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의 기대를 모아온 박찬욱의 신작, <스토커>가 드디어 지난 28일 공개됐습니다. 여느 박찬욱 영화처럼, 반응은 다양합니다. 열광하는 이들도 있고, 혐오하는 이들도 있고, 혐오하면서 열광하는 이들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지요. 히치콕의 영화<의혹의 그림자>와 일일이 비교, 대조해가며 영화의 영화사적인 의의를 읽어내려 애쓰는 이들도 있고, '영화 내내 인상적이었던 건 니콜 키드먼의 등 근육 뿐. '이라는 이들도 있습니다.

비평가로서, 저는 박찬욱의 신작이 나올 때 마다 일어나는 이 난리통이 무척이나 즐겁습니다. 전 박찬욱의 작품을 좋아하고 그를 존경하지만, 그건 그가 만장일치의 호평을 받는 감독이어서가 아닙니다. 찬사 만큼이나 비난도 큰, 논쟁적인 예술가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비난 여론이 있어야 '비평 논쟁'이 가능함을 알기에, 박찬욱을 사랑하는 이들 만큼이나 그의 영화를 경계하는 이들도 존중합니다.

다만, 소위 '일반 관객'으로 불리는 이들 중, 박찬욱의 영화를 '어려운 영화'라 이르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 가운데에는, '박찬욱 영화 좋다는 사람들의 취향은 다 허세다'라는 식의 과격한 의견을 내놓는 분들도 있지요. 감독의 전작<박쥐>때에도 그런 관객들이 있었고, 당시에 저는 취향에 대한 그런 식의 공격은 폭력이나 다름없다는 글을 오마이뉴스에 써 올리기도 했습니다. (2009년 5월 4일, '박쥐 좋아하면 허세?그건 폭력이다')

물론 모든 관객이 평론가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영화는 그냥 재밌으면 그만이지'하는 생각에도 분명한 논리가 있고, 실제 영화 시장은 바로 그런 관객들의 지갑에 의해 움직이지요. 다만 안타까웠습니다. '계속 꿍짝이 맞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왜 죽인거야?''왜 갑자기 말도 없이 둘이 피아노만 쳐?''니콜 키드만은 왜 계속 시간을 몰라?'하는 제 주위의 <스토커>관객들을 보며, '영화의 재미를 반도 못 가져가는구나'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 이번 만큼은, 이 영화의 숨은 재미들을 감히 '알려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본인 스스로가 영화평론가이기도 했던 박찬욱의 작품은 비평적으로 볼때 그 재미가 훨씬 커지거든요. 이미 영화를 본 관객분들을 위한 글인 만큼, 영화의 중요한 장면과 결말이 글에 노출됨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디아와 찰리, 그 복잡한 관계

영화의 도입부부터 다시 한 번 짚어보겠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열여덟 살 소녀'인디아'입니다. 소녀는 자신의 생일에, 자신과 사이가 좋았던 아버지를 의문의 사고로 잃었습니다. 그리곤 장례식장에서 평생 존재조차 몰랐던 아버지의 동생, '찰리'를 만나죠. 난생 처음 삼촌의 존재를 알게된 인디아는 그를 경계합니다. 사이가 좋지 않은 자신의 어머니(이블링)와 관계가 심상찮아보이는데다, 이유없는 친절까지 베푸니 거슬릴 수 밖에요. 하여 인디아는 멋대로 집에 눌러앉은 그와 기싸움을 합니다. 비가 올테니 우산을 가져가라는 그의 말을 무시하곤 비에 흠뻑 젖어 귀가하기도 하고, 집까지 차로 바래다주려는 그의 친절을 외면하고 걸어서 집에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이들의 기싸움을 남자 형제들의 '위계 다툼'을 묘사하듯 그려냅니다.

하지만 이들은 다투면서도 통합니다. 찰리가 해 준 음식을 인디아가 깨끗이 먹어치우는 장면을 보세요. 찰리는'내가 해 준 음식을 깨끗이 핥아서 다 먹었다'는 말을 하며 인디아와의 위계 다툼에서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려는 대사를 합니다. 그러나 인디아는 분노하거나 더 큰 다툼을 이어가는 대신, 그가 권하는 식후 포도주를 묵묵히 받아 마십니다. 뿐만 아니죠. 인디아는 동급생들한테 벙어리 소리를 들을 만큼 말이 없는 소녀이지만, 찰리와는 적잖은 분량의 대사를 주고받습니다. 신경전 속에서도 죽이 맞는 둘, 비록 인디아는 여자, 찰리는 남자이고 이들의 관계는 조카와 삼촌의 관계이지만, 경쟁과 협동이 시시각각 들어서는 이 관계의 모양새는 사실상 '형제'(그것도 남자 형제)의 것입니다. 그리고 인디아 스토커와 찰리 스토커, 이 둘 간의 본능적인 협동심은, 광기의 영역까지 고스란히 이어지죠.

