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꿈의 연대기> 포스터.

<리처드 링클레이터: 꿈의 연대기> 포스터. ⓒ EBS국제다큐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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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 거야. 영화 <보이후드>(2014)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인 메이슨(엘라 콜트레인 역)은 이렇게 말했다. 좋아하는 감독의 신작이었기에 작품의 모든 부분이 만족스러웠지만, 이 마지막 대사 앞에서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장면의 먹먹함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다시 되뇌어봐도 그 대사는 하나의 영화에 12년이라는 시간을 할애한 감독의 작품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낭만적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감독이 이 대사와 같은 마음으로 <보이후드>라는 작품을 대한 것이라면, 보통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을 그 시간도 그에게는 그저 하나의 평범한 순간 중 하나였을 뿐일 테니까. 역시.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 수밖에 없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언제나 그런 태도로 영화라는 매체를 대했고, 그것이야말로 그의 작품을 빛나게 하는 요소였던 것 같다. 지금 이야기할 다큐멘터리 <리처드 링클레이터 : 꿈의 연대기>는 바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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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공동 연출한 루이스 블랙과 캐런 번스틴은 인물에 대한 다큐멘터리들이 가진 전형적인 형식을 그대로 따르며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을 소개한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함께 작업했던 사람들의 인터뷰까지. (그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배우인 에단 호크는 물론, <스쿨 오브 락>의 잭 블랙도 함께한다) 감독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그 뒷이야기를 전하는데도 러닝타임의 일부를 할애하며 90분 내내 흥미로운 소재들을 건넨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감독의 의중에 따라 내용의 시기가 중구난방이라 흐름이 일정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은 다소 진부하다고 여겨지지만, 리처드 링클레이터라는 감독을 상징하는 단어가 '시간'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작품이 그 진부함을 선택하지 않은 사실이 오히려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특정 작품이 필름의 전반부와 후반부에 나뉘어 등장한다든지, 유사한 내용이 서로 다른 지점에서 반복되는 등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도,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은 관객에게는 충분히 짚고 넘어갈 부분들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자신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거시적인 시각에서 산업이 리처드 링클레이터라는 감독을 어떻게 소비하고자 했는지, 그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던 감독의 힘은 과연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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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의 내용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진지하게 글을 썼다고 한다. 글이라는 것이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래 야구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심장에 문제가 생겨 야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운동부 학생들에게 부과되는 오전 수업이 끝난 후의 시간, 그러니까 낮 12시부터 밤 11시까지 도서실에만 앉아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극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갑자기 영화가 좋아진 것도 일찍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것을 스스로를 표현할 매체를 찾은 기분이었다고 말한다.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되며, 평생을 영화로 표현해내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1985년에 오스틴 필름 소사이어티라는 단체를 직접 만든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영화라는 것이 혼자의 힘으로는 나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6년 뒤인 1991년,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작품 <슬래커>를 이곳에서 만들게 된다. 영화 제작 초창기에 그가 몰두해 있었던 생각은 단 두 가지. 어떻게 하면 자신의 한계를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와 이번 작업을 통해 현재의 아이디어를 현실 속에 구현해내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였다고 한다.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 보겠다는 야망보다는 현재의 모습에서 나아질 수 있는 수단을 취하는 것이 목표였던 셈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별다른 요령 없이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제대로 하길 바라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또, 그렇게 노력해왔다.

