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수정 : 30일 오후 7시 30분]

 임동혁 선수(제천산업고3)

임동혁 선수(제천산업고3) ⓒ 박진철


한국 남자배구 역사에 또 하나의 기록이 탄생했다.

임동혁(19세·제천산업고3)이 그 주인공이다. 지난 27일 끝난 남자배구 U19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전체 선수 중 득점 1위를 기록했다. 아울러 베스트 아포짓 스파이커(최고 라이트 공격수) 상을 수상했다.

한국 남자배구 선수가 아시아권이 아닌, '세계 대회'에서 '최종 득점왕'을 기록한 것은 임동혁이 사상 2번째다. 첫 번째 세계 대회 득점왕은 2005년 U21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문성민(32세·현대캐피탈)이 기록했다. 임동혁 개인으로는 첫 세계 대회 득점왕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 대회'는 성인 국가대표팀이 출전하는 올림픽, 세계선수권, 월드컵, 월드리그(여자 월드그랑프리)와 연령별 대회인 U23, U21, U19 세계선수권 대회를 말한다. 유니버시아드는 성격상 세계 대회에 포함시키기 어려워 제외했다. 

여자배구에서는 세계 최고 선수인 김연경이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득점왕을 기록했다. 한국은 4위를 했지만, 김연경은 대회 MVP까지 수상했다. 올림픽에서 김연경의 득점왕과 MVP 수상은 한국 배구사에 길이 남을 금자탑이 아닐 수 없다.

남자배구 U19 대표팀은 이번 대회 마지막 날 일본에 패해 4위로 마감했다. 그러나 1993년 3위를 기록한 이후 24년 만에 최고 성적이다.

임동혁의 장점은 세계 배구 강팀들에서 볼 수 있는 장신 라이트 공격수라는 점이다. 맨발로 키를 재도 200cm가 넘는다. 신발을 신으면 203cm도 거뜬하다. 현재 남자배구 성인 국가대표팀에는 200cm 넘는 선수가 단 한 명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언제 이런 장신 공격수가 또 나올지 알 수도 없다.

제천산업고 김광태 감독은 29일 기자와 통화에서 "(임)동혁이는 장신임에도 민첩성과 탄력이 좋고, 뼈가 상당히 튼튼해서 중심이 잘 잡혀 있다"며 "수비 훈련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밝혔다.

자주 지적돼 왔던 공격 폼에 대해서도 "본인 스스로 스윙 폼이 크고 문제가 있다는 걸 잘 안다"며 "의식적으로 고치려고 많은 노력을 하다 보니 개선 속도가 빨라졌다"고 설명했다.

U19 결승 이란-러시아, 충격적인 '장신 군단'

임동혁의 성장에도, 한국 남자배구가 갈 길이 멀다는 점은 이번에도 여실히 증명됐다.

남자배구 세계 강팀들의 특징을 요약하면 '스피드 배구, 장신화, 강서브'다. 그러나 한국은 이 3가지 모두 크게 뒤져 있다. 세계 강팀들은 3개의 무기를 다 갖추고 경기에 나서는데, 한국은 아무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이도 저도 아닌' 배구를 하고 있다. 특히, 장신화 부분은 세계 수준과 너무 벌어져 있다.

결승에 오른 이란과 러시아의 U19 국가대표팀을 살펴보면, 신장 면에서 과연 19세 이하 선수들이 맞는가 싶을 정도다. 세계 정상급 성인 국가대표팀들과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이란은 주 공격수이자 라이트 포지션인 얄리가 209cm다. 레프트인 에스판디아도 205cm다. 또 다른 레프트 샤리피는 193cm다. 센터진도 어마어마하다. 젤베흐가 208cm, 토우크테흐가 203cm다. 세터인 파라하트마저 199cm였다. 리베로를 제외하고 주전 선수 6명의 평균신장이 202.8cm나 된다.

현재 이란의 성인 국가대표팀은 황금세대의 노쇠화 등으로 최고 정점에서 꺾이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2020년 도쿄 올림픽 세계·국제 예선전의 방식으로 볼 때 이란이 본선 티켓을 따낼 가능성은 생각보다 높지 않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란은 U19 대표팀부터 장신 유망주들을 대거 발탁해 지속적으로 육성하면서 뒤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다.

