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2005 동아시아컵 여자축구대회 한국과 일본의 경기에서 한국의 박은선이 일본의 이소자키 히로미의 태클을 제치고 있다.

대구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2005 동아시아컵 여자축구대회 한국과 일본의 경기에서 한국의 박은선이 일본의 이소자키 히로미의 태클을 제치고 있다. ⓒ 연합뉴스


여자축구 간판스타 박은선(서울시청)을 둘러싼 성별논란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축구계를 너머 성정체성과 인권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인 이슈로까지 확대되는 조짐이다.

최근 박은선의 소속팀 서울시청 서정호 감독을 제외한 WK리그 소속 6개 구단 감독들은 최근 비공개 간담회를 통해 한국여자축구연맹에 박은선의 리그 출전 자격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심지어 내년에도 박은선이 WK리그에 뛰면 나머지 6개구단이 리그 자체를 보이콧할 것을 검토하겠다는 보도가 나오며 여론이 들끓었다. 누리꾼들은 즉각 "인권침해"라고 주장하며 박은선을 보호하고 6개 구단 감독들의 징계를 요구하자는 청원을 올리자 짧은 시간에 수천 명이 동참할만큼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박은선의 굴곡 많았던 축구 인생

쟁점은 박은선의 여성성과 여자축구계의 집단 이기주의적인 태도에 쏠린다. 공식 프로필상 180cm, 76kg로 사실상 남자 못지않은 탄탄한 체구를 지닌 박은선은 중성적인 외모와 목소리까지 갖춰 이미 유망주 시절부터 성별 논란에 시달려온 바 있다.

박은선은 불과 16세이던 2003년 아시아 여자선수권을 통하여 성인대표팀에 합류했다. 이후 미국 여자 월드컵-2004년 아테네 올림픽과 세계여자청소년축구, 2005년 동아시아대회 등에서 연이어 태극마크를 달았다. 당시에도 박은선의 대회 출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박은선은 6일 자신의 SNS를 통하여 "당시 월드컵과 올림픽에도 성별검사를 받아가며 출전했는데, 어린 나이에 수치심을 느꼈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대한축구협회에도 박은선은 엄연히 여자 선수로 등록되어 있다. 당연히 여자축구 감독들은 물론이고 축구인들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내용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미 10년 가까이 별다른 말이 없다가 이제와서 굳이 새삼스레 성별 논란을 다시 들춰내는 의도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박은선은 그간 선수생활에 유난히 굴곡이 많았다. 부상과 개인사 등이 겹쳐 팀을 무단이탈하는 등 오랫동안 방황의 시간을 보내다가 지난해부터 마음을 다잡고 다시 축구계에 복귀했다. 지난 시즌에는 WK리그서 10골을 기록해 부활을 알린 박은선은 올해는 리그 22경기서 19골을 성공 시키는 맹활약과 함께 소속팀 서울시청을 챔피언결정전으로 이끌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별말이 없던 타 구단들이 박은선이 리그 판도를 뒤흔드는 '괴물'로 떠오르자 해묵은 성별논란을 들춰낸 것은, 성적지상주의를 의식한 꼼수라는 의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일부 감독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방식이 치졸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설사 사적인 자리에서의 의견이라고 해도 그것이 공론화가 되고, 한 선수의 축구 인생과 인권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수있는 사안이라면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했다. 확실한 근거도 없는 상황에서 개인의 성정체성을 거론하고 심지어 보이콧까지 운운한 것은, 축구를 떠나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 자체가 결여된 발상이었다.

뒷짐 진 축구협회와 여자축구연맹, 뭐하나

다만 일부 감독들의 이기주의로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다. 아쉬운 점은 언젠가 한 번쯤은 충분히 이런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상급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축구협회나 여자축구연맹에서 사전에 분명하게 입장을 정리해 주지 못하며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는 것이다.

사실 박은선의 성별논란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것은 지난 2010년 중국 여자아시안컵 때부터였다. 당시 중국 여자축구 대표팀의 상루이화 감독이 "박은선이 아시안컵에 참가할 경우, 아시아축구연맹(AFC)에 성별검사를 신청할 것"이라며 강하게 어필한 바 있다. 공교롭게도 박은선은 중국으로 출국하기 전날 대표팀에서 제외됐다. 표면적인 이유는 부상이었지만 당시 상황을 놓고 축구계에서 의견이 분분할 만큼 박은선의 대표팀 탈락은 미스터리였다.

일부 축구인들은 당시 선수차출권한을 가진 대한축구협회가 중국측의 반발에 부담을 느껴서 박은선을 일부러 제외한 게 아니냐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박은선의 불참으로 중국 측의 이의제기는 결국 흐지부지되었지만, 결과적으로 협회의 모호하고 불분명한 태도는 도리어 박은선의 성별 논란에 불씨를 남긴 꼴이 되고 말았다. 당시 대표팀 탈락 이후 박은선은 한동안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박은선은 올해 리그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이며 부활했지만 여자축구대표팀에서는 더 이상 부름을 받지 못했다. 8월 열린 동아시안컵에서도 박은선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윤덕여 여자대표팀 감독이 박은선을 소집하지 않은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박은선이 과거 대표팀을 이탈한 전력이 있기 때문에 재발탁에 신중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만일 박은선이 대표팀에 다시 승선하여 국제대회에 나갈 경우, 중국이나 다른 팀들이 또다시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

여자축구팀 감독들이 박은선에 대하여 의혹을 제시한 근거도 여기에 있다. 한 여자축구감독이 주장했다는, '대표팀에서 뛰지 못하는 선수가 국내에서 뛰는 것이 가능하냐'는 말은 그 자체로만 들으면 앞뒤가 맞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궤변처럼 들린다. 그것의 정확한 의미는 '국내에서 그 정도 독보적인 기량을 보이는 선수가 정작 대표팀에 차출되지 않는 것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만약 국제무대에서 정상적으로 출전할 수 없을 정도의 결격사유가 있다면, 국내에서도 똑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하지않느냐'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의 박은선이 나오지 않으려면...

물론 이것은 박은선의 잘못은 아니다.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기에 신중히 접근해야 하지만, 그럴수록 분명하고 단호한 대처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박은선 본인의 축구인생과 여자로서의 미래는 물론이고, 앞으로 언제든 나올 수 있는 '제 2의 박은선'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연맹과 협회가 분명한 선례를 남겨둬야 한다. 첫 번째는 박은선이 여자선수임을 협회와 연맹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보증할 수 있는 기준이다.

또한 성별 논란이 해결된다고 할지라도 우려가 남는 것은, 차후에 박은선에게 돌아갈 수 있는 '2차 피해'다. 이번 사태에서 보듯이 타구단들이 박은선에 대한 견제심리와 적대감을 드러낼 경우, 자칫 그라운드 내에서 어떤 불이익을 받을수있다는 우려가 팬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이번 사태에 관련된 6개 구단 감독들에 대한 일시적인 징계 여부를 넘어, 앞으로 누구든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부당한 차별이나 음해를 받지 않도록' 확실한 관련 규정을 만들어서라도 선수를 보호할 수 있는 구체적 장치를 마련하는 게 우선이다.

박은선도 비록 당장은 큰 상처가 되었겠지만, 차라리 이 기회가 그동안 꼬리표처럼 따라붙던 성별 논란에 마지막 종지부를 찍는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박은선 개인만이 아니라 남들의 시선에 따라 다름을 틀림으로 취급 받아야 하는 이들이 극복해야 할 과정이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목소리가 더 크냐가 아니라, 누가 더 진실을 가지고 있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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