만들어 주는 것은 매력적인 캐릭터 연출, 탄탄한 스토리와 복선이다. <토르: 라그나로크>의 스토리는 장면, 장면 편집이 끊긴듯이 초고속으로 전환된다. 감동을 이끌어내야 할 장면에서는 대사나 스토리가 아닌 웅장한 음악으로 감정을 짜내려는 모습이 보일 지경이다. 머릿속으로 오딘에게 무릎을 꿇고 답을 구하는 토르의 모습도 관객이 안타까움을 느끼며 공감하기 보다는 토르의 감정에 이입하지 못한 채 한 발짝 떨어져 관망하게 만들었다. 필자를 제외하고도 <토르: 라그나로크>를 보면서 오딘을 잃은 토르의 슬픔에 공감하는 관객은 많지 않았을 것 같다.

시각적으로는 무척 화려했지만 관객은 감정을 고조시키지 못하는데 배우들만 감정이 격해진 장면들이 난무했다. 이미 열렬하게 열광할 준비가 되어 있는 마니아층 외의 관객들이 가슴으로 느끼기에는 너무 빠르게, 너무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둘째, 아쉬운 유머 번역

<토르: 라그나로크>를 만들면서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처럼 많은 유머를 삽입했다.

그런데 그 말의 맛을 이용한 유머의 한국어 번역이 아쉬워서 객석에서는 웃음소리가 유머의 분량만큼 터지지 않는다.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의 유머에 비교하자면 <토르> 속의 말장난 유머는 불발 확률이 더 높았다. 예를 들면 영화 시작 초기부터 "오딘손(선 오브 오딘)"이라는 수르트의 대사를 "선 오브 비치"라고 맞받아치는 토르의 말재간도 자막으로는 충분히 표현되지 않았다. 역자가 다크 엘프를 난쟁이로 번역한 이유는 어떤 의향이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발키리가 토르를 '폐하'라고 높이며 존대어로 비꼬는 듯한 표현들도 번역에는 간략하게 반말로 처리해서 말맛을 살리지 못 했다.

로키가 오딘을 보내버린 지구의 양로원이 공사로 허물어진 장면, 배너 박사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살신성인하는 모습에서 터져버리는 웃음이나 현실 형제 모습을 방불케하는 오딘손 형제의 '도와줘 작전', 로키의 표정을 이용한 웃음 유발 장면 등은 불발되지 않았다. 영화 중간 중간 워낙 많은 자잘한 유머가 나오기에 말맛이 충분히 살아나지 않아도 웃음 비율은 높지만 아쉽다.

놓치지 말고 주목해야할 작은 유머 포인트 중 하나는 토르를 이발시키는 장면에 등장한 마블의 아버지, 마블 명예회장 스탠 리다. 마블의 영화마다 카메오로 출연하던 스탠 리 명예회장은 이번에는 꽤 주목받는 역할로 출연했다.

셋째, 완전히 뒤집힌 캐릭터 해석

죽은 것으로 생각되었던 로키가 오딘으로 변신한 채 왕좌에 앉는 엔딩으로 <토르: 다크 월드>는 화려하게 끝을 맺었다. <토르: 다크월드>의 강렬한 엔딩은 4년에 걸친 기다림에도 새로운 <토르>시리즈를 강력하게 기대하게 만들었다. 이 4년 전의 엔딩이 블러핑으로 느껴질 정도로 <토르: 라그나로크>는 전 편의 긴장감 넘치게 마무리 지었던 이야기를 유머로 흐지부지 넘어간다.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토르와 로키, 헐크와 배너의 대사는 모두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식의 유머로 버무려졌다. 이미 토르와 로키 형제가 손을 잡은 이상, 확정된 적을 쓰러트리기까지 극적으로 고조된 긴장감이나 반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작까지 이어왔던 어두운 트릭스터 로키로 인한 긴장감 역시 <토르: 라그나로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토르와 헐크의 대결은 흥미롭지만 <시빌 워>에서처럼 몰입하게 되는 인간적 갈등은 없다. 심지어 대결의 결과조차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궁금증만 남기는 용두사미의 힘자랑이다.

토르, 로키, 배너 세 명은 모두 코메디 영화 <해롤드와 쿠마>에 나오는 캐릭터 같은 행동을 한다. "머리를 자르지 말라"고 코믹하게 고함치는 토르의 모습에서 2000년 대 초반, 한국 영화 속에서 감초처럼 빠지지 않던 진부한 유머 코드가 느껴졌다. 마치 영화 <신라의 달밤>(2001)에 나오는 배우 차승원을 보는 것 같았다.

