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눈> 에서 부부로 출연하는 신구와 손숙

▲ <3월의 눈> 에서 부부로 출연하는 신구와 손숙 ⓒ 국립극단


유럽은 2차 세계대전의 화마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정서를 간직한 옛 건물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선 한옥을 찾는 게 쉽지만은 않다. 재건축이라는 명제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개발 지상주의가 만연한 탓이다.

연극 <3월의 눈>의 배경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신구가 연기하는 장오와, 손숙이 연기하는 이순은 오래된 한옥에서 사는 노부부다. 이순은 일부러 창호지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고는 창호지를 새로 발라야겠다고 살갑게 장난을 친다. 아내의 장난에 장오는 창호지를 새로 사오지만 모든 게 헛일이다. 장오와 이순이 사는 이 한옥이 재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얼마 안 있으면 사라질 집이기 때문이다.

<3월의 눈>에서 물리적으로 지배하는 가치관은 개발 지상주의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부부가 마음 놓고 살 공간인 한옥은, 재개발이라는 개발 지상주의 논리 앞에서 없어져야 할 공간으로 치부당하고 만다. 옛 선조가 물려준 정신적인 가치는 3층 상가가 들어설 공간에 자리를 물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

상가 건물이 들어서서 임대료를 받는 게 오래된 한옥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기에 그렇다. <3월의 눈>의 이야기는 오래된 한옥을 지키며 장오와 이순의 마지막 보금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개발 지상주의 앞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관객에게 보여준다.

그러면 장오와 이순은 왜 자신들의 마지막 보금자리가 될 한옥을 팔아야만 했을까. <3월의 눈>은 배우들의 화려한 움직임이 없다. 이렇다할 움직임은 외국인 관광객이 장오와 이순의 한옥을 찾는 장면, 장오가 창호지를 사러 나간 사이에 건물주가 장오의 한옥 마루를 뜯어내는 게 전부일 정도다. 굉장히 정적인 동선을 유지하는 셈이다. 그만큼 배우들의 대사 하나 하나에 유념해야 한다. 만에 하나 다른 생각을 하느라 대사를 놓친다면 이 연극이 전달하고자 하는 맥락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다시 장오와 이순의 한옥을 왜 팔아야 했을까를 되짚어보자. 극 후반부를 보면 장오의 손자며느리가 장오에게 만두를 사갖고 오는 장면이 있다. 장오는 만두를 함께 먹자고 하지만 손자며느리는 만두를 차마 입에 넣지 못하고 훌쩍거린다. 장오가 한옥을 떠나야 하는 사연이 장오 때문만이 아니라는 걸 암시하고 있다.

장오가 자신의 마지막 보금자리마저 팔아야 했을 만큼 돈이 필요했던 건 장오가 살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손자의 빚을 갚기 위해서다.

손자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노부부의 마지막 보금자리마저 내어주는 모습 가운데에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장오와 이순의 희생정신을 찾을 수 있다. 노부부가 살아갈 마지막 거처마저 손자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장오의 희생정신은, 부모의 재산을 보다 많이 물려받기 위해 상속권 다툼을 벌이는 요즘의 물질만능주의에 큰 경종을 울린다.

개발 광풍에 희생당하는 개인, 인과응보는 아니다
<3월의 눈> 에서 부부 연기를 선보이는 신구와 손숙

▲ <3월의 눈> 에서 부부 연기를 선보이는 신구와 손숙 ⓒ 박정환


<3월의 눈>은 개발 지상주의와 대비되는 장오의 희생정신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이 연극 가운데서 전반적으로 흐르는 정서는 '상실'이다. 잃어버림 말이다. 장오는 마지막 남은 보금자리만 잃어버린 건 아니다. 장오의 아들 영돈은 대사로만 등장하는 잃어버린 아들이다.

장오의 아들은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지만 그 생사를 알 수 없는 인물로 등장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가족보다, 사회를 변혁시키겠다고 집을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아들에 대한 애틋함을 장오는 가지고 있다. 장오가 손자를 위해 마지막 보금자리인 한옥마저 아깝지 않게 내어준다는 건 돌아오지 않은 아들에 대한 애틋함을 손자에게 투영하는 것으로도 읽어볼 수 있다.

상실의 정서는 장오 혼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극에 등장하는 노숙자 황씨는 원래부터 노숙자가 아니었다. 돼지를 기르던 농장주였지만, 구제역이 엄습하는 바람에 기르던 돼지를 생매장해야만 했다. 구덩이에서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 대는 돼지를 발로 차고 산 채로 매장해야만 했던 트라우마는 결국 황씨를 노숙자 신세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장오가 노숙자 황씨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박대하지 않는 건 그가 불성실하게 살아서 노숙자로 전락한 게 아니라, 너무 착했기 때문에 구제역으로 자기 돼지를 생매장했을 때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이해해주었기 때문이다. 정오와 황씨 두 사람 모두 구제역과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 가운데서 아들과 돼지를 잃어버리는 비운의 인물들이다.

<3월의 눈>은 장오의 대사를 통해 이 세상이 꼭 인과응보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장오는 "사람 백정은 떵떵거리면서 산다. 하지만 죄 없는 사람은 고생한다. 죄지은 놈이 죄갚음 당하지 않는다"는 대사를 객석에 건넨다. 인과응보의 세계관은 죄를 지은 사람은 하늘에게 벌을 받고, 착하게 산 사람은 착한 대가를 보상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3월의 눈>은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고생한다. 노숙자 황씨는 사람도 아닌 돼지가 생매장 당하는 것 때문에 트라우마에 걸린다. 장오는 자신이 살아갈 마지막 보금자리마저 손자를 위해 내어준다. 현실에서도 이런 사람이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로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장오와 황씨고, 착하게 산 대가를 하늘로부터 보상받는 게 아니라 거꾸로 고생한다. 인과응보의 가치관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3월의 눈>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모든 걸 희생하는 장오와, 트라우마에 걸린 황씨라는 착한 두 인물을 통해 약삭빠르게 살아가야 살아남는 현 세태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공연으로도 읽을 수 있는 연극이다.
<3월의 눈> 에서 손주며느리와 만두를 먹는 장오 역의 신구

▲ <3월의 눈> 에서 손주며느리와 만두를 먹는 장오 역의 신구 ⓒ 박정환



신구 3월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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