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은 마천루로 가득 차있고 멀리 보이는 하늘은 뿌연 먼지의 장막으로 뒤덮여 있다. 더 이상 별빛은 밤을 비추지 않는다. 우리는 흙내음보다 콘크리트의 감촉과 거리의 소음에 익숙한 세대가 되었다. 교과서에서는 지구 자원의 유한함을 가르치고 TV는 녹아내리는 남극을 비춘다. 각국의 지도자들은 지구 온난화에 대해 회의하지만 공장의 굴뚝들은 여전히 시꺼먼 연기를 내뱉는다.

러시아의 우주 개발을 이끈 과학자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지구는 인류의 요람이지만, 누구도 요람에서 영원히 살 수 없다."

인류 최초로 우주여행을 다룬 문학 작품은 A.D. 2세기경 그리스의 작가 루키아노스가 쓴 <진실한 이야기>이다. 기이한 달 세계로의 여행을 다룬 작품인데 무려 1900년 전에 쓰인 작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기발한 상상력들로 넘쳐난다.

당시 그가 살았던 시대의 일반인들에게는 달나라 여행은커녕 자신이 태어난 땅을 떠나는 것조차 커다란 모험이었다.

2014년, 두 거장의 같은 소재·다른 장르의 작품

 영화 <인터스텔라>의 공식 포스터

영화 <인터스텔라>의 공식 포스터 ⓒ 워너 브라더스


하지만 많은 시대를 지나며 사람들에게는 태어난 땅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심지어 태어난 국가에 묶일 필요가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루키아노스 이후로 수많은 작가들이 우주에 대해 상상하고 우주여행과 개척을 노래했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인류는 지구 외의 행성에 최초로 착륙했고, 수많은 관찰과 노력 끝에 생명이 살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행성들도 발견했다. 그런 시대에 이런 질문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왜 우리는 지구에서 살아야만 하는가?

과연 우연일까 혹은 예술가의 통찰력이 빚어낸 운명일까. 다른 두 분야의 두 거장의 작품이 2014년에 나왔다. 모두 인류의 우주개척을 다루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와 시드 마이어가 제작한 게임 <문명 : 비욘드 어스>(Civilization : Beyond Earth)가 그 작품들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이야 워낙 유명한 거장이니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장르의 한계상 크리스토퍼 놀란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시드 마이어 역시 그 자신의 독특한 철학과 세계관을 바탕으로 짜임새 있는 작품을 만들어 왔다. 많은 게이머들에게는 시드 마이어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로 각인되어 있다. 각기 다른 장르에서의 두 거장이 우주와 인류에 대한 고민을 표현한 것이다.

이름에서부터 두 작품의 우주를 향한 열정이 느껴진다. Interstellar'는 '항성간의, 성간의'라는 뜻이다. 'Beyond Earth'의 뜻은 말 그대로 '지구를 넘어서'이다. 이런 소재는 자칫하면 지루하고 재미없는 과학 위주의 이야기가 되거나 그저 눈요기만을 위한 스페이스 오페라(Space(스페이스)+ Soap Opera(솝 오페라)의 합성어, 과학적 고증보다는 이야기에 중점을 둔 SF 장르 전반)가 되기 쉽다. 이 두 작품들의 분위기는 사뭇 진지하고 철학적이다.

두 작품의 목적은 죽어가는 지구를 벗어나 인류를 위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것이다. 각자의 이유는 다르지만 지구에서는 더 이상 인류가 발전하고 존속할 수 없다는 전제가 동일하다. <인터스텔라>는 황사와 병충해로, <문명 : 비욘드 어스>는 핵전쟁과 해수면 상승 때문이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 두 작품에서는 모두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우주개척을 준비한다.

<인터스텔라>에서 인류가 택한 방법은 두 가지다. 플랜 A는 중력방정식을 완성시켜 대다수의 인류를 직접 새로운 행성으로 보내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방법으로 나온다. 나머지 방법인 플랜 B는 매우 극단적이지만 현실적인 방법이다. 많은 수의 인공 수정란을 우주선에 싣고 가, 대리모 방식을 통해 새로운 인류로 새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터스텔라>는 주인공들과 관객들에게 이러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선택의 갈래에서 우리는 어떤 가치를 골라야 하는가?

플레이어의 가치관을 시험하는 기묘한 결말

 게임 <문명 : 비욘드 어스>의 패키지 모습

게임 <문명 : 비욘드 어스>의 패키지 모습 ⓒ <문명: 비욘드 어스> 공식 페이스북

게임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문명 : 비욘드 어스>는 <인터스텔라>와는 달리 새로운 행성에 착륙한 '이후'를 다루고 있다. 굳이 연결시켜 말하자면 <인터스텔라>의 플랜 A가 성공한 후의 개척자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플레이어가 미국, 중국, 프랑스 등 각 국의 개척단이 되어 식민지를 건설해 발전하며 싸우고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다.

