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무더운 여름밤, 지애(여주인공)는 복도를 서성이다 옆집에서 흘러나오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는다. 다음날 옆집 여자는 고양이 울음소리 때문에 죄송하다며 찾아온다. 어느 날 우연히 집 밖에 나와 있는 옆집 고양이를 발견하는 지애. 고양이를 자신의 집에 넣어달라는 옆집 여자의 부탁으로 지애는 그 집의 비밀번호를 알게 된 후 아찔하고 대범하게 옆집의 또 다른 주인으로 생활한다'

서은선(31) 감독이 지난해 만든 단편영화 '열대야'의 도입부 이야기다. 평범한 여주인공이 타인의 생활공간에서 천연덕스럽게 행동하는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한다.

이 영화의 각본과 연출, 편집을 맡은 서은선 감독을 지난 6월 27일 남구 주안에 있는 그녀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 영화는 오는 15일부터 17일까지 열리는 12회 인천여성영화제 '인천 여성감독 열전'에서 만날 수 있다.

금기는 욕망에서부터 시작된다
   
 서은선 <열대야> 감독은, 여성 감독 중에서도 돋보이는 인물이다.

서은선 <열대야> 감독은, 여성 감독 중에서도 돋보이는 인물이다. ⓒ 김영숙


"2년 전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으로 만들었어요. 수업시간에 주어진 주제로 시놉시스를 제출하는 강의였는데, 주제어가 '금기'였어요. 그때 한 줄짜리 문장을 만들었는데 그게 모티브가 됐죠. 그 한 줄이 '금기는 욕망에서부터 시작된다'였어요. 기자님이 자리를 비우면 뭐라고 썼는지 흘낏 수첩을 보고 싶은 호기심 같은 거요. 그런 인간의 심리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이 영화는 지난해 파리 한국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최우수 시나리오상을 수상 했다. 지난해 열린 파리 한국영화제 폐막작은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였는데, 표를 구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로 프랑스인들의 한국영화 사랑은 남달랐다.

"프랑스 친구들과 워크숍을 한 적이 있어 그 자리에서 내 영화를 상영했어요. 외국인들과 정서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좋아하더라고요. 문화적 차이보다는 인간의 본능을 다루고 있어서 그게 통했던 거 같아요. 파리 한국영화제에서도 프랑스 심사위원들이 재밌게 봐준 거 같고요."

<열대야>는 지난해 10월 제주영화제에서도 우수상을 수상했다. 서 감독은 인천여성영화제를 10년 전부터 알고 있었고 관객으로도 영화제에 참여했지만 번번이 출품을 못하다 이번에 <열대야>로 참여하게 됐단다.

얼마 전에는 상명대학교에서 주최하는 융·복합공연예술축제인 '파다프(PADAF, Play Act Dance Art-Tech Film Festival)'에서 서 감독의 <열대야>를 무용으로 발표해 작품상을 받기도 했다.

"제 영화를 본 무용가한테 연락이 왔어요영감이 떠올라 무용으로 공연하고 싶다고요. '권태'라는 주제로 대학로에서 퍼포먼스를 해 상까지 받았는데, 저한텐 영광이죠. 영화와 무용의 만남이 참 재밌었어요. 다른 장르의 예술가와 작업할 수 있는 기회도 좋았고요"

조연 아닌 주연의 삶을 사는 여성이야기를

 단편영화 <열대야> 스틸컷. 잠을 못 이루는 그녀의 사연은 무엇일까.

단편영화 <열대야> 스틸컷. 잠을 못 이루는 그녀의 사연은 무엇일까. ⓒ 서은선


   
서은선 감독은 인천 토박이다. 인명여자고등학교 사진부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사진'이란 이미지에 '드라마'라는 스토리가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발전해 명지대 영화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단편영화 몇 편을 찍다 영화를 더 배워보고 싶어 2014년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열대야가 열 번째 작품이라는 서 감독은 자신의 영화의 화두는 '여성'이란다.

