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하나가 술자리에서 비밀 하나를 털어놓았다. 친구는 아주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말했다. "사실 말야. 내 딸은 천재인 것 같아" 친구는 딸의 영재성을 키워주는 게 부모의 당연한 의무라며 영재 센터를 알아보겠다고 했다. 오마이 프렌드!

 <빌리엘리어트>

<빌리엘리어트> ⓒ UIP코리아


무거운 현실... 소년의 눈물겨운 '몰입'

영화의 스토리 구성은 매우 익숙하다.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최장기 파업 중인 가난한 탄광촌, 이런 얼토당토 않은 환경 속에서 발레리노를 꿈꾸는 한 소년의 이야기. 사실 어떤 예술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지닌 성장기 소년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눈물 짜게 하는 영화는 얼마나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것인가! 그러나 이 영화는 조금 다르다.

천재, 사전적 의미는 태어날 때부터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영화에서 빌리가 발레 천재라고 할 만한 장면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보다는 '춤을 추면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는 말처럼 아이는 그냥 춤이 좋다. 타고난 능력보다 타고난 흥미라고 해야 더 맞을 것이다. 우리 말에 "신들렸다"는 표현이 딱이다. "잘 한다, 잘 춘다"가 아니라 저절로 감흥 되고 본능처럼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한때 홍대 클럽에서 좀 놀았던 저자도 빌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영화를 싫어한다. 방울방울 눈물이 흐르기 위해선 인물들끼리 갈등을 공유하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극적인 상황을 통해 또르르 눈물을 떨구는 것인데 주말마다 텔레비전에서 하는 걸 극장까지 가서 보고 싶지 않아서다.

이 영화에선 인물들끼리 간지러운 감정을 끄집어내는 것은 꽤 인색하다. 그보다는 뚜렷하게 차이 나는 개성들을 그려주는 것에 더욱 할애한다. 욱하는 성질의 아빠, 줄담배에 찌든 발레 선생, 주체하기 힘든 젊은 피를 가진 형, 묘하게 발랄한 할머니 등 그들은 섣불리 타인의 감정에 동화되지 않고 다소 살벌하고 무뚝뚝한 가족, 이웃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무섭도록 쿨한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혹은 우리 일상과 비슷한 관계 속에서 빌리의 댄스열정은 그들을 얽히게 하고 괴팍한 성격들을 여실히 드러나게 한다.

사실 이 영화에서 배경으로 활용되는 현실은 꽤 무거운 소재들이다. 노동자와 자본의 갈등, 빈부차이, 가정문제, 성장기. 그리고 심심찮게 나오는 동성애코드까지. 만약 이런 것들을 우리의 이해력으로 진지하게 논하려 할 경우 머리가 터질 것이다.

영화는 논하지 않는다. 그저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처할 수 있는 비슷하고 일반적인 상황처럼 흐린 배경으로 처리해버린다. 초점은 발 뒤꿈치를 차고 뛰어오르는 빌리의 춤이다. 남자가 발레를 하는 게 좋으니 나쁘니, 로열 발레 스쿨 오디션에 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등 세세한 현실의 문제는 아웃포커싱(피사체의 심도를 낮춰 초점을 흐리게 하는 상태) 된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원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허락하든 그렇지 않든, 천재든 둔재든 추고 싶고, 춰야만 하는 것이다.

충동이라도 좋다, 하고 싶은 일을하자

 아들의 꿈을 결국 지원하는 빌리의 아버지

아들의 꿈을 결국 지원하는 빌리의 아버지 ⓒ UIP코리아


현실을 살아간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 끈적하게 달라붙어 쉬이 앞으로 못 나가게 하는 현실을 일일이 들여다보고 해결하려 할수록 오히려 수렁에 잠겨버린다. 이것저것 계산해보니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와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다, 너무 하고 싶다'는 내면의 충동적 에너지에 기댈 때 오히려 현실을 맞설 수 있다. 엘랑비탈, 베르그송이 말한 '삶의 충동'처럼 말이다.

살짝 왜곡해보면, 빌리는 서울대에 간 지역 균형 선발 수재 정도가 될지도 모른다. 요새 지균충이니 뭐니 하면서 대학 교내에서조차 서열을 나눈다는데 새롭게 놀랄 일은 아니다. 인간이 사는 곳, 인간이 입을 벌리는 순간엔 언젠고 서로의 높낮이를 재단하고 편을 가르지 않는가.

아저씨들은 경상도와 전라도로,  회사원들은 정규적과 비정규직으로. 가끔은 나도 그런 재단에 가담하고 가끔은 그런 재단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시시콜콜한 현실에 연연하며 맞서고자 할 때 내 삶은 더욱 무거워진다는 것이다. 그냥 쿨하게 아웃포커싱하자. 대신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에만 초점을 맞추자. 백조가 되어 힘있게 날아오르는 빌리처럼.

영화 빌리 엘리엇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