토르와 헐크가 아웅다웅하는 장면에서는 감독이 유머를 이용해 캐릭터를 이전과 다르게 풀어나간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지만, 두 명 다 이전의 캐릭터가 깨져버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토르와 손을 잡은 로키는 너무 유머로 점철되고 인간적인 모습이 계속 강조된 나머지, 위험하고 어두운 분위기와 섹시한 매력이 감소했다.

<토르>의 인물들이 완전히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화 되버렸는데 <토르>시리즈의 고정 팬들은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처럼 마냥 즐길 수만은 없는 상황을 맞이해버린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로키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다면 긴 시간동안 로키를 비뚤어지게 만든 오딘에게 그 책임이 돌아가고, 헐크는 이제야 약 10년 만에 캐릭터를 얻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영화 <어벤져스: 시빌 워> 이후 사카아르 행성의 챔피언으로 <토르: 라그나로크>에 등장하는 헐크

영화 <어벤져스: 시빌 워> 이후 사카아르 행성의 챔피언으로 <토르: 라그나로크>에 등장하는 헐크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캐릭터의 성격이 급격히 변화했기 때문에 <토르: 라그나로크>는 도리어 기존의 <토르> 시리즈의 팬이 아닌 <토르: 라그나로크>로 토르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 즐기며 좋아할 수 있는 영화다. 영화는 시종일관 액션과 가벼운 유머들로 진지해질 필요 없다는 듯 재미를 뽐낸다. 캐릭터들은 인간미와 친근감을 느끼게 바뀌었다.

2년 간 사카아르 행성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지만, 헐크는 말은 짧지만 대화가 가능한 인격체로 묘사되었다.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캐릭터 성격이 바뀐 로키는 현대 사회의 인간 유형에 적용하자면 관심종자이자 '욜로(YOLO)' 라이프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벤져스>에서 토니 스타크가 로키의 성격을 분석한 대사와도 들어맞는 모습이다.

넷째, 화려하지만 타격감이 없는 액션신

<토르: 라그나로크>의 액션신은 화려하지만 창의적이거나 정교하지 않았다. 다만 고화질 게임 화면처럼 웅장했다. 초반에 나왔던 묠니르 망치 시점의 액션은 칭찬할만 했다. 하지만 이후 각 캐릭터가 몸을 이용해 보여준 액션의 합은 미묘하게 딱 맞아 떨어지지 않아 긴장감을 흐트러트렸다.

필자가 최근에 봤던 가장 인상깊은 맨손 격투 신은 <시빌 워>의 조감독이었던 데이빗 레이치가 만든 2017년작 <아토믹 블론드>다. 이 영화에서 샤를리즈 테론은 맨손 격투로 열연을 펼쳤다. 자동차 트렁크에 넣은 적을 후려치는 딱 한 합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동작과 타격음의 타이밍이 살짝 어긋나 어색했던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아토믹 블론드> 후반에 샤를리즈 테론이 계단을 구르며 펼친 맨손 격투씬은 훌륭한 타격감과 몰입도를 보여줬다. 샤를리즈 테론은 강인함을 갖췄고 여성에게도 강력하게 어필하는 섹시함과 카리스마를 겸비한 배우지만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헬라를 연기한 케이트 블란쳇의 카리스마는 결코 그에 뒤지지 않는다.

다만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여성 캐릭터들의 격투신은 특수 효과와 CG를 잔뜩 사용했지만 정교함이 부족했다. 때문에 실제 격투를 보고 있는듯한 타격감 넘치는 몰입은 없었다. 같은 여성의 액션이라도 <원더우먼>이나 <아토믹블론드>의 타격감과는 달랐다. 소리와 액션의 합, CG의 반응 사이에 미묘하게 아주 작은 붕 뜬 공백이 느껴졌다. 다만 헬라의 후반부 아스가르드 전투신만이 비교적 합이 정확히 잘 맞아떨어지며 조금 나은 모습을 보였다.

<토르: 라그나로크>는 주역 2인 남성인 토르와 로키, 그리고 그들과 동수인 2인의 여성 헬라와 발키리를 주역으로 등장시켰다. 남성과 여성의 주역 비중을 맞추고, 소수자 유머를 넣는 등 통합주의 시대에 걸맞는 리버럴한 시각을 취한 영화기도 했다. 하지만 케이트 블란쳇의 훌륭한 연기가 만들어낸 헬라의 카리스마에도 불구하고, 헬라라는 캐릭터가 가진 강력한 두려움이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되지는 못 했다.

