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철학적으로 혹은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22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회관 대극장,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커튼콜

▲ 조형균-박유덕 페어 지난 22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커튼콜을 촬영한 사진. <빈센트 반 고흐>는 시간만 맞춰 가면 된다. 어떤 배우의 어떤 페어로 봐도 만족스러운 연기와 노래를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배우 개개인의 특색이 묻어난다. ⓒ 곽우신


[기사 수정 : 2월 1일 오전 8시 15분]

박원순 서울시장님께
서울 시내에 한파가 몰아치고, 총선을 앞두고 정치 시계가 재빠르게 돌아가는 와중에 박원순 시장님께 갑작스레 이렇게 글을 씁니다. 비록 시장님과 일면식도 없지만, 시장님께서 꼭 봤으면 하는 작품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관람을 권하는 건 '뮤지컬'입니다. 시장님께서 뮤지컬을 관람한 게 처음은 아닐 겁니다. 시장님은 지난 2011년 9월, 서울 대학로 학전그린에서 뮤지컬 <빨래>를 감상했습니다. 당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사퇴한 후 무소속으로 서울시장 선거에 나선 상황이었지요. 바쁜 일정 와중에 <빨래>를 본 뒤, 시장님은 1막이 끝난 후 인터미션 때 이런 트윗을 남겼습니다.

"동숭동 학전그린에서 <빨래>라는 연극 보고 있습니다. 돈 벌러 시골에서 몽고에서 온 소시민들의 서럽고 팍팍한 삶을 그리고 있네요. 이들에게 따뜻한 서울이 되면 좋겠습니다." - 2011년 9월 11일 박원순 트위터 공식 계정(@wonsoonpark)에서

비록 연극을 뮤지컬로, 몽골을 몽고로 잘못 적기는 하셨지만, 이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지요. <빨래>는 좋은 극입니다. 서울시에 발붙인 다양한 서민의 애환을 어루만지면서 노동, 여성, 주거, 빈곤, 다문화 등의 문제를 꼬집습니다. 저는 박원순 시장님이 당선 후 만들고자 했던 '따뜻한 서울'과, 이 작품의 메시지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로 4년 넘게 시간이 지난 지금, 저는 오늘 다른 작품을 하나 더 봐주시기를 권하려 합니다. 이번 주 30일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는 <빈센트 반 고흐>라는 극입니다.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는, 제가 이전에 쓴 조야한 글을 한 편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관련 기사 : 사후 125년, 고흐는 '아직도' 굶어 죽는다).

17세기 유럽, 막지 못한 고흐의 자살


제목 그대로, 이 작품은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별생각 없이 편안하게 가서 봐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작품입니다. 3D 영상으로 재현한 고흐의 작품은 미려하고, 빈센트와 테오 형제의 우애는 따뜻합니다. 여기에 예술인의 삶과 고뇌를 더하면서 작품은 보다 큰 빛을 발합니다.

빈센트는 동생 테오 반 고흐의 제안을 받고 사람의 인생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 지체 높은 귀족 대신 노동자를 그리고자 했습니다. 사람의 삶을 화폭에 옮기며 사람을 닮은 그림을 그렸던 빈센트는 누구보다 그림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빈센트, 어쩌면 말이야. 네가 높은 지위의 직업을 가졌더라면 아버지가 뿌듯해 하셨을까. 빈센트, 어쩌면 말이야. 네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가졌더라면, 누군가의 애인이 되고 남편이 되고 아빠가 될 수 있었을까." -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No.11 '자화상(Portrait)' 중에서

그림을 그리며 빈센트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빈센트가 가난했던 건 대체 누구의 잘못일까요. 그가 시장에서 성공할 만큼 충분히 유능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22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회관 대극장,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커튼콜

▲ 밥테오 지난 22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공이 끝난 후 커튼콜이 진행됐다. '테오' 역은 빈센트의 동생뿐만 아니라 빈센트의 아버지, 아카데미의 안톤 선생과 고흐의 벗이었던 고갱까지 '멀티'를 소화해야 하는 역할이다. 박유덕 배우의 역 소화 능력은 이미 충분히 검증됐다. ⓒ 곽우신


빈센트 "요즘 말이야. 인물화를 그리지 못해. 모델료를 아끼다 보니, 그 대신 정물화를 그려. 요즘 말이야. 언제 제대로 밥을 먹었는지, 물감을 모두 사버렸거든."
테오 "도대체 돈이라는 게 뭘까. 아무리 응원을 하고, 설득을 해도 괴로워하는 형을 보면, 돈은 영혼을 갉아먹는 벌레." -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No.10 '돈이라는 놈(Money)' 중에서

빈센트를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끝까지 후원하던 테오 역시 최선을 다해 형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테오는 빈센트에게 무한정 돈을 줄 만큼 충분히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또 누구의 잘못일까요. 형을 충분히 지원할만큼 돈을 벌지 못했던 테오 개인의 무능 탓일까요?

"살아보려 했는데, 세상은 나에게 가질 수 없는 것만을 쥐어줘 놓고 다 빼앗아 가네, 빼앗아가네. 내 무능을 비웃듯 다시 그걸 앗아가네. 너무 아파서 운다네. 아프고 아파서 운다네. 다 사라져, 사라졌네. 용기 따위, 희망 따위, 다, 다." -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No.14 '사라진 것들(Disappear)' 중에서

꿈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버려야 하고, 그렇게 손에서 놓고도 꿈을 좇지 못하는 현실. 이건 비단 1800년대 유럽만의 문제가 아닐 겁니다.

