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장수1 돈의 광대인 약장수. 그 웃음에는 슬픔이 묻어있다.

▲ 약장수1 돈의 광대인 약장수. 그 웃음에는 슬픔이 묻어있다. ⓒ ㈜26컴퍼니


"'어벤져스 2'의 서울시 지원금이 과연 합당했는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한 가운데, 여기에 밀려 변변하게 상영관조차 잡지 못한 채 사라져간 영화가 있다는 소식을 한 시사 교양 프로그램을 통해 전해 들었다. 역시 마음 먹고 인터넷을 뒤지지 않으면, 상영관을 찾기 힘든 영화였다. 바로 <약장수>.

처음 10여분의 스크린은 짐작한 대로였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 여과없이 투영되면서, '어벤져스'와 같은 영화 문법에 길들어진 관객들에게는 오히려 낯선 영화처럼 느껴진다. 우려했던 '싼 티'가 묻어있다. 매일 보는 삶의 구석구석이 여과 없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컴퓨터 그래픽은 그만두더라도, 최소한의 미술조차 닿지 않은 듯한 '게으름'이 영화에 녹아있다. 도대체 영화 속에 환상이 없다. 그런데 그동안 나를 길들여온 요란하고 익숙한 영화 문법 대신, 배우들의 열연에서 비롯되는 실질적인 삶의 모습이 전개되면서부터, 억지스런 환상이 아니라 자연스런 몰입이 시작된다.

이제 영화 소개에 앞서 다른 질문을 먼저 던져 보기로 하자.

"영화로 무엇을 하니?"
"유리벽 같은 스크린을 떠돌다, 배우에 주사한 환각이 온 몸을 감싸면, 유리벽이 깨지고 비로소 환상이 실제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리고 돈을 벌어요."

영화의 현실적인 효용이다. 여기에 아주 간단한 논리학 명제를 대입해 보자.
"영화를 만들어 돈을 번다."
p→q의 대우명제는 늘 더 치열한 현실 인식을 돕는데 사용된다.
∼q→∼p에 대입해 보자.
"돈을 벌지 못한다면, 영화가 아니다."
이제 영화 '약장수'를 통해 이 명제의 타당성을 검토해 보자.
돈의 광대를 연상케하는 '약장수'.

영화에는 대리운전, 일용직 등 소위 '일상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너무 일상적이기에 나를 깨우게 된다. 주인공(김인권 분)은 신용불량자다. 아픈 아이를 위해, 어렵게 번 돈을 지키기 위해, 비오는 저녁, 대리운전을 마치고 새벽 지하철이 올 때까지 노숙을 한다. 새벽녘에 들어가 아이를 껴안는 아빠의 모습부터 나는 영화에 집중을 하게 되었다.

그 아이의 아픔은, 자신의 유전자로 내려준 상처지만, 가난한 부모는 도무지 이를 해결한 능력이 없다. 그리고 가난한 아이는 늘 짜장면을 좋아한다. 그리고 아내는 "우리 세 식구 그만 죽어버릴까?"라는 극단적인 말을 아주 편안하게 내뱉는다.

아빠는 어머니들에게 각종 건강식품과 생활용품을 파는 홍보관 '떴다방'에 취직한다. '떳다방'에 취직하고 처음부터 뻔뻔한 사람은 없다. 자기 최면이 필요하다. 영화의 전반부는 이러한 최면의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점장 철중(박철민 분)은 직업정신이 투철하다. 철저히 헌신하고, 철저히 받아낸다. 사람이 악하지 않고, 돈이 사람을 만드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밉지 않고 무섭다. 그가 돈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잘 보다보면, 고려시대의 가전체 문학 공방전의 주인공이 재현되는 느낌을 한 배우를 통해 느낄 수 있다.

약장수사진2 점장(박철민 분)은 인격을 갖춘 돈의 화신을 재현하고 있다.

