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베이징올림픽 유도 은메달리스트 출신인 유도스타 왕기춘이 운동 선수들의 체벌을 합리화하는 듯한 발언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있다.

왕기춘은 지난 30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말로 타이르고 주의를 주는 건 누구에게나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요즘 후배들? 행복한 줄 알아야 합니다. 이유 없이 폭력을 가했다면 안타깝지만,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죠"라고 주장했다. 왕기춘의 글은 유도부의 폭력적인 체벌문화를 비판하는 게시글에 반박하는 댓글을 올리는 과정에서 나왔다.

왕기춘은 여기서 "잘하면 칭찬 받고 못하거나 잘못하면 벌 받는 건 당연한 건데. 선배를 욕하기 전에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 보세요"라고 말했다. 왕기춘은 최초 게시글에 맞았다는 내용만 나와있고 자세한 전후사정이 나와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며, 체벌에 대한 비판을 '용인대에 대한 비하'로 규정했다.

하지만 이 내용이 알려진 직후 누리꾼들의 반응은 대체로 곱지 않다.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한 학원 폭력과 체벌문화에 대하여 문제인식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왕기춘의 시대착오적인 '폭력불감증' 때문이다.

 11일 베이징 과학기술대체육관에서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유도 73kg급 결승전에서 패한 왕기춘이 아제르바이젠 엘누르 맘마들리와 은메달, 금메달을 각각 목에 걸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유도 73kg급 결승전에서 패한 왕기춘이 아제르바이젠 엘누르 맘마들리와 은메달, 금메달을 각각 목에 걸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남소연

왕기춘의 주장은 바꿔말하면 '이유있는 폭력은 정당화된다'는 발상으로 요약된다. 대한민국 사회에 뿌리내린 모든 폭력적 악습과 군기 문화들은 나름의 전통 혹은 위계질서라는 '명분'으로 합리화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운동선수는 상명하복의 군인도, 폭력이 일상인 깡패도 아니다. 위계라는 이름으로 '맞을 짓을 했으면 사람을 때려도 된다'는 근거가 어느 규정에 나와있는가. 대체 어디까지가 '맞을 짓'인지,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것에 대한 판단기준을 선후배 사이라는 이유로 자의적으로 내려도 되는 권위를 누가 부여했는지 궁금하다.

왕기춘의 발언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섬뜩한 부분은 바로 한국 운동선수들에게 은연 중에 만연한 '폭력의 일상화'다. 잘못된 부조리나 차별도 일상적으로 익숙해지면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왕기춘은 '자신도 후배였던 시절 많이 맞아봤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부터 '운동선수니까 맞을수도 있다', '선배가 후배를 때릴 수도 있다'는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있다.

폭력을 겪어본 사람들의 대처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나도 겪었으니 똑같이 물려준다'는 발상과 '나부터는 그러지 말아야지'라는 발상이다. 애석하게도 왕기춘은 절대적으로 후자에 가깝다. 이등병 시절 괴롭힘을 당하던 군인이 고참되어 후임병들을 똑같이 괴롭히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똑같다. 직접 폭력을 행사하거나 동참하지 않아도 이에 동조하거나 묵인하는 이들이 있기에 부조리는 단절되지 못하고 계속 세습되는 법이다. 

문제는 왕기춘은 그냥 일반인이 아니라 한국 유도를 대표하는 아이콘과도 같은 선수라는 점이다. 후배들에게는 롤모델이 될 수 있는 선배다. 그런 선수조차 체벌과 폭력문화에 대하여 이토록 편항된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왕기춘같은 인물이 앞으로 지도자가 된다고 했을때 그 밑에서 배우는 선수들이 과연 폭력과 군기의 악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물론 왕기춘만 탓할 문제는 아닐 수 있다. 운동선수로서 자라나고 배워온 환경이 그러하다면 잘못된 가치관까지 학습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고 모든 체육인들이 왕기춘 같은 발상을 하는 것도 아니다.

프로야구 스타 출신인 정민태(현 롯데 투수코치)는 군대문화의 잔재가 아직 남아있던 1990년대 대학 운동가에 상습적으로 남아있던 구타문화를 근절하여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국축구의 아이콘 박지성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잦은 체벌 경험을 고백하며 '선배의 권위는 폭력이 아니라 실력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아직도 잘못된 폭력문화에 세뇌되어있는 왕기춘을 비롯한 한국 운동선수들과 지도자들이 되새겨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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