자유분방한 전략 게임이기에 영화인 <인터스텔라>와 달리 <문명 : 비욘드 어스>는 상당히 다양한 결말들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 중 '약속의 땅', '해방', '초월'이라는 세 가지 결말이 매우 독특하다. 또한 각 결말은 <인터스텔라>처럼 우리에게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약속의 땅' 결말은 가장 인터스텔라와 비슷한 결말이다. 지구에서 가져온 과학기술을 우주에서 얻은 기술로 더욱 발전시켜 지구와 식민 행성을 연결하는 '차원문'을 건설하는 것이다. 마치 <인터스텔라>의 '웜홀'과 유사하다. 지구의 모든 인류가 구원받고 약속의 땅을 찾아 그곳에서 새로운 문명을 개척한다.

'해방' 결말은 꽤나 충격적이고 잔혹하다. 점점 발달하는 과학 기술로 인해 컴퓨터가 몹시 발전하게 되고, 식민행성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기계화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이것을 인간의 몸을 벗어나 더 나은 종족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구로 가는 순간이동 장치를 만들어 지구를 침략해 그곳의 인간들을 육체로부터 해방 시켜 주는 것이 새롭게 진화한 인류가 내린 결말이다.

'초월' 결말은 기묘한 느낌을 준다. 외계 행성에 정착한 그들은 지구를 파괴한 인류의 오만과 잘못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외계에 동화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행성은 행성 자체가 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개척자들은 자신들의 정신을 행성과 연결해 하나가 된다.

인간에게 미지의 세계는 항상 매력적이다. 우리는 모험에 대한 환상과 열정을 가지고 개척자들을 우러러본다. 하지만 단순히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과 진보된 과학 기술만을 가진 개척, 즉 철학적 고민이 부재한 개척이 가져오는 결말을 우리는 알고 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가져온 비참한 파괴는 언제든 되풀이 될 수 있다. 이제는 지구가 아닌 저 우주에서 말이다.

<인터스텔라>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의 우주 개척과 <문명 : 비욘드 어스>의 '약속의 땅' 결말에는 인류의 다음 단계에 대한 고민이 빠져 있다. 만약 인류가 새로운 행성에 정착해 살게 되었을 때, 과연 그 행성은 무한한 자원을 가지고 있을까? 결국 인류는 정착지를 지구처럼 황폐화 시키고 새로운 행성을 다시 찾아 떠날 것이다. 그들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고 결국에는 우주 유목민(Space Nomads)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결국, 문제의 근본 원인은 생각하지 않고 과학기술을 통해 현상만 극복하려는 태도다.

마찬가지로 '해방'과 '초월'에도 우리는 근본적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기계로 신체를 대체해 영원히 살아가는 것 혹은 더 큰 초월적 개체와 동화되어 인류가 하나가 되는 것. 과연 우리는 이들을 인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인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인류가 진정으로 바라던 구원 혹은 진화일까?

근원적 질문이 빠진... 그래서 아쉬운 두 대작

 우리는 언제까지 지구에서 살 수 있을까, 새로운 행성에서는 어떤 문명을 건설해야 할까.

우리는 언제까지 지구에서 살 수 있을까, 새로운 행성에서는 어떤 문명을 건설해야 할까. ⓒ H2 인터렉티브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 바뀐다고 해서 우리는 인간이 아닌걸까. 우리를 인간으로 정의하는 근본 구성틀은 무엇인가. 어느 선까지 스스로를 인간이라 부를지는 모르겠지만, <문명 : 비욘드 어스>의 저런 정도라면 이미 우주로 나간 인류가 아니라 우주의 새로운 종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구는 인류의 요람이다. 아기는 영원히 요람에 남아 있을 수 없다. 우리 인류 또한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영원히 지구에서 살 수 없다. 하지만 요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물리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 또한 작은 통을 넘어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발달해야 하지만 정신 또한 발달해야 한다.

<인터스텔라>에는 여러 이념과 가치관이 충돌하고, 인류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되묻는다. 그러나 그 질문과 답변은 여전히 '어떻게'에 머물러 있다. 인류가 새로운 행성을 개척하면, 그 행성에는 지구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까. 인류는 왜 생존해야 하나. 보다 근원적 질문의 부재가 아쉬움으로 남는다.

<문명 : 비욘드 어스> 역시 마찬가지다. 게임 플레이어는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매 상황마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인류의 미래를 좌우한다. 선발대로 지구에 남은 인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외계 문명과는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하든, 최선은 없다. 가장 이상적인 결말이란 없다. 그래서 아쉽다. 우주를 개척한다는 희열에 열심히 플레이를 하다보면 문득, 허무해지는 지점이다.

마치 '나'라는 세계에서 벗어나 나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는 아기처럼, 우리도 더 큰 우주에 대한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해야 한다. 지구라는 요람에서 벗어나려 하는 우리는, 과연 그에 걸맞은 정신적 성숙을 이루었는가? 어쩌면 저 먼 우주로 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봐야 할지도 모른다.

인터스텔라 문명: 비욘드 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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