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 줄거리가 들어있습니다.

영화 <아버지의 이메일>  영화 속 주인공 아버지...

▲ 영화 <아버지의 이메일> 영화 속 주인공 아버지... ⓒ 홍재희


평생 술독에 빠져 살아온 아버지. 아내와도 아이들과도 제대로 된 대화란 없었다. 늘 술에 취해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친척이나 주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봐도 마찬가지다. 친구도 없었고, 무표정에 대인기피증이었다고들 말한다.

두 평 방안에서 10년 동안 칩거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남긴 것은 둘째딸에게 보낸 이메일 43통과 가방 두 개. 영화를 만드는 둘째딸은 이 메일을 바탕으로 아버지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어머니와 누이들을 놔두고 고향 황해도에서 월남한 아버지는 남쪽에 와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 돈을 벌기 위해 베트남에도 가고 중동에도 간다. 그러나 귀국하고 나면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방황하게 되고 그 결과는 늘 술이다.

술과 폭력이 지긋지긋했던 식구들에게 아버지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존재다. 영화는 아버지의 사진, 이메일을 바탕으로 찍은 영상, 그런 남편과 평생 살아야했던 어머니와 일찌감치 미국으로 떠나버린 큰딸(언니), 하나 밖에 없는 아들(남동생), 친척들의 인터뷰로 짜여져있다.

이메일은, 말하자면 아버지의 자서전 같은 것이어서 살아온 인생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리고 남겨진 가방 하나에는 고등학교 졸업장과 각종 자격증, 자격증에 붙이기 위해 찍었을 시기가 각기 다른 여러 장의 증명사진이 들어있다. 또 다른 가방에는 88년 서울올림픽 자원봉사활동 기념품이 가득 들어있다. 아버지가 애지중지했던 것들이다. 가족은 아버지 가슴 속 어디 쯤에 들어있었을까.   

술에 의지했던 아버지에게 숨겨진 비밀

늘 외국으로 나가 넓은 세상에서 살고 싶어 했던 아버지. 그러나 마음대로 안 풀리는 현실에 실망해 술 속으로 도피해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두른, 정말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포기할 때 쯤 6.25 전쟁 때 행방불명된 두 처남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외국으로 갈 수 없었던 사정이 밝혀진다.

영리한 감독은 처음부터 이런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았다. 6.25 전쟁, 실향과 이산가족, 베트남, 중동. 아버지가 겪은 모든 것은 그대로 우리 현대사다. 거기에 유일한 재산인 서울 금호동의 집은 재개발될 예정이다. 역사라고 하면 나와 무관할 것 같지만 결국 그 역사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무겁게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감독은 아버지와 가족 사이의 이해와 용서, 화해를 도모하고 싶었던 듯하다. 물론 뜻한 만큼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남동생은 '이해'를 이야기하고, 77세 어머니는 남편 제사상 앞에 엎드려 운다. 아버지의 사과는 감독의 말대로 너무 늦게 당도한 듯하지만, 지금이라도 당도한 것에 안도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이메일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제와서 용서를 빈다. 별 볼일 없는 아버지가"

영화 <아버지의 이메일>의 한 장면  영화 속 아버지의 뒷모습

▲ 영화 <아버지의 이메일>의 한 장면 영화 속 아버지의 뒷모습 ⓒ 홍재희


지난 26일, 영화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무슨 사정인지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해서, 안정숙 프로그래머(인디다큐페스티발 2013)의 사회로 '관객끼리의 대화' 시간을 가졌는데 예상 밖의 공감과 눈물이 있었다.

아, 초면의 관객들도 이렇게 속마음을 내놓고 나눌 수 있구나. 함께 보고 싶은 영화의 발견에 이은 또 하나의 발견이었다. 기억나는 대로 관객들의 이야기를 옮긴다.

"도전과 좌절의 연속을 술로 풀어온 아버지의 삶은 분단과 굴곡의 현대사를 관통해 온 것이다. 6.25, 베트남, 중동, 마지막에는 재개발까지. 삶의 이면을 보며 아픔을 느꼈다." (남, 대학생)

"한국사의 무게가 만만찮다는 생각을 하며 목이 메었다. 한 사람의 나약함과 강함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가 우리 일상을 좌지우지한다는 생각을 했다. 감독과 다른 가족들은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으려 노력하는데, 큰딸은 어떤지 궁금하다." (이혜경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

"영화를 보며 많이 울었다. 화가 났다. 내 아버지와 너무도 똑같다. 술과 폭력. 때려도 이가 갈리도록 때렸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를 버렸다. 연락 끊고 살았는데 3년 전 세상 떠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유산은 일기장 한 권, 그런 걸 남긴 것도 화가 났다. 감독은 영화를 위해 화해와 용서로 억지로 끌고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불편하고 부담을 느꼈다. 용서가 안 되는 폭력이 있다! 영화감독을 꼭 만나고 싶다." (여, 영화 <콩가루 모녀>의 주인공 '오해리'의 엄마라고 자신을 소개함) 

덧붙이는 글 다큐멘터리 영화 <아버지의 이메일 Father's E-mail (2012)> (감독 : 홍재희)
* 인디다큐페스티발 2013 상영작
아버지의 이메일 아버지 가족 역사 홍재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