유머가 가벼운 만큼 헬라의 공포도 가벼웠다. 스토리텔링의 부족과 그 외의 아쉬운 점들이 계속 눈에 띄었다. 영화 속에서 '헬라는 무서운 존재다'라고 강조할 뿐이지 헬라의 성격을 관객이 있는 그대로 '두려움'으로 느끼게 할 만한 요소나 에피소드는 현저히 부족했다. 무서운 화장을 하고 훌륭한 연기를 하는 배우를 고용해 묠니르도 깨버린 '제일 강한 존재'라는 타이틀만 붙여준다고 해서 관객의 가슴에 캐릭터가 살아 숨쉬지는 않는다는 점을 <토르: 라그나로크>를 보면서 느낄 수 있었다.

아스가르드를 표현하는데 사용된 CG는 환상적인 느낌을 주지만, CG가 너무 게임 화면처럼 사용된 액션신은 통쾌함을 반감시켰다. CG를 넣기 위해 온통 녹색의 공간에서 연기해야할 배우들을 생각하면 그 노고가 짐작된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를 제외하고, 실제적인 정교함보다는 CG와 음악의 힘에 기대려는 모습이 큰 아쉬운 액션신이 못내 아쉬웠다. 특히 초반부 발키리의 액션신은 동작이 어설퍼 보여 아쉬움이 컸다.

그럼 <토르: 라그나로크>의 장점은 무엇일까?

<토르: 라그나로크>의 한가지 확실한 장점을 들자면 레드 제플린의 '이미그랜트 송'이다.
초반부터 후반까지 등장하는 '이미그랜트 송'은 <토르: 라그나로크>를 보는 동안 음악적인 희열을 선사한다. 영화 속에서는 OST로 스토리의 개연성 부족이나 감정 연출을 메꾸려는 모습도 보이지만, OST가 전반적으로 훌륭한 것이 큰 장점이다.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는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나오는 음악때문에 일어서서 춤추고 싶어졌었다. <토르: 라그나로크>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춤추고 싶은 기분이 간절해졌다.

▲ 레드 제플린의 '이미그랜트 송'이 삽입된 <토르: 라그나로크>의 트레일러


자신의 존재 자체로 배역을 빛내주는 배우들도 훌륭하다. 토르 역의 크리스 햄스워스와 "꿇어라"고 말하는 카리스마가 압도적이었던 헬라 역의 케이트 블란쳇은 대체 불가의 배우였다. 로키 역의 톰 히들스턴이나 배너 역의 마크 러팔로 역시 그렇다.

<토르: 다크 월드>에서 가장 수려한 영상미가 돋보이는 장면이 왕비의 장례식에서 등을 하늘로 띄워 보내는 장면이었다면,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영상미가 가장 돋보였던 장면은 로키가 발키리에게 회상시켰던 기억이다. 기억 속에서 발키리와 헬라가 대적하는 장면은 고대 벽화같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로키가 발키리에게 보여준 장면이다.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로키가 발키리에게 보여준 장면이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헬라가 빌런이 된 이유는 주목할 만하다. 헬라는 토르가 태어나면서 '아버지의 최고의 무기', '아버지를 위해 역할을 수행하는 집행인'에서 추락하여 정체성을 부정당했다. 악한 것, 폭력적인 것으로 매도당하기에는, 헬라가 이전부터 갖고 있던 공격적인 전투 성향은 토르 탄생 이전에는 오딘에게 높이 평가받았던 것이었다. 오직 토르를 편애하며 누나 헬라와 동생 로키를 차별한 아버지 오딘은 일그러진 자식들을 빚어낸 나쁜 아버지 상이었다.

<토르: 라그나로크>의 장점 중 하나는 오딘에게 차별당한 헬라에 감정 이입할 여성들에게도 불편하지 않을 결말이었다는 점이다. 편애의 수혜자인 토르가 차별받아 악의 화신이 된 헬라를 직접 쓰러트리기보다는 로키와 발키리의 도움을 받아 수르트의 힘으로 헬라를 제거한다. 이 결말은 단순한 반전을 넘어서서 <토르: 라그나로크>가 통합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영화로 보이게 해준다.