러시아도 장신 군단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레프트인 안토노프와 쿠즈네트코프가 각각 207cm, 201cm다. 라이트인 사포즈코프는 210cm다. 센터진도 디카레프가 207cm, 멜니코프가 204cm다. 세터 아바에프는 192cm다. 리베로를 제외하고 주전 6명의 평균신장이 무려 203.5cm다. 단신 레프트인 테튜힌(188cm)이 들어가도 주전 평균신장이 200cm다.

'19세 이하보다 단신'... 한국 성인 국가대표팀 '현주소'

 2017 U19 세계선수권 대회 경기 장면... 1번 선수가 임동혁

2017 U19 세계선수권 대회 경기 장면... 1번 선수가 임동혁 ⓒ 국제배구연맹


반면, 한국은 U19 대표팀 주전 6명의 평균신장이 195cm다. 이란·러시아에 비해 8~9cm나 작다. 엔트리 전체 12명 중에 200cm 넘는 선수도 임동혁 한 명뿐이다.

그렇다면 한국 성인 국가대표팀의 사정은 어떤가. 리베로를 제외하고 주전 6명의 평균신장이 U19 대표팀과 똑같이 195cm대에 불과하다. 심지어 월드리그 국가대표팀의 경우 엔트리 전체 14명 중에 200cm 넘는 선수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성인 국가대표팀의 신장이 19세 이하 대표팀보다 내용 면에서 더 못한 것이다. 세계 강팀은 물론 아시아권에서도 최단신 수준이다.

물론 장신화만 한다고 국제경쟁력이 바로 향상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유럽·남미의 배구 강호들이 장신이면서 스피드·파워·테크닉도 우리보다 뛰어난 점을 감안하면, 허망한 푸념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한국 남자배구는 스피드 배구의 완성도도 세계 강팀이나 아시아 강호들과 큰 차이가 있다. 서브도 차별되는 특징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배구계는 물론 배구팬들조차 '남자배구가 이대로 가면, 아시아 중위권 밑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임동혁 발굴·육성... 배구협회 '유일하게 잘한 일'

​그런 가운데 장신 라이트 공격수인 임동혁의 성장세는 '가뭄에 단비'가 아닐 수 없다. 비록 U19 대회이지만, 세계 무대에서 잠재력과 가능성은 검증이 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임동혁의 성장에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장신 유망주를 발굴·육성한 모델이란 점이다.

임동혁은 지난 2015년 10월 '만 16세'의 나이로 한국 남자배구 사상 '최연소 성인 국가대표'에 발탁돼 큰 화제를 모았다.

당시 배구협회 지도부(회장 박승수) 인사들의 강력한 소신과 추진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지도부는 "한국 배구가 세계 무대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길은 스피드 배구와 장신화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이를 주도했다.

그에 따라 2020년 도쿄 올림픽을 겨냥해 임동혁을 비롯한 14명의 고교·대학 장신 유망주들을 성인 국가대표로 대거 발탁했다. 이어 2016년 1월 진천선수촌에 소집해 한 달 동안 '스피드 배구 특별훈련'를 실시했다. 배구협회 사상 초유의 시도들이었다. 일각의 우려와 비아냥도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추진했다.

배구협회는 이런 시스템을 통해 장신 유망주들을 발굴·육성함으로써 국가대표팀 운영도 이원화하기로 했다. 세계랭킹이 부여되거나 비중이 높은 국제대회는 최정예 멤버가 출전하고, 비중이 낮은 대회에는 고교·대학 선수 위주로 출전시키겠다는 것이었다.

훈련 과정에서 눈에 띄는 선수는 성인 국가대표팀의 최종 엔트리에도 포함시켜 큰 무대 경험을 쌓게 하고, 프로 선수와 상호 경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세대교체로 이어지도록 하겠다는 뜻도 담겨 있었다. 신예들이 국가대표에서 맹활약할 경우, 국제경쟁력 향상은 물론 새로운 스타의 등장으로 프로배구 흥행에도 기여한다는 점도 감안했다.

때문에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집해 스피드 배구 특별훈련과 실전 감각을 익히도록 할 방침이었다.

