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대표팀의 차두리가 7일 저녁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E1초청 축구 국가대표팀 평가전' 이란과의 경기에서 자데의 수비를 피해 볼을 다루고 있다.

아직까지 대표팀의 부름을 받는 그는 2002 한일 월드컵의 마지막 생존자다. 사진은 지난 2010년 9월 7일,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이란과의 평가전에서 차두리가 공을 다루는 모습. ⓒ 유성호


'살아있는 화석' 차두리에게 국가대표팀은 영욕의 공간이다. 한국축구 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으로 꼽히는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마지막 생존자가 바로 차두리다. 물론 아직 현역으로 뛰는 이천수나 김병지도 있지만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는 이제 차두리뿐이다.

돌이켜보면 차두리의 축구인생은 부침이 많았다. 고려대학교 시절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히딩크 감독의 눈에 띄여 조커로 깜짝 발탁되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유럽무대까지 진출했지만, 처음 주목받을 당시의 잠재력과 기대치에 비하면 대표팀에서의 커리어는 꾸준하지 못했다.

프로무대에서 소속팀이 자주 2부 리그로 강등 당하며 '강등머신'이라는 웃지 못할 별명도 얻었고, 2006년 독일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탈락하는 아픔도 겪었다. 선수로서 전성기를 누려야 할 시기에 확실하게 자리를 잡지 못하고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포지션을 변경하는 등의 우여곡절도 겪었다. 워낙 대선수였던 부친 차범근과의 비교는 차두리의 축구인생 내내 영광인 동시에 부담이기도 했다.

긍정의 아이콘에서 베테랑의 모범으로

차두리는 30대에 접어들며 축구인생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는 수비수로 허정무호에 발탁되며 한국의 원정 사상 첫 16강 진출에 공헌했다. 뒤를 이어 지휘봉을 잡은 조광래호에서도 2011 아시안컵과 브라질월드컵 3차 예선까지 부동의 오른쪽 주전 수비수로 중용됐다.

기성용과 함께 뛰었던 스코틀랜드 셀틱에서는 프로무대 데뷔 후 처음으로 리그 우승컵과 유럽클럽대항전 출전의 감격도 누렸다. 부친의 그림자를 벗어나 '선수 차두리'만의 가치와 업적이 인정받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차두리는 최강희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2013년 이후 다시 대표팀에서 한동안 밀려났다. 그 뒤를 이은 홍명보 감독도 차두리를 끝내 외면했다. 그 사이 차두리는 다사다난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가정사 등의 힘겨운 문제가 겹쳤고 스코틀랜드를 떠나 독일로, 그리고 다시 국내무대로 '유턴'해야 했다.

월드컵 본선을 앞둔 지난 3월에는 차두리가 모처럼 대표팀에 발탁되어 마지막 기회를 잡는 듯했으나 부상으로 낙마하며 결국 최종 엔트리 발탁은 불발됐다. 어쩌면 마지막 월드컵이 될 수도 있었기에 차두리 본인으로서도 아쉬움이 컸다.

브라질 월드컵 이후 어느덧 축구인생의 황혼 단계에 돌입하는 듯했던 차두리에게 또다시 뜻밖의 기회가 돌아왔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새롭게 지휘봉을 잡으면서 이동국과 차두리 등 한동안 외면 받던 K리거와 베테랑들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지난 월드컵 때 대표팀은 경험 부족과 리더 부재를 약점으로 지적받았다. 이를 해결해 줄 구원투수로 베테랑들의 가치가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차두리는 기존 선수들과 차별화되는 매력과 개성을 지닌 선수다. 유럽 선수들에게 밀리지 않는 당당한 체격조건과 저돌적인 플레이 스타일은 30대를 훌쩍 넘긴 지금도 녹슬지 않았다. 국가대표로 두 번의 월드컵을 체험했고, 유럽무대와 K리그를 두루 누빈 풍부한 경력을 바탕으로 국내파와 유럽파의 가교 역할을 하기에도 적격이다.

긍정적이고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선후배들 사이에서 두루 신망이 높다. 차두리는 특유의 남자답고 쾌활한 이미지를 통해 축구스타로는 드물게 '안티와 구설수가 거의 없는' 선수로 팬들 사이에서 꼽힌다.

대표팀은 지난 2011년, 박지성과 이영표의 은퇴 이후 이들의 공백을 메워줄 만한 리더를 찾지 못했다. 기성용, 이청용, 구자철은 아직 20대에 불과하고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리더의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다. 박주영은 최근 3~4년간의 부진으로 대표팀의 리더를 맡기기 어렵다. 또 다른 베테랑 이동국은 부상으로 아시안컵 출장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자연히 경험과 실력, 신망, 자기관리 등 모든 조건을 두루 충족시키는 차두리의 가치가 재조명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2014 브라질월드컵 SBS 해설을 맡은 차두리 해설위원, 배성재 캐스터, 차범근 해설위원(왼쪽부터)의 모습

2014 브라질월드컵 SBS 해설을 맡은 차두리 해설위원, 배성재 캐스터, 차범근 해설위원(왼쪽부터)의 모습 ⓒ SBS


차두리는 지난 브라질 월드컵에서 선수가 아닌 해설위원으로 참여하여 "선배들의 실력이 부족해서 대표팀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바람에, 후배들에게만 무거운 짐을 떠넘긴 것 같아 미안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당시 많은 축구 관계자들이 대표팀의 몰락으로 '멘붕'에 빠졌다. 뒤늦게 결과에 대해서 객관적인 척하며 남 탓으로 책임을 전가하기만 바빴던 시점이었다.