아를의 화가 공동체를 꿈꾸며, 빈센트는 고갱에게 마지막 희망을 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 실패한 이후, 결국 빈센트는 버티지 못합니다. 터전을 잃고 쫓겨난 빈센트는 결국 황금빛 밀밭으로 향합니다. 바람에 밀들이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게 하는 금빛 들판에 이질적으로 빈센트가 서 있습니다. 그는 물감을 팔레트에 짜고, 붓으로 그 풍광을 캔버스에 옮깁니다.

 22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회관 대극장,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커튼콜

▲ 쌀고흐 지난 22일,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커튼콜에서 빈센트 역을 맡은 배우 조형균이 앉아 있다. 평생 그림을 그리며 행복했던 화가는, 결국 그 그림을 끝까지 그리지 못하고 화가들이 사는 별로 여행을 떠난다. 그의 죽음에 책임져야 할 건 빈센트나 테오 개인이 아니라 사회고 정치이다. ⓒ 곽우신


"그림을 위해 모든 걸 걸겠어. 그림 때문에 난 많이 아팠고, 사람들은 날 미친놈이라 기억하겠지만. 아무래도 좋아. 그림은 남을 거야. 그림으로 인해 행복했었으니, 아무래도 좋아. 그림으로 인해 꿈을 꾸었으니, 아무래도 난 좋아. 내 그림을 위해 내 생명을 건다." -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No.16 '내 생명을 걸겠어(My Life)' 중에서

노래하며 유화를 완성한 화가는 조용히 자신의 가슴에 권총을 갖다 댑니다. 1890년 7월 27일, 따가운 태양 빛이 내리쬐는 밀밭에서 빈센트는 그렇게 자살을 시도합니다. 이틀 뒤, 그는 그가 사랑하는 동생 테오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둡니다. 형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테오는, 슬픔과 고통으로 몸부림치다가 이듬해인 1891년 1월 25일 형을 만나러 함께 떠납니다. 바로 125년 전 오늘(1월 25일) 말이죠. (물론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 빈센트 반 고흐의 실제 유작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뮤지컬에서는 속설대로 이 작품을 고흐의 유작으로 묘사합니다.)

21세기 서울, 아직 막을 수 있는 고흐의 자살



"가난한 연극인, 이제 서울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 2015년 12월 23일 박원순 페이스북 공식페이지 게시글 중에서

지난 2015년 12월 23일, 서울 삼선동 '연극인의 집' 개소식을 치른 후 시장님은 페이스북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연극인을 지키겠다고. 고흐가 꿈꿨던 아를의 화가 공동체와, 연극인의 집이 추구하는 바에는 교집합이 있습니다. 저는 저 연극인이 단순히 연극 무대에 종사하는 이만 일컫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연극인을 포괄하는 모든 가난한 예술인을 박원순 시장님이 안고 싶어 할 것으로 추측합니다.

박원순 시장님께서는 지난 2013년 6월에는 지역 소상공인과 예술가들의 소통과 연대를 지원하는 '문래예술창작촌'을 활성화하겠다고 밝혔습니다. 2014년 서울시장 재선에 도전했던 후보 시절에도 '문화서울'을 표방하며 문화예술인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015년 5월, 만리동예술인협동조합 '막쿱(m.a.coop)'의 공공주택 개관 행사가 열린 밑바탕에도 이런 과정이 있었다고 믿습니다. 예술인끼리 서로 연대하며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데, 정치가 어떻게 좋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 예시라고 생각합니다.

 22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회관 대극장,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커튼콜

▲ 고흐 형제 지난 22일,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커튼콜이 마무리되면서 조형균, 박유덕 배우가 자리에 앉아 웃고 있다. 고흐 형제들이 실제 삶에서 이처럼 둘이 함께 나란히 웃은 적은 얼마나 될까? 아마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 곽우신


박원순 시장님이 지금까지 추진해왔던 문화예술 정책 기조를 봤을 때,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의 메시지가 시장님의 생각과 여러 면에서 닮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관련 정책을 기획하고 펼치는 데도, 분명히 이 작품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이라 믿습니다.

지난 2013년에 초연에 오른 <빈센트 반 고흐>의 이번 공연은 '앙코르&아듀' 공연입니다. 오는 30일까지 공연을 마친 후, 당분간 재정비 기간을 가진답니다. 6월에 짧은 대전 공연이 잡혀 있습니다만, 이번 공연을 놓치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거죠. 그러니 이 기회에 예술인의 눈물에 대해서, 위대한 화가가 꿈꿨고 좌절했던 현실에 대해서, 125년 전 오늘 죽은 테오에 대해서 이 작품을 통해 한 번 되새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애쓰시고 있겠지만, 고흐와 같은 처지의 예술가들이 아직 서울에는 차고 넘치니 말입니다.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의 포스터 지난 5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막을 연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가 오는 30일 막을 내린다. 초연과 재연까지 무사히 마친 이 작품은, 짧았던 '앙코르&아듀' 공연을 마친 후 당분간 정비 기간을 가진다. 아마 잠시 동안은 재회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의 포스터 지난 5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막을 연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가 오는 30일 막을 내린다. 초연과 재연까지 무사히 마친 이 작품은, 짧았던 '앙코르&아듀' 공연을 마친 후 당분간 정비 기간을 가진다. 이번 기회를 놓친 '고갱'들은, 아마 잠시 동안 고흐와 재회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HJ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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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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