김세진 감독은 당시 기자와 인터뷰에서 "이런 시도는 아주 좋은 방향"이라며 "(어린 유망주가) 국가대표에 들어와서 뛰어본 것과 계속 평범한 고교·대학 선수로 생활하는 것과는 성장 속도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공감을 표시했다.

사실 임동혁도 처음 진천선수촌에 입촌했을 때 몸 상태에 위험 신호가 발견되기도 했다. 배구협회는 즉시 대학병원에 정밀진단을 의뢰했고, 필요한 처방을 취했다. 더 늦게 발견하고 치료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 많은 장신 선수들이 그러하듯 대학·프로 진출 단계에서 선수 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어린 유망주를 과감하게 성인 국가대표팀에 발탁하면서 국가가 실시하는 우수선수 육성 지원 시스템의 수혜까지 받게 됐다. 배구협회의 추천으로 임동혁은 2016년 1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국민체육진흥공단으로부터 매달 지원금을 받고 있다. 이는 오로지 성인 국가대표팀에 발탁된 선수에게만 지원된다.

임동혁은 그런 시스템 속에서 스피드 배구 특별훈련과 2016년 아시아배구연맹컵(AVC컵), 2017년 U19 대회 출전 등을 거치며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임동혁의 발굴·육성에 배구협회의 과감하고 혁신적인 시도가 큰 발판이 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지난 십여 년 동안 거의 유일하게 잘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호철·강만수 "장신 유망주 육성 시스템, 계속 이어가야"

그러나 임동혁을 발굴·육성해낸 시스템은 시작한 지 1년도 안돼 배구협회 집행부 해임 등 혼란한 사태를 거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김호철 남자배구 국가대표 감독은 29일 기자와 통화에서 "배구협회가 2016년 1월에 했던 것처렴 고교·대학 장신 유망주들을 국가대표로 발탁하고, 틈나는 대로 진천선수촌에 소집해서 체계적으로 관리·육성해야 한다"며 "그런 국가대표 운영 시스템을 일회성으로 할 게 아니라 사업 목표로 잡아서 지속적으로 이어가야 된다"고 강조했다.

강만수 전 남자배구 국가대표 감독도 "빠르지도 않으면서 신장마저 너무 차이 나면 정말 이기기 힘들다"며 "(장신 유망주를) 자꾸 국제대회 경험을 쌓게 해서 시야를 넓혀줘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배구협회 지도부 인사들의 사고방식과 의지 문제다. 최근 많은 배구팬과 일반 네티즌까지 '배구협회가 인물과 조직 등 모든 면에서 근원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며 거센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세계·아시아 강호들과 정반대로 장신 유망주의 성인 국가대표 발탁을 외면하고, 주전 선수들만 혹사시키면서 한국 배구의 현재와 미래를 퇴보시키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프로 진출 임동혁, 'V리그 안 개구리' 안 돼야

고교 3학년인 임동혁은 기자에게 "V리그 신인 드래프트에 나가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김광태 감독도 "선수 본인과 부모님과 얘기를 했는데, 프로 진출로 결심을 굳힌 것 같다"고 말했다.

오는 9월 25일 열리는 2017~2018 V리그 신인 드래프트에는 임동혁뿐만 아니라, 대학 유망주들도 학년을 불문하고 대거 참여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1~2년 후에는 대학배구가 프로배구에 좋은 신인을 공급해주는 기능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만큼 대학배구의 환경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현재 대학배구는 수업 일수 채우는 문제로 평소 체력 단련과 기술 훈련을 거의 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런데다 각종 대회도 많다. 몸은 망가지고 실력이 퇴보할 수밖에 없다.

고교·대학 유망주들이 속속 프로에 진출해도 문제는 남는다. 외국인 선수 위주의 V리그 시스템에서 과연 몇 명이나 국제경쟁력을 갖춘 선수로 성장할 수 있을지 의문부호이기 때문이다.

결국 프로 구단들이 배구 스타일과 팀 운영 방식의 변화, 국내 선수 활용도 제고 등 과감한 혁신을 하는 수밖에 없다.

유망주 발굴·육성에 효과적이라는 프로 구단 연고제와 클럽 시스템, 2군 리그 도입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는 KOVO와 프로 구단들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문제는 절박함과 속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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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배구 V리그 임동혁 김연경 배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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