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슬>의 한 장면

영화 <지슬>의 한 장면 ⓒ 자파리필름


영화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 보셨나요? 관객동원 10만명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지난 14일 막 내린 '제32회 이스탄불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언급상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지난해에 열린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 4개 부문 수상을 시작으로 '제29회 선댄스영화제' 극영화부분 심사위원상, '제19회 브졸아시아국제영화제' 황금수레바퀴상에 이어 네 번째 국제영화제 수상이 되겠군요. '당신과 나의 뜨거운 감자'라는 문구처럼 <지슬>은 현 한국 영화계의 가장 '뜨거운 감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얼마 전, 전 아주 특별한 계기로 <지슬>을 봤습니다. '<지슬> 보러 가자'는 선배의 말에 따라 나섰는데 선배가 영화관 앞에서 불쑥 영화티켓을 내밀더군요. 이미례 감독이 주는 티켓이라는 말과 함께요.

알고 보니 이날 제 손에 들어온 티켓은 이미례 감독이 구매한 100석의 단체티켓 중 한 장이었습니다. 선배로부터 전해 들은 바로는 이미례 감독이 VIP시사회를 통해 <지슬>을 관람했는데 이런 영화는 꼭 응원해주고 싶다면서 그 일환으로 단체티켓을 구매해 지인들에게 나눠준 것이었습니다.

후배 영화인을 응원하는 진심이 담긴 참으로 특별한 티켓 한 장을 들고 극장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눈과 마음을 빼앗은 수려한 영상

영화 <지슬>에게 심사위원 대상을 안겨준 선댄스영화제의 심사평은 "깊이 있는 서사와 더불어 시적인 이미지까지, '지슬'은 우리 모두를 강렬하게 사로잡을 만큼 매혹적이었다"였습니다. 물론 개봉 이후 국내 평단은 물론이고 이 영화를 본 주위 사람 모두 호평일색이었습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했지요. 이어지는 찬사의 실체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극장 안의 불이 꺼지고 흑백의 화면이 펼쳐졌습니다.

구름 가득한 하늘 위에서 제주의 땅 위로, 카메라의 시선이 내리 꽂힙니다. 시작부터 긴 호흡의 롱테이크와 심도 깊은 딥 포커스. 오랜만에 보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화면입니다. 아마 저처럼 선댄스의 심사위원들도 첫 장면부터 눈과 마음을 빼앗겼으리라 생각합니다.

'4·3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지슬>은 뛰어난 영상미학으로 이루어진 영화입니다. 스토리는 화면을 위해 존재하는 얼개일 뿐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장면, 장면이 마치 잘 그린 그림, 잘 찍은 흑백사진 같습니다.

어떤 장면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과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표절이나 모방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뛰어난 예술은 일맥상통한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네덜란드라는 나라가 있죠. 지금은 잘 먹고 잘 사는 나라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척박한 자연환경, 열악한 지형 조건으로 '먹고 살기' 힘든 나라였죠. 그런 면에서 제주와 닮았습니다.

 영화 <지슬>의 한 장면

영화 <지슬>의 한 장면 ⓒ 자파리필름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고흐가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이라는 그림이 있어요. 영화 <지슬>의 동굴에서 감자 먹는 장면과 오버랩되는 면이 있습니다. 그림 속 사람들 역시 먹고 사는 데 어려움이 많았던 민중이죠. 깡마르고 주름투성이의 농부들. 감자를 먹고 있는 깡마르고 주름투성이의 농부들 한쪽 옆에는 커피를 따르는 여인이 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커피는 귀족이나 마실 수 있는 아주 귀한 기호품이었습니다. 고흐는 그림 속에 가난한 민중에게 커피 한 잔을 대접하고 싶다는 배려의 마음을 담았던 것이죠.

영화 속 장면에서도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늙은 어머니를 모시러 간 무동이 죽은 어머니의 품속에서 가져온 감자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장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합니다만 죽음 앞에서도 자식을 생각한 어머니의 무한 사랑,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하는 이타심에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보게해준 장면이었습니다. 고흐 역시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그 무언가를 위해 유용하고 뜻있는 역할을 해낼 수 없는가?"라고 썼다고 하니 말이죠.

오멸 감독은 이 영화를 '4·3사건' 희생자를 위한 진혼곡이라고 표현했었죠. 그래서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모티브 중 하나가 '제사'이기도 했습니다. 신위-신묘-음복-소지로 이어지는 제사의 형식을 빌린 이 영화는 마룻바닥에 어지럽게 놓여 있는 제기를 보여주며 시작하는데요. 이 장면에서 떠오르는 그림이 있었어요. 공교롭게도 또 네덜란드 화가인데요. 베르나르 베르카이드라는 화가의 작품이었습니다. 20세기 마술적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인데요. 실사 같은 그림이 기가 막힙니다. 영화 속 흑백화면처럼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둡지만 빛에 의한 명암 대비가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그림입니다.

다시 꺼내 읽는 현기영의 <순이삼촌>

 현기영 소설집 <순이삼촌> 겉그림

현기영 소설집 <순이삼촌> 겉그림 ⓒ 창작과비평사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관객과의 대화에서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언급한 적이 있었죠. <지슬>의 내용과 드라마틱하게 맞아 떨어져서 많은 사람이 인용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소설 <순이삼촌> 중 해당 원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 밭이서 죽은 사름들이 몽창몽창 썩어 거름되연 이듬해엔 감저 농사는 참 잘 되어서. 감저가 목침 덩어리만큼씩 큼직큼직해시니까."
"그 핸 숭년이라, 보릿겨범벅 먹던 때랐지만 그 아지망네 밭에서 난 감저는 사름 죽은 밭엣 거라고 사름들이 사 먹질 안했쥬." - 현기영 <순이삼촌>

그런데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감저'는 실은 고구마의 제주방언입니다. 하지만 당시 제주의 감자밭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있었으리라 추정해 봅니다.

영화 <지슬>을 보고 '4·3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신 분이라면 현기영의 <순이삼촌>도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영화에 제주방언에 대한 자막이 나왔던 것처럼 꼭 주석이 달린 책으로 보시길. 안그럼 '감저'를 '감자'로 알아먹게 됩니다.

덧붙여 '4·3사건'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됐으며, 그들의 죽음이 현재까지도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잘 묘사된 소설 속 한 부분을 첨부하며 글을 맺겠습니다.

"음력 섣달 열여드렛 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5백 위도 넘는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 현기영 <순이삼촌>

덧붙이는 글 <지슬원정대>라는 제주생태평화여행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여행전문사회적 기업인 '제주생태관광'과 '지슬'의 제작사인 '자파리필름'에서 주관, 진행하는 프로그램인데요. 영화 촬영지와 '4.3사건' 관련 지역, 그리고 제주의 생태와 평화섬 제주를 느껴볼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역 주민이 운영하는 숙소에 머물며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로 만든 식사를 하는 '착한 여행'입니다. http://storyjej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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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차 영상번역작가. 인터뷰를 번역하는 것도 쓰는 것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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