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노라노>의 한 장면. 의상을 만들고 있는 노라노 여사

다큐멘터리 영화 <노라노>의 한 장면. 의상을 만들고 있는 노라노 여사 ⓒ 시네마달


17세에 결혼한 여자는 19세에 이혼했다. 사실 그의 결혼은 일제시대 위안부나 근로정신대 동원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진 것이었다.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일본 육사 출신 남편은 전쟁터로 나갔고, 홀로 고된 시집살이를 겪어야 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보상금을 의식한 듯 시부모는 그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그는 종전 후 어느 날 살아 돌아온 남편의 등장에 선택의 길을 맞이한다. 다시금 시댁으로 발걸음을 돌리지만 고된 시집살이를 감당하며 사느냐 아니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느냐의 갈림길에서 갈등한다.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 나오는 '노라'를 새 이름으로 정한 것은 그가 새로 선택한 삶의 상징이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며 한국이름 노명자는 미국식 이름 노라노라 바뀌었지만 이 선택은 개인을 넘어 한국 패션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순간이었다. 50년대 첫 패션쇼와 60년대 기성복, 70년대의 미니스커트 열풍까지 한국 패션사의 출발은 사실상 그의 이 같은 선택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난 달 31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노라노>는 제목 그대로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의 기본적인 줄기는 패션 인생 60년을 정리하는 전시회 준비 과정이지만 그 속에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의 삶과 철학 그리고 한국 패션의 흐름이 함께 정리돼 있다. 각종 자료화면과 함께 경쾌하면서도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영화는 이혼녀의 굴레를 헤쳐 나갔던 노라노의 모습과 함께 한국 현대사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옷은 예술품이 아니기에 편하고 자신감 가질 수 있어야" 

 다큐멘터리 영화 <노라노>의 한 장면. 노라노 여사와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씨가 전시회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노라노>의 한 장면. 노라노 여사와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씨가 전시회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다. ⓒ 시네마달


다큐멘터리 영화 <노라노>는 노라노의 패션 인생을 정리해 보겠다며 어느 날 불쑥 찾아온 스타일리스트가 출발점이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왔고, 여성복에 획기적인 전환을 마련하기도 했던, 그러나 그 의미를 기억하는 사람이 적어진 노라노에 대해 서은영이라는 스타일리스트는 제대로 조명하고 싶어 한다. 근현대사의 풍랑을 꿋꿋이 견디며 그 자리에 서 있던 한 여성의 삶을 되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본격적인 기획과 함께 세부적인 작업이 시작되지만 전시회의 성격과 방향을 놓고 스타일리스트와 나이든 패션 디자이너의 생각은 다른 부분이 많은 탓에 미묘한 갈등을 일으킨다. 수십 년 간 자신의 옷을 사랑해 주고 이를 통해 인연을 맺은 고객들에 대한 감사 사은 대잔치가 노라노 여사의 생각이었기에, 전시회의 방향이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젊은 사람들의 주장에 노라노 선생이 자신의 생각을 대부분 양보하지만 마뜩찮아 하는 모습은 영화 내내 이어진다. 전시회 주제로 정한 '라 비앙 로즈(La Vie En Rose. 장밋빛 인생)도 그리 내키지 않은 주제다. 지금껏 그가 살아온 인생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티격태격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고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노라노의 패션이 하나하나 조명된다. 56년 반도호텔에서 열린 국내 첫 패션쇼와 함께 60년대 맞춤복 시대를 접고 기성복 시대를 연 것은 노라노가 일궈낸 여성 패션의 획기적 변화였다. 이어진 70년대 윤복희로 상징되는 미니스커트 시대는 한 마디로 혁명과도 마찬가지였다. 노라노는 항상 그 중심에서 흐름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었다.  

패션의 선구자가 돼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데 앞장섰던 노라노의 삶은 여러 사람의 증언과 재연 장면을 통해 하나 하나 복원된다. 그가 정성들여 만들었던 옷은 단순한 의복이 아닌 시대상의 반영이었고, 대중과 소통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음을 확인시킨다.

지금도 팔순의 디자이너는 패션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패션은 예술이 아니다. 옷이 예술품이 아니기에 사람보다 먼저 걸어 나와서는 안 된다. 옷은 입는 사람이 편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패션을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을 착각이라고 말하는 노라노는 60년 동안 패션 일을 해 온 스스로를 노동자이자 장인이고 기술자라 생각할 뿐이다. "옷을 통해 여성들이 자존감을 갖게끔 노력했다"는 대중적인 철학이 혁신적인 변화를 추구했던 그의 옷에 그대로 반영돼 있었던 것이다.  

'미니스커트를 입으면 민족 반역자'
 배우 조민수가 재능기부한 다큐멘터리 영화 <노라노> 포스터

배우 조민수가 재능기부한 다큐멘터리 영화 <노라노> 포스터 ⓒ 시네마달


<노라노>는 패션을 중심에 둔 다큐멘터리지만 그 안에 한국의 근현대사가 담기면서 고전적인 역사 다큐의 성격도 띠고 있다. 시대적 분위기와 사회적 환경이 풍부한 자료 화면과 함께 펼쳐진다. 일부 장면은 배우들의 재연을 통해 사실성 있게 그려지기도 한다.