"제가 잘 알고 있고 관심이 많으니까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가 별로 없어요. 여성의 이야기라면 단조롭거나 소소하고 너무 내면에 치중한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그런 인식을 깨고 싶었어요. <디어 마이 프렌즈>를 재밌게 봤고요. 그런 이야기를 보면 흥미를 느끼고 영감을 얻습니다."

'여성'이라는 화두가 포괄적이라 좀 더 구체적인 생각을 물었더니, 서 감독은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한국영화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는 한정됐어요.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서만 있는 엄마·여자친구·부인·애인 등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온전한 한 사람으로서의 인생을 그려도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들이 삶의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이번 인천여성영화제의 제목은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았다'이다. 지난 5월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20대 여성이 일면식도 없는 30대 남성에게 죽임을 당했다. 피의자는 경찰 조사에서 "여성에게 무시당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그 후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오를 정도로 대중적으로 회자됐고, 강남역 10번 출구는 한동안 추모의 공간으로 많은 이의 발걸음과 애도가 이어졌다. 포스트잇에 짤막한 글귀를 남겨 벽면을 도배하기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은 여성입니다'였고,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강남역 사건 이후 많은 남성과 다퉜어요. 여성들이 겪는 불편함을 얘기하면, 남성 전부를 잠재적 범죄자로 볼 게 아니라 사이코패스 한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고 얘기를 하죠. 공감해주길 원했는데, 겪어보지 않은 일이라 들으려 하지 않아요. 그런데 차분히 얘기를 계속 이어나가면 나중엔 여성들이 겪는 '잠재적 피해자'의 공포를 인정하기도 하더라고요."

매력적인 도시 인천에서 계속 영화 찍을 것
   
 단편영화 <열대야> 스틸컷. 서은선 감독은 여러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얻는다고 말했다.

단편영화 <열대야> 스틸컷. 서은선 감독은 여러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얻는다고 말했다. ⓒ 서은선


스페인 감독인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작품을 좋아하고 우리나라 배우 중에는 윤여정·나문희씨를 좋아한다는 서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데만 힘을 쏟기에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이제는 시간을 잘 써야겠다는 고민을 한단다.

"영화를 만들다 힘들어서 포기하는 사람이 많아요. 저도 촬영하거나 편집하는 아르바이트를 계속합니다. 하지만 작품 만드는 데 집중하고 싶어서 아르바이트를 조율해 시간을 잘 써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인천영상위원회는 올해로 4년째 다양성 영화 공공상영관 '별별씨네마' 사업을 하고 있다. 별별씨네마는 독립·예술영화를 시민들이 친숙하게 감상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는데, 올해는 율목도서관·연수도서관·부평문화사랑방에서 진행하고 있다.

서 감독은 부평문화사랑방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한 달에 두 번 영화 상영이 끝나면 서 감독이 영화를 해설하고 관객과 대화를 나눈다. 영화를 분석하는 것도 좋지만, 관객들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소통하고 배우는 시간이란다.

"시대가 변하고 있어요. 극장에서만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다양한 경로로 영화를 볼 수 있는 플랫폼이 많이 생기고 있어요. 모바일 무비(파일럿)도 그중 하나고요. 기회가 된다면 파일럿에서도 연출해보고 싶고요. 물론 장편영화를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서 감독은 기분이 안 좋은 어느 날,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빨간 풍선'이란 영화를 보고 나서 행복해진 경험을 한 후 사람의 감정이 잠시나마 변할 수 있다는 걸 느끼고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그런 영화를 인천에서 만들고 싶단다.

"<열대야>는 일산에서 찍었지만, 제 영화의 대부분은 인천에서 찍었어요. 내가 잘 아는 공간이니까 스토리를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인천의 어떤 공간들이 떠올라요. '그곳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싶다'고 느끼죠. 인천 구도심은 매력적이고, 섬 등 갈 곳도 많고요. 특히 동인천은 100년 전 건물도 있고 복잡하지 않아서 좋아요. 밤에는 운치가 있어 산책하기도 좋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서은선 감독 단편영화 열대야 인천여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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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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