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설행_눈길을 걷다> 한 장면

영화 <설행_눈길을 걷다> 한 장면 ⓒ (주)인스터


김희정 감독의 <설행_눈길을 걷다> 속 정우(김태훈 분)는 알코올중독 환자다. 엄마 손에 이끌려 수녀들이 운영하는 요양원을 찾지만, 그 곳에 오래 머물 생각도 알코올 의존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도 없다. 틈만 나면 술을 찾지만 그 술을 마시지 못해 괴로운 정우에게 수녀 마리아(박소담 분)가 성큼 다가온다. 따스한 눈빚으로.

참으로 미스터리하고도 난해한 영화다. 정우가 요양원에 들어가고 나오기까지를 따라가는 순행적 구성을 취하지만, 인과적 질문으로는 도무지 명쾌히 답이 내려지지 않는 의문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정우가 겪은 현실은 수녀들이 운영하는 요양원에 들어갔고, 그 곳에서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수녀 마리아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마저 정우가 직접 경험한 일인지, 아니면 꿈 속에서 본 장면인지 혼란스럽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꿈인지 분명치 않은 경계를 유지해나가는 영화는 모호함을 가득 품은 채 막을 내린다.

하지만 애초 감독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픽션 세계에서 어디까지가 꿈이고 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관객들은 그저 정우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끝을 알 수 없는 여정에 동참할 뿐이다.

정우는 심각한 알코올 의존성에서 비롯된 단기 기억 상실 증세 때문에 방금 전 일도 기억하지 못한다. 어쩌면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기억을 지우기 위해 더욱 술을 찾는지도 모른다. 술을 마시면 잠시라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계속 술을 들이켜고, 이제는 술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무감각의 상태에 도달한다.

취해있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정우는 술에서 깨어나기를 원치 않는다. 알코올 중독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술에서 깨어나는 순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과 맞닥뜨려야한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원장 수녀는 정우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은 기도만 해줄 수 있을 뿐, 결국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라고. 하지만 정우는 자신과 싸우겠다는 의지도 없고, 치료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는 수녀들의 도움도 탐탁지 않다. 수녀들 중에서도 유독 정우를 살갑게 챙기는 마리아의 헌신에도 그는 도무지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설행_눈길을 걷다>는 눈으로 보고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불가사의함 속에서 미궁에 빠진 채 헤어나기 어려운 무력감에 빠진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또 다른 이의 노력을 담는다. 한 개인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원장 수녀의 말마따나 본인의 의지에 달려있다. 나 홀로 외로운 투쟁에 나선 이에게 타인이 그 사람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다. 아무리 주변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를 해준다고 한들, 결국은 스스로가 문제를 깨닫고 맞서야 한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향한 절실한 마음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 또한 환기시킨다. 우리 모두는 점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리를 맞대어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에 앞서, 황량한 겨울 풍경을 뒤로 하고 쓸쓸히 걸어가는 한 남자와 그가 외롭지 않게 항상 그의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을 자임하는 한 여자의 모습이 계속 눈에 아른거린다. 친절하게 모든 장면을 일일이 설명하려고 하는 대신 관객 스스로의 상상에 맡기며 잔상을 남기는 아름다운 영화다.

 영화 <설행_눈길을 걷다> 포스터

영화 <설행_눈길을 걷다> 포스터 ⓒ (주)인스터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진경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neodol.tistory.com), 미디어스에 게재되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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