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재심>의 한 장면.

영화 <재심>의 한 장면. ⓒ 오퍼스픽쳐스


현실도 어려웠고, 영화화도 어려웠다.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은 경찰과 검찰, 법원까지 가세한 일종의 범인 조작의 종합판이다. 누명을 쓴 피해자는 10년 가까이 옥살이를 했고, 한 변호사의 도움으로 최근에서야 무죄를 인정받았다.

이를 영화화 한 <재심>이 2일 서울 왕십리 CGV에서 언론에 선 공개됐다. 백혈병에 걸린 삼성반도체 노동자 이야기를 다룬 <또 하나의 약속>을 연출한 김태윤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그는 "전작의 투자와 캐스팅이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실화 소재 영화를 하지 않으려 했는데 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사건이 품고 있는 명확한 메시지와 정우, 강하늘, 김해숙 등이 함께 뭉친 결과였다.

진심의 결과

기대보단 우려가 컸다. 그간 실화를 소재로 한, 특히 사회 부조리를 전면에 드러낸 작품들의 경우 메시지와 별개로 작품성에서 아쉬웠던 사례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소극적 투자로 인한 예산 제한, 상대적으로 열악한 제반 조건 등의 이유였지만 이유 불문 감독과 배우는 작품으로 관객에게 온전히 평가받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선의로 뭉친 이들이 상처받는 일도 영화계에서 있어왔다.

'재심'의 피해자 정우와 변호사 강하늘 2일 오후 서울 왕십리CGV에서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10년가까이 감옥살이를 한 피해자의 재심을 다룬 영화 <재심> 시사회가 열렸다. 정우(이준영 변호사)와 강하늘(피해자 소년 현우)이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 '재심'의 피해자 정우와 변호사 강하늘 2일 오후 서울 왕십리CGV에서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10년가까이 감옥살이를 한 피해자의 재심을 다룬 영화 <재심> 시사회가 열렸다. 정우(이준영 변호사)와 강하늘(피해자 소년 현우)이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 권우성


<재심>에서 이준영 변호사 역을 맡은 정우, 피해자 소년 현우 역의 강하늘도 진심을 보태 합류한 경우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해당 사건을 접하고 애초에 열린 마음으로 참여했다"던 강하늘은 시사 직후 "시나리오에 모든 걸 맡겼고, 전라도 사투리는 전주에 사는 친구들에게 하나하나 대사를 보내 교정받은 결과"라고 말할 만큼 작품에 열의를 보였다. 정우는 "내가 그런 (억울한) 일을 겪지도 않았는데 시나리오를 읽으며 감정적으로 공감했다"며 "영화를 보면서 많이 슬펐다"고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배우들의 진심과 감독 이하 스태프의 노고를 훼손시키지 않을 수작이었다. 실제 사건과 극화 부분의 균형감이 좋다. 감독 스스로도 "분명 실화를 기반으로 했지만 어떤 부분이 진짜고 어떤 부분이 가상인지 명확히 나눠 말하긴 어렵다"고 말할 정도로 세밀한 가공이 눈에 띈다. 억울한 소년을 만나기 직전까지 이준영 변호사의 세속적 모습을 표현할 요소들, 이를테면 동료 변호사 모창환(이동휘 분)과 불법구금, 강압수사를 강요한 약촌오거리 경찰(한재영 분) 등을 단순히 기능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이야기 곳곳에서 힘을 잃지 않게 적절히 입체감을 주었다. 모창환은 상상의 산물이고, 형사는 실제 인물 기반이었는데 두 캐릭터 모두 튀지 않으면서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화이팅 외치는 <재심> 감독과 배우들 2일 오후 서울 왕십리CGV에서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에서 누명을 쓰고 10년가까이 감옥살이를 한 피해자의 재심을 다룬 영화 <재심> 시사회가 열렸다. 왼쪽부터 김태윤 감독, 강하늘(피해자 소년 현우),  김해숙(현우 엄마), 정우(이준영 변호사), 이동휘(이준영의 동료 변호사 모창환), 한재영(불법 강압수사 경찰).