 그는 현장에서 기술적인 것이 아닌 진짜 감정을 담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현장에서 기술적인 것이 아닌 진짜 감정을 담기 위해 노력한다. ⓒ EBS국제다큐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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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런 그의 작업 스타일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 외부적인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실제 삶의 느낌에 충실한 이야기만을 표현하기를 원했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계속해서 제작사와 마찰을 빚게 된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 준 작품인 <비포 선라이즈>(1995)를 촬영할 당시에는 제작비 1,000달러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만 했고, <뉴튼 보이즈>(1998)를 연출한 뒤에는 자신이 바라던 영화와 꼭 맞는 작품을 연출했음에도 제작사의 반응이 너무도 나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업 영화와 비주류 영화의 어쩔 수 없는 경계에 대해 느끼게 되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생각을 점점 굳히게 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뉴욕이나 LA로부터 멀리 떨어진 텍사스에서 독립 영화를 찍는 유례없는 일을 이어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첫 작품 <슬래커>부터 시도했던 그동안 소외되어왔던 이들과 호흡하는 내용의 작품들이 예술 영화 시장에서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하면서부터 말이다. 영화 산업이 그의 작업 방식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원래의 방식대로가 아닌 자신의 방식대로 작업을 진행해나간다. 영화 <보이후드>(2014)는 그의 그런 뚝심이 모두 담겨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수익성을 가장 높은 가치로 여기는 투자사에게 하나의 작품을 12년 동안 만들겠다고 했으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이 작품 <리처드 링클레이터 : 꿈의 연대기>에서는 이와 관련된 이야기도 잊지 않고 언급하며 당시의 제작사인 IFC와 감독의 관계에 대해서도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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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에게도 마음속 한구석에는 언제나 의구심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캔버스(상황)를 제대로 다 활용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나의 이런 고집이 이 좋은 기회를 망쳐버리는 건 아닐까? 와 같은 마음이다. 다른 감독들처럼 배우에게 정해진 대사를 정확하게 이야기하도록 요구하거나 정해진 동선에 따라 움직이게 한다면 조금 더 쉬울지도 모르는데, 그는 언제나 감정과 같은 비언어적인 것들에 대해 정확히 알고 제대로 표현하기를 원했다고 그와 함께 작업한 배우들은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은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화면의 기본적인 구성과 같은 디테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파리에서 <비포 선셋>(2004)을 찍으며 그 흔한 에펠탑 전경 하나 넣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핵심이 되는 특정 사건들은 구상해 두었지만 매년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보이후드>의 연출 환경 또한 말이다. 주어지는 상황에 적응하고 언제나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지 않는 것. 그것이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힘이었다. 또 한 가지.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을 자신이 가진 비전(Vision)에 합류하게 만들 줄 알고, 공동의 목표에 함께 도달할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다. 영화를 만들기로 시작한 시점에서 오스틴 영화 협회를 만들어 공동체적인 움직임을 가지고자 했던 것도, 처음에는 본인도 예상하지 못한 <비포 시리즈> 3부작을 18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완성한 것도 모두. <스쿨 오브 락>(2003)을 함께했던 잭 블랙 또한 이 작품의 인터뷰를 통해 처음에는 그를 탐탁찮아 했다고 한다. 물론 함께 작업이 끝난 후에는 잭 블랙의 마음 또한 완전히 뒤바뀌고 마는데, 그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상업 영화를 만들면서도 기존의 상업 영화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추가할 수 있는 감독이다.

 비포 시리즈를 통해 만나게 된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비포 시리즈를 통해 만나게 된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 EBS국제다큐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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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사후에 제작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생존한 인물의 이야기를 담을 경우 작품이 제작된 이후의 이야기는 해당 작품에 담을 수 없으며 그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사후에야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좋아하던 감독의 이야기를 영상을 통해 전해 듣는 건 신선한 경험이었다. 대부분 내용이 알고 있던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에도 90분이라는 시간은 금세 지나 가버렸고, 다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물론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가 작품을 만들어 온 방식 그대로 찬찬히 기다릴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할리우드에 대해 언급하며, 꿈은 억누르고 위험은 억제하려는 듯 보인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할리우드는 예술이 아니라 산업에 가깝게 느껴진다고. 앞으로도 그의 작품들이 기대되는 이유다. 그가 추구하는 작업 방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일이 어떻게 끝날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무모해 보이지만, 이제는 어떻게든 끝낼 수 있다는, 그 끝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믿음과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는 사후에 제작되기를 바란다. 그 다큐멘터리가 정말 보고 싶겠지만, 반대로 오랫동안 보지 못해도 좋을 것 같다. 그래야만 그의 작품을 더욱 많이 만나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BS의 D-Box 사이트에서 9월 1일 오전 1시까지 무료로 시청이 가능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조영준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joyjun7)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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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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