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19세 이하 아시아 청소년 축구 대회(현 AFC U-19 챔피언십)에는 한국 축구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선수가 있었다. 고려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스트라이커 박주영이었다.

진작부터 황선홍과 이동국의 뒤를 잇는 대형 스트라이커로 주목받았던 박주영은 중국과 맞붙은 결승전에서 환상적인 골을 뽑아냈다. 군더더기 없는 드리블로 상대 수비수 4명을 제쳐냈고, 침착한 오른발 슈팅으로 중국의 골망을 갈랐다. 이후 한 골을 더 추가해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데 앞장섰고, 득점왕(6골)과 대회 MVP까지 수상했다.

이듬해 초, 카타르에서 열린 20세 이하 국제 청소년 축구 대회에서도 4경기 9골이라는 폭발적인 득점력을 뽐내며, 박주영은 '축구 천재'로 불리기 시작한다.

4만여 관중을 불러 모을 수 있었던 최고의 스타 

 7일 폴란드와의 평가전에서 박주영의 득점을 축하하는 손흥민(왼쪽)

국가대표팀에서 뛸 때의 박주영 ⓒ KFA


박주영은 대학 생활 1년 만에 프로 무대 진출을 선언, 거대 자본을 앞세운 J리그와 K리그 빅클럽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FC 서울 입단을 선택한다.

박주영은 K리그 데뷔 시즌, 30경기에 나서 18골을 뽑아냈다. 박주영이 선발 출전하는 서울월드컵경기장에는 수만 명의 관중이 몰려들었고, 서울을 홈으로 불러들이는 구단들은 전력 분석보다 박주영의 선발 출전 여부에 큰 관심을 보였다. 당시 박주영은 전국구 스타였고, 흥행을 보장할 수 있는 최고의 선수였다.

대표적인 예가 전기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포항 스틸러스와 맞대결이었다. 박주영은 이동국과 김병지라는 한국 최고의 스타들이 포진한 포항과 경기에서 48,375명의 관중을 불러 모았고, 해트트릭을 작성하며 서울의 4-1 대승을 이끌었다. 축구 천재의 거칠 것 없는 맹활약에 팬들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국가대표팀에도 데뷔했다. "훅 불면 날아갈 것 같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2006 독일 월드컵 최종예선 우즈베키스탄 원정 경기에서 극적인 동점골을 뽑아내며 환상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곧바로 열린 쿠웨이트 원정에서도 득점포를 가동, 한국의 2006 독일 월드컵 본선 진출에 앞장섰다.

당시 언론에서는 박주영을 브라질의 '축구 황제' 호나우도와 비교하기도 했고, 1985년생 '축구 천재' 웨인 루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견주기도 했다. 그러한 보도에 거부감을 드러내거나 비판을 가하는 팬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박주영은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축구 천재였고, 한국의 미래였다.

예상치 못했던 시련이 찾아들었다. K리그 2년 차 시즌을 맞이한 박주영은 이전과 같은 폭발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30경기에 나섰지만, 8골밖에 넣지 못했다. 데뷔 시즌으로 인해 장단점이 완벽하게 파악됐고, 상대 수비수의 집중견제를 이겨내지 못했다. 기대를 모았던 2006 독일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도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스위스전에 깜짝 선발 출전했지만, 실망감만이 남았다.

2007시즌 14경기 5득점, 2008시즌 17경기 2득점, 2008 베이징 올림픽 본선 조별리그 탈락 등 박주영의 이름은 조금씩 잊혀갔다.

애증의 이름 박주영, 정녕 부활은 불가능한 것일까

2008년 여름, 박주영은 반전을 꾀한다. '아직 부족하다'라는 냉정한 평가가 있었지만, 유럽 무대 도전을 선언한 뒤 프랑스 리그앙의 AS 모나코로 이적하는 데 성공한다. 에이스의 상징인 등 번호 10번도 부여받으면서, 박주영은 다시 한 번 축구팬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박주영의 유럽 첫 시즌은 성공적이었다. FC 로리앙과 개막전부터 선발 출전해 1골 1도움을 기록했고, 팀 내 에이스로도 자리매김했다. 모나코에서 축구를 가르치는 '박 교수'란 별명이 생겼을 정도로 박주영의 유럽 생활은 탄탄대로였다.