<토르: 라그나로크>에서는 그간 갈등만 빚어오던 토르와 로키의 형제애가 돋보인다. 격투장 대기 장면에서 오딘을 잃고 낙심하고 있는 토르에게 나타난 로키가 "함께 나라를 만들자"며 제안하는 장면은 형의 애정을 갈구하는 로키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로키는 <토르> 1, 2에서 보여줬던 어두운 트릭스터로서의 강렬한 매력은 줄어들었지만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새로운 매력을 뽐냈다.

로키를 주목해서 보고 있노라면 영화 <어벤져스>에서 토니 스타크가 평한 로키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로키는 협상 능력이 뛰어나서 어디를 가든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우주 어디를 가서도 분위기 파악하는 능력은 최상급이다. <토르: 다크월드>에서 지구를 지배하는 조건으로 협상하거나,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그랜드마스터와 친구가 되어 있는 장면에서도 로키의 적응력을 알 수 있다. <토르: 라그나로크>에서는 기절해서 깨어나자마자 사카아르 반란군에게 "리더가 필요하지 않은지" 묻는 장면에서 로키의 협상 능력과 순식간에 분위기 파악하는 능력은 빛을 발한다.

'라그나로크(신들의 몰락)'라는 제목에 맞게 타이카 와이티티감독은 오딘이 사라진 후의 로키를 인간적으로 묘사한다. 로키가 아스가르드에 거대한 자신의 동상을 세워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놓은 장면은 인정 욕구만 충족되면 어디가서든 능력을 발휘할 인재라는 인상을 풍긴다. 신도 인간처럼 결핍된 부분이 채워지면 온화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차별하는 아버지인 오딘의 곁에서는 로키가 자신을 찾기 어려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스갯소리지만 '모두가 로키를 인정하고 칭찬해주는 분위기에서 아이언맨인 토니 스타크에게 계열사 하나 받아서 경영하기 시작했다면 로키는 지구에 정착해서 승승장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토르가 배너에게는 "싸우는 걸 좋아하는 헐크는 별로"라고 말하고, 헐크에게는 "숫자놀이 좋아하는 배너는 별로"라고 말하는 장면은 인간 같은 천둥 신의 정치적 처세술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토르: 라그나로크>는 이전 그대로의 토르와 로키를 원하던 관객들은 실망하겠지만, <어벤져스>를 재밌게 보는 관객들이라면 좋아할지도 모르는 영화다.

사람마다 서로 취향이 다를 터인데, 필자는 마블의 개별 영화보다는 어벤저스 시리즈에 대한 평가가 박한 편이다. 한 인물 스토리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만들기 보다는 다수의 캐릭터가 등장해서 솜씨를 뽐내는 이야기에는 쉽게 식상해질 위험 요소가 있다. 충분한 갈등 구조를 만들지 않으면 여러 영웅이 재주 자랑하다가 힘 합쳐서 강한 적을 쓰러트리는 평면적인 이야기밖에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각적 화려함을 아무리 더해도 이렇게 극적 위기감이 조성되지 않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보다 더 많은 정교한 장치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토르: 라그라로크>는 <어벤져스> 같았다. <어벤져스>를 재밌게 본 관객에게는 충분히 어필할지도 모른다. 즐겁게 스트레스를 풀고 싶은 관객에게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DC는 그동안 여러 영웅들이 함께 출연하는 내용의 영화를 만들다가 계속 흥행 참패를 면치 못 했다. 그러다가 <원더우먼>으로 흥행 재미를 보고 이제 단독 영웅물을 만들기 시작하는 추세다. 마블의 행로는 DC와는 반대로 <어벤져스>를 제외하고도 한 영화에 여러 영웅들과 여러 코믹스의 스토리를 녹여내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의 색을 입어버린 <토르: 라그나로크>의 모습은 양쪽의 팬인 필자에게도 새로우면서도 너무 빠르고 마냥 좋게만 느껴지지 않는 단점이 여럿 드러난 영화였다. 앞으로 마블과 DC의 흥행 추이가 어떻게 바뀔지도 궁금한 대목이다.

<토르: 라그나로크>는 25일 1600개 상영관에서 상영을 시작했으며 문화의 날을 맞은 개봉 첫 날 41만 명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 종료 후 쿠키 영상은 2편이 나오며 첫 번째 쿠키 영상에서 타노스가 등장한다.

 영화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 VOL.2>

영화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 VOL.2>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덧붙여, <토르: 라그나로크>로 토르를  처음 보고 마음에 든 팬에게는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 1, 2>와 <스타트랙>을 강력히 추천한다.

토르 라그나로크 로키 레드제플린 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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