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드라마 <시그널> 한 장면

tvN 드라마 <시그널> 한 장면 ⓒ tvN


2000년대 초반은 한국영화에서 수준 높은 작품이 연이어 쏟아지던 시기였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류승완, 2000)을 시작으로 <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2000) <소름>(윤종찬, 2001) <복수는 나의 것>(박찬욱, 2002) <지구를 지켜라>(장준환, 2003) <바람난 가족>(임상수, 2003)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에 빛나는 <올드보이>(박찬욱, 2003) 등. 지금까지도 한국영화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영화들이 즐비한 2000년대 초반, 그중에서도 가장 평단과 관객들의 높은 지지를 얻었던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이다.

이 영화는 잘 알려졌다시피 지금까지도 미제로 남아있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다. 이 '화성연쇄살인사건'은 훗날 tvN <갑동이>(2014) 그리고 지난 22일 처음 방영한 tvN <시그널>의 모티브로 이어지게 된다. <살인의 추억> 개봉 당시에도 '화성'을 다루었다는 이유만으로 화제가 되었고, 이 영화가 숙원이었던 범인 찾기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했으면 하는 바람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슬프게도 이 영화는 정작 범인을 잡는 데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범죄물을 표방했지만 사실상 미스터리에 더 가깝고, 범인을 잡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는 경찰의 유능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수사과정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억압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이 영화. 그 당시에도 확실히 문제작이었고, 할리우드 색채가 뚜렷한 장르를 한국식으로 옮기는 데 능하면서도, 사회적 메시지까지 고스란히 전달할 줄 아는 봉준호 감독의 저력을 완전히 각인하게 한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의 젊은 영화학도들 사이에서 한국영화의 모범이라 불리며, 제2의 봉준호가 되기를 자청하게 하는 이 영화의 힘. 그 힘의 배경에는 누구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사건을 통해 당시 한국 사회를 돌아보고자 했던 감독의 의지가 있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과 경기 남부 부녀자 살인사건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이 처음으로 일어난 1986년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항쟁의 열기와 이를 저지하려는 공권력과의 싸움으로 얼룩진 한 해였다. 당시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기 전, 서울을 전세계에 처음으로 알리는 아시안게임이 한창이었다고 하나, TV 화면에 비치는 서울의 아름다운 풍경을 과시하기 위해 힘없는 민중들의 보금자리는 소리 소문도 없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리는 곳은 거의 없었다.

<살인의 추억>이 주목하는 1980년대 중반의 핵심은 여기에 있었다. 독재 정권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해, 사건과 무고한 사람이 범인으로 의심받고, 그를 범인으로 몰고 가기 위해 잔인한 고문이 거리낌 없이 행했던 시대. 연쇄 살인마에게 이유 없이 끌러갔던 부녀자들의 억울한 죽음도 끔찍하지만, 용의자 자백을 받아낸다는 명분 아래에 벌어지는 취조실 내 사건 또한 보는 이들의 심장을 떨리게 한다. 이 영화가 기억하고자 하는 살인의 '추억'은 단순히 '화성'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그 자체만 국한되지 않았다.

<살인의 추억> 이후 '화성'을 다룬 드라마로는 <갑동이>도 있었지만, <살인의 추억>이 내포하고 있던 문제의식, 시대정신까지 함께 계승하고자 하는 적자의 영예는 일단 <시그널>에게 돌아갈 듯하다. 첫 회부터, 공권력의 무능함과 불성실함을 폭로하는 이 드라마는 우여곡절 끝에, 영원히 미제로 남을 뻔한 유괴사건을 일단락 짓고, 이 드라마의 진짜 주제인 '경기 남부 부녀자 살인사건'으로 활시위를 당긴다.

 tvN 드라마 <시그널> 한 장면

tvN 드라마 <시그널> 한 장면 ⓒ tvN


그런데 첫 회에서 '김유정 유괴사건'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존재가 놀랍게도 15년 전에 온 무전이다. 마치 오래전 부터 2015년을 사는 박해영(이제훈 분)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듯이, 태연하게 박해영 경위님이라고 부르는 무전 속 이재한(조진웅 분)의 정체는 간담까지 서늘하게 한다.

그렇다. 2015년 박해영과 무전을 주고받는 2000년의 이재한, 그리고 앞으로 '경기 남부' 사건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줄 1989년 이재한은 이미 사람들의 기억 속에 완전히 잊힌 유령 같은 존재다. 그가 2000년 있었던 의문의 실종사고 이후 그의 생사는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그를 잊었고, 그와 관련된 기억까지 완전히 잊고 싶어 한다.

<시그널>이 보내고자 하는 진짜 시그널은?

 tvN 드라마 <시그널> 한 장면

tvN 드라마 <시그널> 한 장면 ⓒ tvN


하지만 완전 범죄가 없듯이, 완전한 기억 말살도 존재하지 않는다. 15년 전에서 온 무전을 타고 2015년 사람들 앞에 '짠'하고 나타난 이재한은 누군가에 있어서는 그리움과 반가움의 존재일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에 있어서는 <해리포터>의 볼드모트처럼 이름도 언급해서는 안 될 두려운 존재다. 이재한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이재한을 떠올리게 하는 단서조차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하는 것은, 그들이 감추고 싶은 비밀·비리와 깊숙이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다.

2000년, 이재한 실종사건 당시, 그 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거나, 방조한 이들은 어떻게든 이재한의 실종과 관련된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막을 것이고, 그러기 위해 더 큰 음모를 꾸밀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들의 추악한 민얼굴이 더 명확히 드러나는 법이다. 어린이 유괴 사건, 연쇄살인사건 등 강력 범죄로 상처받는 피해자 가족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희망과 믿음 하에 이 드라마가 기획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이 하나둘씩 실현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사건을 일으킨 범죄자 외에도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준다. 드라마 <시그널>이 진짜 시청자들에게 보내고 싶은 신호는 무엇일까.

과연 1989년으로 발길을 재촉하는 <시그널>은 서울올림픽의 영광과 경제성장의 풍요로움에 숨겨진 1980년대 후반의 진짜 얼굴을 찾아내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2000년에 이어 1989년 그때 그 시절로 조용히 주파수를 맞추고자 하는 '시그널(신호)'에 적극적으로 응답할 때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진경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neodol.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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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여기에서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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