2년 차였던 2009·2010시즌, 박주영은 정통 스트라이커로 성장을 이룬다. 피지컬에 대한 약점을 메우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에 열중했고, 몸싸움에 자신감을 키우고 압도적인 공중볼 장악력을 갖춘다. 27경기 8골로 득점 수가 아쉬웠지만, 욕심이 과했던 네네와 주변 동료들의 부족한 기량을 고려하면, 훌륭한 성적이었다. 2010·2011시즌에는 33경기에 나서 12골을 기록하며, 유럽 무대 첫 두 자릿수 득점 달성에도 성공한다.

박주영은 2010 남아공 월드컵 16강 진출에도 앞장서면서, 2011년 여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명문' 아스널로 이적한다.

그러나 아스널은 만만한 팀이 아니었다. 박주영은 건강한 로빈 판 페르시의 활약을 지켜보기만 할 뿐, 주전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벤치 명단에 포함되는 것도 힘겨웠다. 2012·2013시즌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소속 셀타 비고로 임대돼 부활을 노렸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잉글랜드 챔피언십 소속 왓포드 임대를 거쳐 사우디아라비아 리그(알 샤밥)로 향했고, 2015년 3월, 친정팀 서울로 돌아왔다.

팬들의 마음은 이전 같지 않았다. 박주영은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 신화에 앞장섰지만, 병역 기피 논란에 휘말리며 팬들에게 큰 상처를 줬다. 기량도 신드롬을 일으켰던 K리그 데뷔 시즌, 유럽 무대에서의 활약을 발판으로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에 앞장섰던 모습과는 달랐다.

 지난 18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7 KEB하나은행 K리그 클래식 수원 삼성과 FC서울의 경기. 서울 박주영(오른쪽)과 수원 고승범이 몸싸움을 하고 있다.

지난 6월 18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7 KEB하나은행 K리그 클래식 수원 삼성과 FC서울의 경기. 서울 박주영(오른쪽)과 수원 고승범이 몸싸움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박주영은 2015시즌, 23경기 7골을 기록하며 평범한 모습을 보였다. 2016시즌에는 데얀, 아드리아노와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황선홍 감독의 부임과 함께 주전으로 복귀하며 두 자릿수 득점(10골)에 성공한다. 특히, 리그 우승의 향방을 결정지었던 전북 현대와 마지막 경기에서 극적인 결승골을 뽑아내며 이름값을 증명했다.

2017시즌, 박주영은 데얀과 번갈아가며 경기에 나서고 있다. 22경기에 출전했고, 7골을 넣었다. 지난달 2일 전북과 경기에서는 후반 추가 시간에 극적인 역전골을 넣으며, 축구팬들을 열광시키기도 했다. 최근에는 훈련 중 무릎에 물이 차면서, 2경기 연속 결장 중이다.

과거와 현재의 박주영은 많이 다르다. 2000년대 중반, 우리를 매료시켰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최전방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로베르토 레반도프스키(폴란드와 친선경기)와 득점력을 겨누던 박주영의 모습은 보기 어렵다. 골 넣는 스트라이커 임무에 집중하기보다는 경험 많은 지휘자의 역할에 열중한다.

박주영은 프로에 발을 내디딜 당시 브라질 유학을 지원했던 포항과의 관계, 큰 충격을 안겨줬던 군 문제, 스페인에서의 아쉬운 마무리 등 축구 외적인 부분에서도 아쉬운 모습을 남겼다.

그런데도 미련이 남는다. 축구팬들 앞에 처음 등장했을 때의 강렬함, 박지성, 기성용, 이청용과 '양박쌍용'의 시대를 선도하던 기억이 박주영을 찾게 만든다. 잊을만하면, 큰 경기에서 득점을 터뜨리는 스타성도 여전하다.

몸 상태만 조금 더 끌어올릴 수 있다면, 2002 한-일 월드컵 황선홍의 역할을 박주영이 해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한국 축구와 애증의 관계인 박주영, 정녕 부활은 불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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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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