▲ 화이팅 외치는 <재심> 감독과 배우들 2일 오후 서울 왕십리CGV에서 열린 영화 <재심> 시사회에서 김태윤 감독과 정우, 강하늘, 김혜숙 등 배우들이 시사회를 마친 뒤 인사를 하고 있다. ⓒ 권우성


가장 중요한 건 어려운 집안환경으로 출세를 바라며 산 이준영 변호사가 절대 미워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 김태윤 감독 역시 이를 언급하며 "영화의 실제 모델인 박준영 변호사가 변호사 같지 않은 모습이 특징인데 때론 비호감으로 보일 수 있는 지점을 배우의 연기로 승화시켜야 했다"고 짚었다.

정우가 이를 적절히 소화해냈다. 영화 초반 후배 변호사들에게 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준영은 현우를 만나며 마음이 동요된다. 이것이 1차원적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영화는 현우를 믿다가도 의심하고, 의심하다가도 기대하는 이준영 변호사의 모습을 신중하게 묘사했다. 섣불리 관객들의 신뢰를 갈구하지 않으며 이야기 구조를 침착하게 만든 노력이 보인다.

적절한 방향성 

소재만 놓고 보면 더 공분을 일으키고 감정적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재심>은 다루고 있는 사건에 대해 관객에게 충분히 제시한다. 관객 입장에선 각 캐릭터가 처한 상황을 보고 느끼다가 극장 문을 나서며 스스로 생각해 볼 거리를 가질 수 있다. 감상에 대한 충분한 여백이 있다는 뜻이다. 당뇨로 눈이 먼 현우 엄마(김해숙 분)와 현우가 짝사랑했던 다방  여종업원(김연서 분) 등의 캐릭터는 신파를 위해 쓰이긴 했지만, 슬픔의 감정을 강요하는 데까지 소모되진 않는다.

그만큼 재심은 이야기의 방향성과 캐릭터의 균형감이 좋다. 최근 등장한 사회고발성 영화와 비교해보아도, 심지어 장르물임을 전면에 세워 오락성을 강조한 영화와 비교해보아도 밀리지 않을 미덕을 갖췄다. <또 하나의 약속>에서 다소 감정의 과잉이 보였다면 김태윤 감독은 나름 절치부심으로 이번 작품을 준비한 걸로 보인다.

전하려는 메시지는 어떨까. 김태윤 감독은 우선 "알려지지 않은 사건을 드러낸 게 아니기에 <재심>을 사회고발 영화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당 범주화에 대해 선을 그었다. 김 감독은 "극영화가 사회고발로 기능하는 것에는 회의적"이라며 "그건 언론이 할 역할"이라고 시사회 자리에서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영화 <재심>의 한 장면.

영화 <재심>의 한 장면. ⓒ 오퍼스픽쳐스


영화도 딱 거기까지다. 물론 "많이 슬펐고, 분노했다"는 출연 배우들의 말도 있었지만 <재심>은 대놓고 나쁜 놈을 지목해 처단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영화 말미 이준영 변호사가 던진 한 마디의 대사로 메시지를 갈음한다.

"본 법정에 선 이유는 (잘못을 저지른) 검찰과 경찰, 법조인에게 사과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입니다."

<재심>은 마땅히 국민을 위해 작용해야 할 공권력에 사과를 권하는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혹 실제 사건과 박준영 변호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한 분들은 저서 <지연된 정의>를 참고하기 바란다.

한 줄 평 : 실화와 영화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고, 불빛을 밝혔다.  
평점: ★★★★(4/5)

영화 <재심> 관련 정보
감독 : 김태윤
출연 : 정우, 강하늘, 김해숙, 이동휘, 한재영, 이경영
제작 : 이디오플랜
제공 : 오퍼스 픽쳐스
배급 : 오퍼스 픽쳐스, CGV아트하우스
크랭크인 : 2016년 7월 17일
크랭크업 : 2016년 10월 3일
관람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 119분
개봉 : 2017년 2월 16일


재심 정우 강하늘 박준영 법원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