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휘 선수(왼쪽)와 차상현 감독

강소휘 선수(왼쪽)와 차상현 감독 ⓒ 한국배구연맹/박진철


신선했다. 여자배구에도 정통 스피드 배구 팀이 등장했다.

GS칼텍스는 17일 도드람 2017~2018 V리그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던 한국도로공사에 세트 스코어 3-2로 승리했다. 승리보다도 경기 내용과 배구 스타일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지난 9월 열린 KOVO컵 우승으로 올 시즌 돌풍의 팀이 되리라고 예상은 됐었다. 그러나 GS칼텍스는 V리그 첫 경기에서 '그 이상'을 보여주었다. 차원이 다른 '스피드 배구'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빠르고 다채로운 토털 배구였다.

이날 경기에서 GS칼텍스는 강소휘가 24득점, 듀크 20득점, 표승주 19득점으로 공격 삼각편대가 '꿈의 득점 분포'를 보였다. 센터 공격수도 문명화 11점, 이영 6점, 김유리 5점으로 22득점을 합작했다.

주전 선수의 고른 득점 분포는 토털 배구를 핵심 바탕으로 하는 스피드 배구가 갖춰야 할 기본 요건이다.

강소휘·표승주·문명화... '작년 그 선수'가 아니었다

더 놀라운 점이 있다. 주전 선수 전원이 지난 시즌보다 기량이 많이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레프트인 강소휘(21세·180cm)와 표승주(26세·182cm)는 공격 파워와 빠르기가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2단 연결이나 찬스 상황에서 공격 성공률이 눈에 띄게 향상됐다.

특히 강소휘는 전위뿐만 아니라 후위에서도 유럽·남미의 레프트 공격수에게서 볼 수 있는 '파이프 공격'(중앙 후위 시간차)를 거침없이 퍼부었다.

​강소휘는 지난 6월 한국-태국 올스타 슈퍼 매치에서 파워 있는 공격력을 선보이며 국가대표 레프트감으로 큰 기대를 모은 바 있다. 그러나 대회 직후 위 종양 제거 수술을 받으면서 국제대회 출전을 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현재는 완치가 됐다.

GS칼텍스는 강소휘와 듀크(33세·180cm)가 수시로 파이프 공격을 하면서 공격 옵션이 훨씬 다채로워졌다. 듀크는 세계선수권 본선 티켓이 걸린 2017 여자배구 아프리카선수권 대회에 출전하면서 지난 9월 말부터 16일까지 20여일 동안 팀을 떠나 있었다. 경기 전날인 16일 입국했다. 시차 적응도 안된 상태인 데다, 오랫동안 동료들과 손발을 맞추지 못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기력이 나올 수 없었다.

그러나 강소휘와 표승주가 외국인 선수 못지 않은 공격력으로 도로공사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서브 시리브와 수비력도 일부 실수는 있었지만, 준수한 모습을 보였다.

이나연, '스피드 배구 최적화 세터' 거듭나다

센터진의 활약도 눈부셨다. 문명화(23세·189cm), 이영(22세·180cm), 김유리(27세·182cm) 3인방이 지난해보다 한결 빠른 속공으로 상대의 높은 센터 블로킹을 무력화시켰다.

문명화는 신장은 크지만 빠르기와 파워가 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이날은 스피드 배구 시스템에 잘 녹아든 모습이었다. 이영도 속공 스피드가 한층 빨라졌다. 국가대표팀 활약으로 오랫동안 팀을 떠나 있었던 김유리까지 적응이 완료된다면, GS칼텍스의 센터진은 더 강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스피드 배구의 지휘자인 세터 부문도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나연(26세·173cm)은 토스 구질이 빨라 스피드 배구를 구사할 만한 세터로 평가를 받아왔었다.

이날 경기에서도 스피드 배구에 최적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리시브가 흔들리거나 2단 연결 상황에서도 빠른 토스와 함께 주전 선수 전원을 고르게 활용하며 공격 성공률을 끌어올렸다. 안혜진(20세·175cm)도 백업 세터로서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모험, 그러나 '의미 있는' 시도

사실 한국도로공사도 경기력이 나쁜 건 아니었다. 1~2세트는 부담감 등으로 흔들렸지만, 3세트 이후부터는 지난해보다 전력이 강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외국인 선수 이바나와 이적생 박정아도 충분히 제 역할을 했다.

V리그가 6개월여의 장기 레이스이고 백업 멤버가 가장 탄탄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도로공사는 여전히 우승 후보이다. 두 팀의 경기 수준이 높고 볼만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승자는 GS칼텍스였다. 팀의 핵심 선수인 이소영이 부상으로 빠진 상황임에도 우승 후보에 일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은 스피드 배구 때문이었음은 불문가지다.