그 속에서 영화는 노라노라는 패션 디자이너와 함께 여성의 의복과 이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 등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관찰한다. 정형화된 한복 대신 편한 활동을 보장하는 생활복을 만들어 낸 것과 고급 맞춤복에서 저가형 기성복 시대를 연 것은 여성의 삶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온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당시 커다란 유행을 일으켰던 펄시스터즈의 나팔바지와 윤복희의 미니스커트는 시대를 앞서간 패션임과 동시에 만만찮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다. 현재의 중년 여성들이 당시를 회상하며 환상적이었고 한번 입어보고 싶은 옷이었다고 찬사를 보내지만 이를 비판적으로 질시했던 사회 분위기는 여성들에 대한 억압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미니스커트를 입는 것은 민족반역자'라고 지칭하며 온갖 비난을 퍼부어 대던 당시 언론의 모습은 대표적이다. 노라노의 패션이 사회에 끼친 영향을 짐작케 하면서 여성의 노출을 대하던 당시의 보수적 정서를 알려준다. 그런 시대와 긴장하며 살아온 노라노의 패션에는 여성해방적 의식이 깔려 있음을 영화는 전해주고 있다. 여성들의 허리를 꽉 조이던 코르셋에서 해방시킨 코코 샤넬처럼 노라노 역시 옷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일궈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영화 <노라노>가 성공한 패션 디자이너의 삶에 대한 일방적 찬사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여성으로서의 겪어야 했던 험난한 삶과 함께 시대의 풍파를 헤치고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통해 잊혀 가고 있는 기억들을 상기시켜 준다. 근현대사 속 여성들의 모습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역사를 재조명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선택"

 다큐멘터리 영화 <노라노>의 한 장면. 배우 공효진과 함께 촬영한 사진을 확인해 보고 있는 노라노 여사

다큐멘터리 영화 <노라노>의 한 장면. 배우 공효진과 함께 촬영한 사진을 확인해 보고 있는 노라노 여사 ⓒ 시네마달


<노라노>는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현장을 기록하는 기존 다큐멘터리의 흐름에서 일부분 벗어나 있는 영화다. 적극적인 연출을 통해 옛 이야기를 재연했기 때문에 기존의 다큐 작법과는 차이를 보인다. 물론 이 때문에 다큐진영 내부에 이견도 있었지만 다큐멘터리의 이야기 구조를 강화시키며 전달력을 높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어 보인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노라노 선생이 취조당하는 과정은 배우 서영주를 통해 도도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으로 재연했다. 취조하는 형사들을 향해 담배에 불을 붙여 달라고 요구하는 장면에는 험난한 시대에 굴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버텨온 한 여성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나오는 사람들의 면면이 화려한 것도 이 영화의 볼거리다.  50~60년대 한국영화를 주름잡던 최은희, 엄앵란, 최지희 등 배우들이 등장하고, 공효진, 장윤주 등 스타들이 화보 촬영에 나서는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과거와 현재의 대비를 통해 왕년 스타들이 전성기 시절을 보는 것도 <노라노>가 안겨주는 특별한 재미다. 최은희씨가 왜 당대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여배우였는지는 자료화면에 등장한 50~60년대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작품을 연출한 김성희 감독은 "노라노라는 인물을 통해서 여성의 역사를 재조명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노라노>를 시작했다"면서 "노라노 선생은 지금까지 살아 온 인생과 우리의 지난 시대 그 역사와 문화를 담아내기 좋은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노라노>를 만든 김성희 감독과 노라노 여사

다큐멘터리 영화 <노라노>를 만든 김성희 감독과 노라노 여사 ⓒ 시네마달


<노라노>는 지난해 <두 개의 문>으로 용산 참사의 진실에 접근하며 다큐멘터리의 역할에 새로운 지평을 연 '연분홍치마'의 작품이기도 하다. 2010년 부산영화제 다큐멘터리 경쟁 대상 수상작이었던 <종로의 기적>과 흥행 홈런을 날린 <두 개의 문>으로 주목받은 '연분홍치마'는 <3×FTM> <레즈비언 정치도전기> 등 성적소수자들을 위한 작품과 함께 여성주의 문화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5명의 감독이 공동 작업을 해 기존 다큐멘터리 작법의 틀에서 벗어난 <노라노>는 다큐멘터리 진영에 연분홍치마 전성시대가 도래했음을 확인시켜 주는 작품이다. 지난 5월 여성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며 큰 화제를 모았던 <노라노>는 국내 개봉에 이어 오는 11월 20일부터는 '다큐멘터리 영화제의 칸'으로 불리는 암스테르담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돼 해외 관객들과도 만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10월 31일 개봉. KT&G 상상마당 시네마(디지털), 필름포럼(디지털) 상영중.
노라노 다큐멘터리 패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