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난 아직도 2013년 11월 7일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래도 혹시 몰라 기사는 정확해야하니 네이버에 내 기억이 맞는지 한번 쳐봤다. '입동' 네이버 달력에 그렇게 뜬다. 어? 이게 아닌데. 블로그 검색을 하니, 역시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 시험일, 모두 원하는 결과 얻길 바랄게요.' 물론 3년 전일이다. 햇수로는 4년이나 지났네. 벌써.

수능 시험을 치르고 온 저녁 7시. 수능 시험을 치른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겪었던 조마조마한 순간. 나는 채점을 시작했다. 결과는 최악. 아 이제 대학을 어디로 가지. 큰일이네. 그 순간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

"됐어. 수능 못 볼 수도 있지. 그만 청승 떨고 나와서 밥이나 먹어."

와, 이렇게 쿨한 엄마가 있을 수 있나. 나 그래도 엄마 하나는 잘 둔 거 같다. 엄마 사랑해.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그 후 발표된, 6개의 대학 수시전형에서 난 한 군데도 붙지 못했고, 그때도 역시 난 엄마의 관대하고도 넓은 포용력을 기대하고 있었다.

수시 발표 후, 처음으로 엄마, 동생, 나 이렇게 세 명이 다 모인 날. 자장면을 시키려고 보니 번호가 없었다. 번호를 물어보며 재촉하는 엄마.

현실의 나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 THE 픽쳐스


"세현아, 짜장면 집 번호 좀 불러봐라."
"모르겠는데요? 없어요."
"어? 맨날 시켜먹는데 있잖아. 그것도 모르느냐? 어휴 그것도 모르니까 수능을 그렇게 망치지."
"그러게. 형은 맨날 다 아는 척하더니, 정작 중요할 때는 아는 게 없네."
시간이 흐르고, 어린 꼬마 같았던 우리 집 막내가 얼마 전 수능을 쳤다. 역시 6개의 대학에서 동생이 불합격했다는 소식을 수화기 너머로 들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3년 전, 대학 여섯 군데에서 불합격 소식을 듣고 눈물을 훔쳤던 내 모습. 미안했다. 혹시 나 때문에 이상한 가족력이 생겨서 그런 건가. 하지만 내 마음속 미안한 감정을 싹 사라지게 한 엄마의 한 마디.
"너도 그러더니 참. 동생은 형 따라간다더니. 너 때문인가 보다."

벌써 3년도 더 된 일인데. 마음이 요동쳤다. 너무 화가 나고 속상했다. 엄마에게 엄마는 엄마 아들 대학이 그렇게 아직도 부끄럽냐고. 대학 이름 그거 안 중요하다고. 나랑 동생이 사는 시대는 옛날처럼 획일화된 대학 서열에 차별받고 혜택받는 사회 아니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엄마랑 더는 수능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고.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동생이 전화를 가로채 미안하다고 했다. 본인이 대신 사과한다고. 그리고 수능 시험 볼 때 들었던 생각인데 형한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시험장을 가보니까, 재수생들이 있더라고. 처음에는 무섭더라. 사복 입고, 담배 피우고. 근데 무서워서 피하려는 찰나. 우리 형도 재수생이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뒷자리에 앉은 재수생한테 시험 잘 치라고 이야기해줬어. 모르겠어. 형도 아니었는데, 꼭 안아주고 위로하고 싶더라고. 형 그때 미안했어. 그리고 늦었지만, 진짜 고생 많았어. 그리고 엄마는 글쎄, 형이 섭섭하면 섭섭하다고. 상처받았다고 이야기를 안 해줘서 잘 모르셔서 그러신 것 같아. 나야 수능을 쳐보면서 형 심정을 알았지만, 엄마가 그렇다고 지금 와서 다시 수능 준비를 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영화 속 그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 THE 픽쳐스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한 남자가 상처를 극복하는 이야기다.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는 가족으로 생긴 상처를 극복하는 그런 이야기. 초반부는 그래서 역시 지루하다.

