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결정한 KIA 서재응 28일 은퇴를 결정한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 베테랑 우완 서재응.

▲ 은퇴 결정한 KIA 서재응 28일 은퇴를 결정한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 베테랑 우완 서재응. ⓒ 연합뉴스


기아 타이거즈 베테랑 투수 서재응이 최근 전격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기아 구단은 지난 28일 구단 홈페이지와 보도자료를 통해 서재응의 은퇴 소식을 알렸다.

2016시즌을 앞두고 작년 12월 연봉 7000만 원의 헐값에 재계약하며 현역 연장의 의지를 불태웠던 서재응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은퇴 소식은 팬들로서는 여러모로 충격이다. 서재응은 "후배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싶다"는 것을 은퇴의 이유로 밝혔다. 최근 세대교체를 추진하고 있는 기아에서 서재응의 입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고민 끝에 팀의 미래에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라운드를 떠나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항상 자신보다 팀을 먼저 생각했던 서재응다운 선택이다.

이로써 서재응은 광주일고-인하대를 거쳐 메이저리그(6시즌)와 KBO(8시즌)를 아우르는 14년간의 프로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우수한 실력과 화려한 커리어 그리고 2%의 아쉬움

은퇴 결정한 KIA 서재응 28일 은퇴를 결정한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 베테랑 우완 서재응.

▲ 은퇴 결정한 KIA 서재응 28일 은퇴를 결정한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 베테랑 우완 서재응. ⓒ 연합뉴스


야구팬들이 기억하는 서재응의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그는 깔끔한 외모와 언변, 강한 승부욕과 팀을 위한 희생정신, 칼날같은 제구력으로 박찬호-김병현-최희섭 등과 함께 '한국인 메이저리거 1세대'를 대표하는 정상급 투수였다. 한편으로 실력과 재능에 비하여 지독하게 승운이 따르지 않았던 '박복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그의 커리어는 화려했다. 원조 메이저리거, 국가대표 드림팀(WBC, 아시안게임), 기아의 마지막 우승멤버(2009년), 선수협 회장에 이르기까지 어지간한 스타들도 밟기 힘든 엘리트 코스를 거치며 축복받은 야구인생만을 걸어온 것 같다. 막상 정점에 오르기에는 늘 2%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는 것이 서재응의 야구인생을 정리하는 표현이다.

서재응의 야구인생 전반기에 해당하는 메이저리그 시절, 1998년 뉴욕 메츠에 입단하며 미국무대에 첫 도전장을 던진 서재응은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빅리그에 입성하며 6시즌 동안 118경기에 등판, 28승 40패 평균자책점 4.60을 기록했다.

서재응은 뉴욕 메츠 시절이던 2003년 풀타임 선발 투수로 나서며 9승 12패, 자책점 3.82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주 무기였던 서클체인지업은 당시 메이저리그에서도 정상급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당시 많은 이들이 서재응을 제2의 박찬호로 주목했고, 10승도 그리 멀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이듬해 투수 코치와 갈등이 겹치며 5승을 따내는 데 그쳤고 2005년 8승을 거둔 것을 끝으로 메이저리그의 짧은 전성기는 막을 내린다.

이후 서재응은 LA 다저스와 템파베이를 거쳐 두 번의 방출과 이적을 거치며 빅리그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자 2008년 전격적으로 국내 유턴을 선언하여 고향팀 기아의 유니폼을 입고 제2의 야구인생을 모색하게 된다.

서재응은 기아에서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지난해까지 8년 동안 주로 선발투수로 뛰면서 164경기 등판, 42승 48패 4홀드 2세이브 평균자책점 4.30을 기록했다. 2009년에는 기아의 통산 10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체험했다. 하지만 KBO에서 개인 최고시즌은 2012년으로 서재응은 160이닝 간 9승 8패, 자책점 2.59로 호투하며 특히 44이닝 연속 선발등판 무실점(6경기 선발 등판, 2경기 완봉승)이라는 KBO 신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나 KBO에서나 지독하게 승운이 따르지 않는 징크스는 계속됐다. 공교롭게도 서재응은 9승을 기록한 시즌만 세 차례나(2003년 뉴욕 메츠- 2010, 2012년 기아)된다. 모두 자책점도 3점대 이하를 기록할 만큼 내용도 좋았지만, 타선 지원 부족이나 불펜 난조로 날린 승리가 유독 많았다. 2010년에는 양현종의 다승왕 지원을 위하여 막판 등판 일정을 포기한 경우도 있었고, 2012년에는 44이닝 무실점 신기록에 퀄리티스타트만 16번을 기록하고도 또다시 10승 달성에 실패하며 아홉수에 눈물을 삼켰다.

찬사와 모욕 모두 쿨하게 받아들였던 그

은퇴 결정한 KIA 서재응 28일 은퇴를 결정한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 베테랑 우완 서재응.

▲ 은퇴 결정한 KIA 서재응 28일 은퇴를 결정한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 베테랑 우완 서재응. ⓒ 연합뉴스


뜻밖에 많은 이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지만 서재응은 국가대표팀에서도 단골손님이었다.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드림팀 1기'로 참여했으며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도 참가해 한국 대표팀의 4강 진출에 공헌했다. 한국이 당시 토너먼트에서 일본을 꺾고 서재응이 그라운드에 태극기를 꽂으며 승리를 자축했던 퍼포먼스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하곤 한다.

서재응은 특유의 진중한 맏형 이미지로 많이 각인되어 있지만, 특유의 시원시원한 성격과 친근한 캐릭터로 독특한 별명이나 일화도 꽤 많았던 선수였다. 전성기 시절 특유의 날카로운 컴퓨터 제구력을 앞세워 '아트 피처', '컨트롤 아티스트', '서덕스'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KBO 입단 이후에는 항상 팀을 위해서 앞장서고 승수 불운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긍정적인 태도로 '서재응원단장', '서캔디', '멘탈왕', '나이스가이'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물론 경기력이 좋지 않을 때는 반어법 차원에서 이 별명들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서재응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항상 쿨한 태도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마냥 쿨하기만 한 모습이 서재응의 전부는 아니었다. 2009년 SK와의 한국시리즈 당시 정근우와 신경전을 펼치며 욕설 파문으로 잠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2013년에는 삼성전에서 빈볼 시비가 발생하자 당사자들보다 벤치에 앉아있던 서재응이 뛰어나와 더욱 흥분했던 모습을 보였다. 신사적인 이미지에 숨겨진 서재응의 파이터 기질을 보여준 장면이기도 했다. 서재응은 훗날 상대 선수와의 악감정보다는 팀원 보호와 기 싸움 차원에서 더 오버한 면이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 역시 어떤 면에서 자신보다 후배나 팀을 더 중시하는 서재응의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그야말로 영욕이 교차하는 야구인생의 1막을 정리하고 서재응은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서재응의 거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망이 엇갈리고 있지만 많은 이들은 서재응이 지도자나 해설가로 나서도 대성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메이저리그와 한국야구를 넘나들며 쌓아온 풍부한 경험과 선수협회장까지 역임할 정도로 검증된 리더십은, 그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든 현역 시절의 별명처럼 '나이스한 야구인'으로 한국야구에 공헌할 부분이 많이 남았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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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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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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