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 방송화면

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 방송화면 ⓒ KBS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도전(조재현 분)과 정몽주(임호 분)의 우정은 고금을 막론하고 보기 드문 형태의 두터움과 견고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환담하는 장면이 나올 때면 일곱 살 어린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과 마주하는 듯한 흐뭇함이 시청자들을 미소 짓게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정도전과 정몽주의 투샷에서는 견디기 힘든 고뇌와 슬픔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정도전이 정몽주에게 역성혁명의 꿈을 힘겹게 고백한 이후부터, 이 둘의 우정에는 금이 간 것처럼 보였다. 각자의 대의에 매몰된 괴물로 화(化)한 정도전과 정몽주가 날을 세워 서로를 비판할 때면, 감히 그 괴로움을 짐작해 보면서도 두 사람의 우정에 간 균열에 더욱 이목을 집중시켰었다.

극 중 이성계(유동근 분)는 "삼봉을 죽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정몽주를 "고려가 얼마나 대단하고 충심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40년 된 동무를 때려잡겠다는 것이냐"며 꾸짖는다. 이성계는 "40년 지기 삼봉과 포은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고 말하는 정몽주로부터 우정의 허무한 끝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사직을 수호하던 정몽주가 결국 선지교의 대나무가 되고 만 역사적 사실이 있기까지 그와 정도전의 우정에 금이 갔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드라마 <정도전> 속에서, 정도전과 정몽주의 우정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그 모습을 달리할 뿐이었다.

삼봉과 포은의 우정 1기
- 간담상조(肝膽相照, 서로 마음을 터놓고 친밀히 사귐)

"형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건 아니 되겠습니다. 예부터 뜻이 통하는 사람은 나이를 떠나 벗이 될 수 있다 하였습니다. 나는 그쪽과 만년지기를 맺고 싶은데 제 청을 받아주시겠습니까."
- <정도전> 1회 중

목은 이색(박지일 분)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유자(儒者)로 성장한 포은과 삼봉은 극과 극인 성격과 5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지기가 됐다. 한 번 마음먹은 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행시키는 외골수 정도전과 고려에 대한 충심을 기반으로 화합과 상생을 꿈꾸는 정몽주, 이 두 사람은 권문세족의 고려에서 신진사대부로서 고군분투했다.

정도전과 정몽주는 십 수 년간 고려의 집정대신으로서 전횡을 일삼던 이인임(박영규 분)의 축출을 도모한다는 공통의 목표 아래 뭉쳐 이전보다 더 '간담상조'하는 사이가 됐다. 정도전이 석고대죄를 하며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 할 때면 정몽주는 말없이 멍석을 펴고 그의 곁을 지켰고, 정몽주가 새로운 고려에 대해 패기 넘치는 열망을 드러낼 때 정도전도 이에 찬동하며 그와 마음을 나눴다.

또 명과의 화친을 성공시킨 정도전이 유독 그에게만 인색하던 스승 이색으로부터 "잘 싸워줬다"며 칭찬을 듣자 정몽주는 "내가 칭찬을 들은 것처럼 기쁘다. 모두 그 옛날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자네의 진면목을 본 것이다"라며 반색한다. 정도전 역시 "스승님과 동문들의 칭찬을 한 몸에 받는 자네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것이 대단하다"고 말하며 두 사람은 훈훈한 칭찬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결국 이인임에 의해 도당에서 숙청, 나주 귀양길에 오른 정도전은 더 이상 정몽주와 같은 꿈을 꾸지 않게 됐다. 고려의 가장 낮은 곳에서 허덕이는 민생을 피부로 접한 정도전은 귀족의 나라 고려를 부수는 것만이 미래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도전은 새 나라의 임금으로 이성계를 선택했고 쫓겨났던 도당에 복귀, 숙적 이인임에게 통쾌한 복수까지 해 낸다.

이 과정에서 정도전은 더 이상 정몽주에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게 됐다. 그러나 이는 정도전과 정몽주의 우정에 금이 갔음을 고하는 장치는 아니었다. 역성혁명을 결심한 정도전은 젊은 시절 정몽주와 새로운 고려에 대한 열망을 외치던 정자에서 다시 그와 마주했다. 이 자리에서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내가 꿈꾸는 새로운 나라의 문하시중이 자네였으면 한다"고 말한다.

이에 정몽주는 "자네가 문하시중을 하면 되는 것 아니냐"며 너털웃음을 지었지만, 정도전은 웃을 수만은 없었다. 정도전은 누구보다도 정몽주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장 친한 친구임에도 자신의 꿈을 에둘러 표현해야만 했다. 이는 정도전이 정몽주와의 우정을 지키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이인임의 몰락 이후 고려의 실세가 된 이성계에게 두 사람은 정반대의 주문을 한다. 정도전은 '입 구(口)'자 위에 '사람 인(人)'자를 포갠 뒤 "권문세가들의 가산으로 굶주린 백성들의 입에 먹을 것을 넣어준다면 민심이 대감을 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요구한 것은 '역사 사(史)', 새로운 나라였다.