▲ 약장수사진2 점장(박철민 분)은 인격을 갖춘 돈의 화신을 재현하고 있다. ⓒ ㈜26컴퍼니


공방전에서는 엽전이 주인공이다. 그런데 엽전은 태생부터 모순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둥글면서도 네모난 모습은 현실의 돈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가진 자에게는 부드럽지만, 못 가진 자에게는 한 없이 각지고 날카롭기 때문이다. 고객들에게 자연스럽게 "우리 엄마, 엄마"라 말하다가, 막상 외상값이 쌓이면 손가락을 자를 듯한 기세로 반지를 뽑아내는 점장의 이중성은 실제로 돈이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사탕을 우걱우걱 씹는 그에게서 '달콤한 섬뜩함'이 묻어난다.

아픈 아이의 아버지는 약장수라는 새로운 직업을 얻는다. 갈 곳 없고 외로운 엄마들을 등치는 직업이지만, 점장은 이같은 시각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감성노동자. 자식이 줄 수 없는 감성을 파는 어엿한 서비스 업종이라는 사실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다. 기계화, 정형화된 감성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리고 아들이 검사인 옥님 엄마(이주실 분)가 이 감성의 구매자로 등장하면서, 한 엄마를 등치는 '두 자식'이 겹치게 된다. 바로 '약장수 자식'과 진짜 자식이다.

그리고 자식은 다시 부부라는 관계속에서 돈이 고리를 맺고 있다. 당연히 며느리도 시어머니를 '정기적으로 용돈을 주어야하는 고지서' 쯤으로 취급한다. 모든 관계의 중심에는 돈, 그리고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지위 등이 자리 잡고 있어 보기에 불편하다. 두렁 사이를 획 지나간 뱀을 보기 싫어 눈을 돌렸건만, 누군가 옆에 서서 뱀이라고 꼭 말해 줄 때의 불편함과 유사하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져 볼 수 있다.
"인생으로 무엇을 하니?"
"돈을 벌지요."
여기에도 대우 명제가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치열한 현실 인식을 돕는.
"돈을 벌지 못한다면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질문도 유추 가능하다.
"부모는 자식에게 무엇을 해야하는가?"

약장수사진3 옥님엄마가 서서히 모임에 빠져들고 있다.

▲ 약장수사진3 옥님엄마가 서서히 모임에 빠져들고 있다. ⓒ ㈜26컴퍼니


그리고 영화는 약장수에게서 실낱같은 위로를 얻는 옥님 엄마를 후반부에 부각시키고 있다. 한 시간도 만나지 못하는 아들보다, 매일 서너시간을 놀아주는 약장수가 관계의 중심에 들어가는 것이다. 가장 상업적인 인간이, 가족의 빈틈마저 파고 들 수 있다면, 가족 관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넥타이를 풀어헤쳐 머리에 두르고, 유행가를 부르는 약장수에게서 옥님 엄마는 자신의 원하지만, 영원히 볼 수 없는 자식을 떠올리며 그리워한다. 그리고 옥님 엄마와 약장수 사이에서 돈의 논리가 개입하기 전의 순수한 인간의 관계가 아주 희미하게 싹을 띄우려는 시도를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의 중·후반부를 이루는 긴장과 갈등의 절정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두 장면만을 인상이 깊어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옥님 엄마가 이 모임에 급성적 호감을 갖는 계기. 김인권이 "저 푸른 초원위에, 사랑하는 님과 함께"를 부르자, 모임의 엄마들은 "지랄하고 자빠졌네"로 화답한다. 점잖던 옥님 엄마가 새로운 삶의 방식에 공감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옥님 엄마의 아파트 현관문에 덕지덕지 나붙는 전단지와, 이를 매개로만 살아있음을 외부에 알리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서글프게 다가온다. 전단지를 붙이는 사람이나, 떼어내는 사람이나 모두 외롭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제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마무리하자. 실제로 영화가 돈을 위해서만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좋은 영화가 자연스럽게 돈을 벌어줄 수는 있지만. 마찬가지로 인생이 돈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가족 관계는 더더구나 아니다.

그런데 '현실의 영화'와 '영화 속 현실'은 모두 그렇지만은 않다. 이 모든 모순적인 명제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영화가 바로 '약장수'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오랫동안 어떻게든 살아 남아서 "돈을 벌지 못하면, 영화가 아니다."라는 대우 명제를 서서히 깨트려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약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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