갑작스럽게 울혈성 심부전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죽게 된 형의 아들 '패트릭'의 후견인으로 지정되게 된 '리'는 편집증 환자처럼 후견인 지정에 반대한다.

"제가 살던 집을 옮겨야 한다고요? 저 맨체스터에서 살 수 없어요. 제집은 보스턴입니다."
"형님이 이사비용, 양육비를 모두 남겨 두셨습니다. 몸만 오시면 되니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왜 하필 저죠? 전 그냥 패트릭 어렸을 때 낚시만 같이한 게 다인데요. 저 못합니다. 싫어요."

아니, 조카가 혼자 살게 생겼는데. 그리고 형이 유언장으로 부탁했는데. 진짜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그렇게 주인공에 불만 가득 품은 채로 영화를 보는데, 친구들과 술에 취해 밤새 고성방가를 지르는 리. 아 나는 결혼하면 저러지 말아야지. 역시나 부인이 1층으로 내려와, 아이들 자니까 조용히 좀 하라고 야단친다. 빨리 친구들 내보내라고. 친구들을 내보낸 후, 리는 마트로 향한다. 하긴 원래 술은 애매하게 마시면 안 되거든. 그리고 편의점에서 술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리. 근데 맙소사. 집이 불타고 있다. 순간 리의 머릿속에선 안전망을 치지 않은 벽난로가 떠오른다. 모든 걸 잃은 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경찰서에서, 자신의 세 아이를 불 질러 죽였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힌 리에게 경찰관들은 벽난로 안전망 치는 걸 깜빡한 게 죄는 아니라며, 리를 훈방 조치해버린다. 우리 세 아이는 죽었는데. 난 벌을 받아 마땅한데. 아무런 처벌도 없이.

"이렇게 끝인가요? 그냥 이렇게 가면 된다고요?"
"네, 가시면 됩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경찰서 문밖으로 나가던 리는 결국 지나가는 경찰관 벨트의 권총을 잡고 자살을 시도한다.

"우리 보스턴으로 갈 거야."
"아니 삼촌, 삼촌 잡역부잖아. 보스턴에서 살든 맨체스터에서 살든, 솔직히 무슨 상관이야. 삼촌은 여기서 일해도 되지만, 난 보스턴에 친구도 없고, 밴드도 없어. 어떻게 살라는 거야. 여기에 친구들도 밴드도 다 있다고. 나 절대 삼촌 따라서 보스턴으로 안 가."
"난 여기서 살 마음 없어. 패트릭. 18살 때까지만 내가 네 후견인이니까, 18살 때까지는 보스턴에서 살다가 그다음부턴 알아서 해. 더 이상은 이야기하기 싫다."

하지만 조카에 등쌀에 결국 맨체스터에서 살게 된 리. 맨체스터에 있으면 계속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르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그 리 챈들러?'  '두 딸이랑 어린 아들을 불 질러서 죽인 그 사람?' '실수고 고의가 아니든 어쨌든 살인자잖아. 어우 싫어.' 여러 번 시비에 붙어 그냥 지나가던 사람을 패고 싸우는 리.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버티며 맨체스터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우연히 본 리의 전 아내. 형의 장례식장에서는 아무 말 없이 새로 만난 남자와 새 아이를 데리고 왔었던 그녀. 못 본 척 지나가려는 리를 그녀가 붙잡는다.

"저기, 나 할 말 있어."
"난 할 말 없는데."
"진짜 미안했어."
"아니야. 왜 그래, 갑자기."
"그때 생각만 하면, 너무 미안해서 당신한테.
"아니야. 내 잘못이지."
"진짜 아니 진짜 미안해. 내가. 당신도 힘들 텐데. 너무 내 생각만 한 것 같아. 우리 점심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할까?"
"미안한데, 나 정말 가봐야 돼."
"사랑해."
"저기, 이러면 안 돼."
"우리 점심이라도 먹자 응? 점심이라도."
"랜디, 나 가봐야 해. 미안."
린다와 헤어지고 난 다음, 집에서 죽은 세 아이의 꿈을 꾸는 리.
"아빠, 우리 타 죽는 거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우리 뜨거워."