그 때 먼저 "내 탓이오"하며 스스로를 자책한 축구인은 오직 차두리뿐이었다. 경기에 뛰지도 않았고, 굳이 책임을 분담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선배로서 기꺼이 후배들의 잘못까지 자신의 몫으로 감싸 안았다. 당시 많은 축구팬들이 '진정한 리더'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차두리 은퇴 시기, 본인이 결정할 문제

차두리는 월드컵 이후 소속팀 FC 서울에서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대표팀에도 재승선했다. 축구 인생의 후반기를 화려하게 불태우고 있다. 지난 14일, 요르단과의 평가전에서는 선발출장해 '택배 크로스'로 한교원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여전히 녹슬지 않은 기량을 증명했다.

문제는 차두리가 공개적으로 계속 은퇴 시기를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다. 34세의 차두리는 이제 은퇴를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사실 브라질 월드컵을 통해 대표팀 경력에 마지막 유종의 미를 거두려고 했으나, 그 계획은 이미 물거품이 됐다. 차두리는 태극마크에 대해 어느 정도 마음을 비운 상태였으나, 최근 들어 차두리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고민에 빠졌다.

일부에서는 차두리가 아직 은퇴하기는 이르다고 주장한다. 소속팀 서울의 최용수 감독은 차두리가 아직도 훌륭한 기량을 갖췄다며 당분간 은퇴를 늦춰줄 것을 공개적으로 권유하기도 했다. 차두리 같은 베테랑이 대표팀의 중심을 잡아주며 러시아 월드컵까지 세대교체의 가교 역할을 해줄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팬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차두리와 한국축구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절충은, 대표팀이 2015 아시안컵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차두리가 명예롭게 태극마크를 내려놓는 시나리오일 것이다. 반 세기 동안 우승을 거머쥐지 못한 아시안컵은 한국축구에 월드컵 다음 가는 가치가 있는 대회다. 차두리로서도 4년 전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박지성-이영표가 이루지 못한 아시안컵 우승으로 태극마크 경력의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할 수 있다. 현재로서 차두리가 아시안컵 엔트리에 발탁되어 주전으로 중용될 확률은 99% 이상이다.

다만 그 이후는 불확실하다. 차두리 스스로 현역 생활 연장에 대한 의지가 강렬하지 않은 이상,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은 차두리의 나이를 감안할 때 너무 먼 이야기가 된다. 그때까지 차두리가 전성기의 기량을 유지한다는 보장도 없고, 월드컵이라는 목표만 바라보고 달리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다. 냉정히 말해 그때까지도 대표팀에 차두리를 대체할 만한 선수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게 더 큰 문제다. 또 다른 노장 이동국이 지금껏 월드컵에만 연연하여 선수생활을 해온 게 아닌 것처럼, 현역생활 연장을 위한 명분은 또 다른 문제다.

무엇보다 차두리의 인생은 언제까지 축구와 대표팀이라는 이슈에만 매여 있는 것은 아니다. 박지성과 이영표가 은퇴를 선언했을 때 많은 팬들은 "왜 아직 더 뛸 수 있는데 은퇴하느냐"며 아쉬워했고, 심지어 은퇴 이후에도 그들의 복귀를 원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나왔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끝까지 여론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 나름대로 그 시기에 대표팀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분명한 사정이 있었고, 그 이후의 축구인생에 대한 확실한 설계도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들의 결정이 옳았다.

차두리 역시 마찬가지다. 밖에서 보는 이들은 그라운드 위에서 '선수 차두리'의 경기력을 평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라운드 밖에서 '인간 차두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후에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에 대한 계획은, 누가 간섭하고 대신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로서 분명한 사실은, 차두리가 아직 소속팀과 대표팀에 충분히 공헌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언제까지 공헌할지는 전적으로 차두리 본인이 판단할 사안이다. 은퇴가 1개월 후가 될지 1년 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남들이 신경써야 할 문제는 아니다. 그저 그라운드를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차두리가 얼마나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느냐만이 중요하다.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지금 스스로 '유종의 미'를 고민 중인 차두리의 축구인생 말년은 분명히 대단한 축복임에 틀림없다. 더 뛰고 싶어도 기량이 떨어지거나 후배들에게 밀려서 원치 않게 떠나야 하는 선수들에 비하면 말이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축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