이미 세계 배구 강국들은 스피드 배구, 장신화, 강서브라는 3개의 무기를 장착한 상태에서 주요 국제대회를 휩쓸고 있다.

그러나 한국 여자배구는 장신화와 강서브 부분은 세계 강호들과 엇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왔지만, 스피드 배구와는 거리가 멀었던 게 사실이다. 때문에 김연경이라는 세계 최고 선수의 존재감으로 세계랭킹 10위권을 유지하고 있지만, 주요 국제대회에서 메달권에 들어가는 데는 버거운 게 현실이다.

그런 와중에 GS칼텍스가 팀의 색깔을 스피드 배구로 설정하고, 남미·유럽형 스피드 배구 시스템에 근접한 플레이를 보여주었다는 점은 평가할 만한 대목이다.

'리시브 타령' 극복해야 스피드 배구 가능

스피드 배구는 단순히 세터의 토스나 공격수의 플레이가 빠르다고 해서 스피드 배구라고 말하지 않는다. 철저히 시스템 배구이자 토털 배구를 의미한다.

리시브가 잘 안된 경우에도 세터와 공격수 전원이 평소 연습하고 약속한 시스템대로 발 빠르게 움직여서 상대의 블로킹이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게 하거나, 따라오더라도 빠르고 강한 공격을 통해 성공률을 높이는 전술이다.

'리시브가 잘 안 돼서 경기에 졌다'는 마인드로는 스피드 배구를 할 수 없다. 세계적으로 서브가 갈수록 강력하고, 블로킹 수준도 높아졌다. 더 이상 리시브만 잘해서 많은 경기에서 이길 수는 없다. 그래서 스피드 배구가 필요하다.

​스피드 배구에서는 라이트든, 레프트든, 센터든 모든 포지션의 공격수가 동시에 공격 준비를 해야 하고, 자기에게 오는 공을 처리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특히 레프트 공격수 2명은 똑같이 서브 리시브, 디그 등 수비 능력은 물론, 언제든지 강력한 파이프 공격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파이프 공격은 스피드 배구의 핵심 옵션이다.

2015년 최태웅, 그리고 2017년 차상현

남자배구에서는 현대캐피탈의 최태웅 감독이 지난 2015~2016시즌부터 스피드 배구를 팀의 색깔로 내세우면서 최고의 히트 상품이 된 바 있다. 그리고 불과 2년 만인 2016~2017시즌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했다.

2017~2018시즌에는 여자배구에서도 GS칼텍스의 차상현 감독이 스피드 배구를 선언했다. 사실 국내 여자배구는 스피드 배구를 구현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공격 파워, 빠르기, 테크닉 등에서 세계 강팀들의 선수와 격차가 있고, 포지션별로도 기량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또한, 국내파 공격수들이 후위에서 파이프 공격을 거의 하지 않는다. 주전 레프트인데도 후위에 가면 수비력이 좋은 선수와 교체되기 일쑤였다. 이런 구조에서는 남미·유렵형 스피드 배구를 할 수가 없다.

GS칼텍스는 그런 편견들에 도전을 선택했다. 차상현 GS칼텍스 감독은 이날 경기를 마친 직후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스피드 배구를 위해 비시즌 동안 선수들이 정말 많은 훈련과 땀을 흘렸다"며 "훈련 과정에서 단련되지 않으면 그런 시스템이 실전 경기에서 나올 수 없다"고 말했다.

불가능 영역에 용감한 도전... '히트 상품' 예고

물론, 스피드 배구가 언제나 좋은 경기력을 보이는 건 아니다. 전원 공격과 빠른 플레이를 구사하기 때문에 시스템과 체력에 문제가 생기면 속절없이 무너질 수 있다. 간혹 '스피드하게 패하면서'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만큼 완성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스피드 배구가 정상 궤도에 오르면, 공포의 팀이 된다. 특히 플레이오프(PO)나 챔피언결정전 등 큰 경기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리시브가 나쁘거나 위기 상황에서도 빠른 토털 배구로 공격 성공률을 높이는 전술이기 때문이다.

배구팬들에게도 큰 볼거리를 제공한다. 플레이 자체가 신선하고 흥미롭다. 승패를 떠나 '경기가 기다려지는' 팀이 된다.

그럼에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 정신이 없이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 영역'에 가까웠다. 이는 역설적으로 '차상현표 스피드 배구'가 올 시즌 최고의 히트 상품이 될 가능성이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GS칼텍스는 4년 만에 플레이오프 진출을 꿈꾼다. 지난 2013~2014시즌 챔피언결정전 우승 이후 3시즌 동안 계속 하위권에 머물렀다. 첫 테이프를 잘 끊은 GS칼텍스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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