삐-삐 울려대는 화재 경고기에 잠이 깬 리. 부엌으로 곧장 달려가, 가스레인지를 끄고 탄 연기 가득한 프라이팬을 재빨리 물에 담근다.

"삼촌, 무슨 일이야?"
"아니야, 아무것도."

평소 절친한 조지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리. 리를 말없이 끌어안는 조지와 그의 아내.

"패트릭, 나 보스턴에서 일하기로 했어."
"뭐? 갑자기?"
"음. 조지가 너를 보살펴주기로 했어. 우리 지금 사는 집은 너 학교 마칠 때까지 세 놓고, 넌 조지 집에서 학교 다니면 돼. 같은 학교, 같은 친구, 같은 밴드 활동 다 할 수 있을 거야."
"그냥 이렇게 떠난다고? 갑자기?"
"미안하다. 나 진짜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미안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삼촌인데. 조지가 좋은 사람이란 거 알아 근데…. 조지가 삼촌은 아니잖아. 후견인이 그럼 조지가 되는 거야?"
"그래서 조지가 널 입양하기로 했어."
"어?! 그럼 우린 이렇게 끝이야?"
"아니, 자주 보면 되지. 미안해. 패트릭 나. 아무리 노력해도 여기서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대신 놀러 와. 나 방 두 개짜리로 이사할 거야. 하나는 네 방으로 만들게. 네가 보스턴으로 대학을 올 수도 있으니까."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화려한 미장센과 연출, 메타포로 무장한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조금 밋밋하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 영화가 빛나는 건, 사람의 상처를 다루는 기술이다. 그 상처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우선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서 편집한 방식은, 사람이 상처를 대하는 보통의 방식을 잘 표현한다. 그리고 인간의 상처는 시간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진리를 아주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는 진실과 마주 서서 이야기하고 대화해야 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과 우린 다시 인간관계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화재 사건 이후, 가족과 단절한 리에게 시간은 분명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가끔 인간관계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 속에 산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이런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한다. 진실과 마주하라고. 그 사람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 대화하지 않으면 절대 문제를 풀 수 없다고. 부딪치라고.

다시 현실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 THE 픽쳐스


그래서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영화가 끝나고, 같이 본 친구에게 양해를 구한 후, 집으로 곧장 달려갔다.

"엄마!"
"어 아들 왜?"
"나 할 말 있어."
"뭔데?"
"음…. 동생은 왔어?"
"어 그럼. 아들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저녁 뭐 먹을래?"
"아무거나."
"엄마 지금 나가니까, 시켜먹든지 알아서 해. 여기 짜장면 집 번호 적혀 있다. 여기 맛있더라."
"어? 알았어."
"좀 이따가 보자."

실패. 역시 영화와 현실은 괴리감이 있다. 현실에선 영화처럼 치밀하게 각본을 짜주는 사람도, 틀리면 틀렸다고 NG를 외치는 연출가도 없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이번에는 각본가처럼 미리 대사를 짜 놓으려고 한다. 중요한 장면이니까. 엄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고 고맙다고. 근데 참 그때 섭섭했다고. 그래도 아들인 내가 먼저 다가가서 말할 걸 그랬다고. 그리고 아들이 이제는 그때보다 훨씬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 조금만 참으라고. 곧 엄마한테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겠다고.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영화와 현실은 달랐다. 그래도 난 이 영화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 THE 픽쳐스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각본상 맷데이먼 제작 케이시 애플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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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는 세무학과 경제학을 공부했습니다. 신입생 첫 수업 과제로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읽고 감명 받은 바람에, 회계사, 세무사, 공무원이 되어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다른 동기생들과 다르게 프랑스로 떠나, 바게뜨와 크로와상만 주구장창 먹고 있습니다. 그래도 위안인 점은 프랑스 빵이 정말 맛있다는 점과 토마 피케티를 매일 본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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