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여자축구계에 '집단 린치' 수준의 일이 일어났다. 그것도, 여자축구 지도자들이 한 현역 선수를 대상으로 자행한 일이다. 최근 WK 리그에서 서울시청을 제외한 6개 구단 감독들이 박은선의 성별 문제를 제기하며 그녀의 내년 리그 출전을 금지시킬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만약 박은선이 출전을 할 경우 리그 자체를 보이콧하겠다는 입장이다.

지난 5일 한국여자축구연맹은 지난주 6개 팀 감독들로부터 이러한 내용을 통보받았다고 밝혀 뜨거운 논란이 일고 있다. 박은선은 180cm, 74kg의 건장한 체격을 자랑하는 선수로, 10년 전인 2003년부터 태극 마크를 달고 국제 축구 무대에서 뛰어왔다. 2005년에는 우리나라 선수로는 처음으로 국제축구연맹(FIFA)이 선정하는 '올해의 축구선수' 여자 부문 후보에 오르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잠잠하던 감독들이 이번 시즌이 끝난 후 일시에 박은선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과연 왜일까.

동업자 정신도, 선수 인권도 성적 앞에서는...

 대구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2005 동아시아컵 여자축구대회 한국과 일본의 경기에서 한국의 박은선이 일본의 이소자키 히로미의 태클을 제치고 있다.

대구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2005 동아시아컵 여자축구대회 한국과 일본의 경기에서 한국의 박은선이 일본의 이소자키 히로미의 태클을 제치고 있다. ⓒ 연합뉴스


올 시즌 박은선은 19골을 기록해 득점왕에 올랐다. 그녀가 소속된 서울시청은 WK 리그 출범 후 처음으로 챔피언 결정전까지 진출했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성공적으로 리그에 안착한 그녀는 사실상 이번 시즌의 '지배자'였다.

하지만 박은선의 건장한 체격과 뛰어난 체력 등은 계속해서 그녀를 성별 논란에 휩싸이게 했다. 박은선의 14년 은사인 서울시청 서정호 감독은 이번 시즌 언론에 박은선의 인터뷰를 자제해달라고 하는 등 일부러 그녀를 대중 앞에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박은선 지키기'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적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었다. 함께 여자축구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할 지도자들이, 서정호 감독과 박은선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올 시즌 그라운드를 지배했던 박은선의 경기력이 무서웠던 타 구단의 감독들이 집단으로 박은선을 꼭 집어 손가락질하며 "저 선수 빼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것도 어린 선수에게 심한 수치심을 안겨줄 수 있는 '성별 논란'을 이유로 말이다. 구단들은 여자 축구의 발전이라는 대의를 위해 협력하고,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는 관계가 되어야 마땅한데, 동업자 정신도 선수의 인권도 성적 앞에서 처참하게 내팽개쳐졌다.

이 모든 상황은 성적만을 생각하는 구단 이기주의와 선수 인권에 대한 인식 부족 등이 점철되어 벌어진 해프닝이다. 자기 팀의 성적을 위해서라면 지도자로서의 기본적 소양마저 팽개치고 결성된 '비열한 이기주의 카르텔'이다. 

다른 선수 부상 우려? 그렇게 선수를 위한다면...

이미 대한축구협회는 박은선을 여자선수로 분류했다. 축구계는 박은선을 여자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WK 리그 6개 구단은 그녀가 여자축구 리그에서 뛸 수 있는 선수가 아니라고, 쉽게 말해 여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2010년에는 아시안컵을 앞둔 상황에서 동일한 문제가 크게 부각되었던 적이 있다. 중국의 상루이화 감독이 박은선의 성별을 문제시해, 결국 박은선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다른 나라 감독도 아니고 실제적으로 한국 여자 축구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에게 정신적 린치를 당했다는 점에서, 박은선의 눈물 또한 더 진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이번 일로 선수가 받을 상처다. 실제로 박은선은 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월드컵 때 올림픽 때도 성별 검사 받아서 경기 출전했는데 그때도 어린 나이에 수치심을 느꼈다"며 "지금은 말할 수도 없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아고라 서명도 시작됐다. 한 누리꾼은 다음 아고라에 글을 올려 "여자축구 선수 박은선 선수의 외모가 '여자답지 않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 기량이 여자축구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이유로 6개 여자축구팀 감독들이 여자프로축구연맹에 박은선 선수의 퇴출을 요구했다"라며 "도대체 여자축구선수에 맞는 외모와 기량은 무엇이냐"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리고 "박은선 선수의 선수 생활은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에 맡겨야 하고, 반인권적이고 집단 이기주의적 행태를 보인 구단 감독들에게 축구협회 차원의 징계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논란은 결국 감독들이 '제 살 깎아먹는 짓'이다. 최근 국제 여자 축구 무대에서 선수들이 보여준 투혼과 감동의 드라마를 생각할 때, 이런 일로 여자 축구 자체가 저평가되고 있다는 것은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박은선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이미 동일한 문제로 마음 고생을 심하게 겪었고, 오랜 우여곡절 끝에 리그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선수에게 이렇게 '찍어내기'를 자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다른 여자 선수들보다 월등한 신체 조건으로 인해, 다른 선수들의 부상이 우려된다는 주장 또한 옹색하다. 그렇게 선수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여자 축구에 있어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대회의 살인적인 일정 등에 대해 지적할 일이다. 이번 '박은선 출전 금지 결의'에 참가한 여자 축구 지도자들의 반성과 각성이 필요한 때다. 여자 축구의 미래를 위해서, 하루 빨리 너절한 카르텔을 깨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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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축구 박은선 WK리그 서울시청 성별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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