반면 정몽주는 '가운데 중(中)'자 아래에 '마음 심(心)'을 더해 '충성 충(忠)'를 완성한 뒤 이성계에게 내밀었다. 이로서 정도전과 정몽주는 서로 다른 노선을 택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간담상조'하던 두 사람의 모습은 종언을 맞았다.

삼봉과 포은의 우정 2기
- 백아절현(伯牙絶絃, 자신을 알아주던 벗의 죽음을 슬퍼함)

"이보게 삼봉, 편히 가시게."
"건승을 비네."
- <정도전> 38회 중

 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 방송화면

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 방송화면 ⓒ KBS


정도전이 본격적으로 역성혁명의 대업을 고백한 후부터, 정몽주는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정도전의 '대업'이 정몽주에게는 '역심'이었던 탓이다. 그리고 정몽주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설명하려는 정도전을 막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될 것"이라 천명한다. 정몽주는 결국 이성계의 호의를 이용해 정도전을 사지로 몰아넣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정몽주가 끝의 끝까지도 40년 지기 정도전에 대한 자비를 베풀지 않았던 것은 오히려 그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정몽주는 정도전과 40년간 가장 가까운 사이였기에 그의 성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터다. 정몽주는, 아무리 난세였다지만, 자신의 벗이 500년을 이어온 나라를 무너뜨릴 결심을 했다는 것이 쉽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결코 뜻을 굽히지 않을 것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정몽주를 움직이게 한 것은 고려 사직에 대한 충절과 의리뿐만 아니라, 오랜 벗 정도전이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세상이 바뀌길 바랐지만, 변화를 이루는 방식에서 좁힐 수 없는 의견 차이를 발견한 뒤에는 지기를 향한 마지막 존중으로서 서로의 가장 강력한 맞수가 되는 길을 택한다. 정도전은 끝내 정몽주가 자신에게 설득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를 설득하려 했고, 정몽주는 정도전이 역성을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이를 반대했다. 그리고 이처럼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있던 두 마리의 괴물은, 그래서 너무나도 슬펐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부재를 틈타 공양왕으로부터 정도전을 참형에 처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어 정몽주는 옥에 갇혔던 정도전을 불러내 그와 마시는 마지막 술잔을 기울인다. 이 자리에서 정몽주는 "어찌하여 살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인가. 자넨 날 죽일 수 있었음에도 한사코 그리하지 않았었네. 사정을 봐주었으니 이제 나더러 온정을 베풀어달라고 졸라볼 수 있지 않은가"라며 언성을 높인다. 정도전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를 죽일 수밖에 없던 정몽주는 스스로 악역을 자처한 것이다.

정도전은 정몽주의 물음에 "나는 자네가 따라주는 이 술 한 잔이면 족하네. 고맙네"라고 답했다. 끝내 오열하고 마는 정몽주의 앞에서, 그를 새 나라의 문하시중으로 앉히기 위해 숱한 눈물을 뿌려댔던 정도전은 이상하게도 전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정몽주가 제거하려 했던 것은 40년 지기 삼봉이 아닌 그의 대의였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도전은 이처럼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후 이성계의 복귀로 전세가 역전, 정몽주는 이방원에게 살해된다. 정도전은 저자에 버려진 정몽주의 시신을 부여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부러 져주거나 어쭙잖은 타협으로 이도저도 아닌 결과를 낳는 것을 배제하고 끝까지 자신과 당당히 겨뤘던 정몽주에 대한 감정이 정도전의 피맺힌 절규로 터져 나올 때, 이는 마치 금 간 적 없던 그들의 우정을 기리는 의식과도 같아 보였다.

고맙다고 말할지언정 결코 미안하다고는 하지 않았던 정도전과 정몽주의 대결은 결국 정몽주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그길로 초야에 묻혀 살 것을 결심한다. 자신을 가장 잘 알아주는 사람이었고, 그 때문에 자신과 끝까지 맞수로 남아주었던 40년 지기 정몽주의 죽음이란 정도전에게 그의 인생 속 그 어느 사건보다 큰일이었을 것이다.

마치 중국 고사 속 거문고 장인 백아가 자신의 소리를 유일하게 알아주던 종자기의 죽음 이후 거문고 줄을 끊고 말았던 것처럼, 정도전도 자신의 정치 생명을 스스로 끊어냈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반대로 정도전이 먼저 형장의 이슬이 됐다 하더라도 정몽주 역시 '백아절현'의 심정으로 정치에서 물러났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절현' 이후 영원히 도당을 떠날 것만 같았던 정도전은 내팽개쳐두었던 거문고를 이내 다시 집어 들었다. 정몽주의 참혹한 시신을 끌어안고 울던 밤, 그의 손에 묻어있던 지기지우의 피가 다시 생각났기 때문이리라.

정도전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이렇게 물러설 요량이었다면, 누구의 피도 흘리게 해서는 안 됐다. 그렇게 정몽주의 대의까지 삼켜 더 거대해진 채로 돌아온 정도전이라는 괴물은 이성계의 손에 옥새를 쥐어주며 피로 물든 대업을 끝내 완수해냈음을 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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