그러나 이들은'이성'관계입니다. 남자 형제지간에나 가능한 종류의 관계를 형성하면서도 남자와 여자로서 서로 성적인 긴장을 만들어내지요. 특히 인디아는 이제 갓 열 여덟 살이 된 소녀입니다. 찰리는 소녀가 태어난 해인 1994년에 수확된 포도로 빚은 와인을 마시며, '더 어리면 영글지도 못해 풋내가 난다'는 대사를 합니다. 이는 역으로 인디아가 영글어 성인이 됐음을 의미하고, 나아가 그 나이가 갖는 성적인 상징에 자신이 주목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영화는 인디아 뿐만 아니라 찰리 역시 강렬한 성적 매력을 가진 인물로 묘사합니다. 인디아의 어머니는 그의 '젊음'에 매료되고, 인디아의 여자 동급생들은 비싼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는 그를 향해 환호합니다. 그리고, 1994년에 태어나 갓 영근 소녀와 '젊은 남자', 이 둘의 관계엔 성적인 긴장이 흐릅니다.

문제는 이들의 관계가'근친'이라는 데 있습니다. 찰리는 인디아의 아버지가 아닌 삼촌이지만, 아버지를 매개로 만난 관계인 탓에 두 인물이 빚는 성적인 긴장은 금기의 영역을 아슬아슬하게 스칩니다. 게다가 인디아 이전에 인디아의 어머니와 찰리의 관계가 깊었던 탓에, 이들의 관계는 근친상간적인 삼각관계로 확장되지요. (인디아의 어머니, 이블린이 찰리와의 입맞춤 직전에 그에게 하는 대사, '당신이 누구이든 상관없어요'는 근친상간적인 긴장을 극으로 끌어올리는 대사입니다)

인디아 스토커와 찰리 스토커, 두 '스토커'의 괴이한 피아노 협주

결국 찰리와 인디아의 관계는, '위계 다툼을 하는 형제의 관계'이자, '피를 속일 수 없는 형제의 관계'이고, '성적인 매력이 짙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이며, '근친상간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이 복잡하고 미묘한 긴장은, 찰리와 인디아가 함께 피아노를 치는 장면에서 최고조에 이르지요. 네, 찰리와 인디아가 한 의자에 앉은 채 서로를 밀어낼 듯 경쟁적으로 자신의 음을 연주하는 가운데, 그 음과 음의 충돌이 하나의 조화로운 협주로 수렴되는 바로 그 장면 말입니다.

 찰리와 인디아가 함께 피아노를 치는 장면

찰리와 인디아가 함께 피아노를 치는 장면 ⓒ 폭스서치라이트


영화의 첫 장면인 장례식 장면 직후, 찰리와 인디아는 마치 형제처럼 계속 경쟁하고, 찰리와 이블린의 성적 긴장은 점점 짙어집니다. 가끔 의외의 장소에서 죽이 맞는 찰리와 인디아의 모습이 나오기도 하고, 묵묵히 집을 지키던 가정부가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조용하지요. 바로 그 때 등장한 인물이 인디아의 고모할머니, '진'입니다. 찰리에 대해 뭔가를 아는 것이 분명한 그녀는 이블린에게 말을 전하려하지만, 이블린은'참견하지 말라'며 '진'을 집에서 내쫓아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찰리는, 그런 자신의 할머니, '진'을 쫓아가 허리띠로 목을 졸라 살해하지요. 영화는 여기에, 찰리의 심부름으로 지하 냉동고에 내려갔다가 사라졌던 가정부의 시신을 목격하는 인디아의 모습을 교차해 보여줍니다.

문제의 '피아노 장면'은, 찰리가 진 할머니를 살해하고, 인디아가 가정부의 사체를 발견하는 장면에 바로 이어서 등장을 합니다. 분명, 살인 장면 다음에 피아노 장면은 좀 괴상합니다. '첫 번째 살인 장면'이라는, 극의 흐름상 대단히 중요한 장면을 마친 후에 나오기엔 이전 장면과의 충돌이 너무 심하죠. 그러나 우리는 이 충돌이 의도된 것임에 주목해야 합니다. 살인 장면에 과감히 따라붙은 삼촌과 조카의 피아노 장면에서, 찰리는 피아노에 홀로 앉아 잔잔한 음을 연주하던 인디아의 옆에 앉아 '어두운 화음'을 넣기 시작합니다. (마치 그의 존재 사실 자체를 몰랐던 것처럼)자신의 삼촌이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사실을 몰랐던 인디아는 당황하지만, 자연스레 그의 화음에 응답하기 시작하죠. 기어이 찰리는 인디아를 힘주어 밀어내고, 두 남녀는 한 의자에 위태롭게 걸쳐앉아 경쟁적으로 건반을 눌러대기 시작합니다. 마치 형제간의 경쟁처럼 말이죠. 그러나 서로가 서로의 음을 내려 밀고 버티며 다투는 동안, 이들의 '건반 싸움'은 하나의 협주곡이 됩니다. 형제간의 협동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찰리의 음과 자신의 음의 조화에 조금씩 취해가던 인디아는 곡의 흐름이 절정에 이르자 교성과 신음을 내며 전율합니다. 네, '왜 갑자기 대사도 없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이 나오지?'하신 분들이 계실텐데요. 그 거칠고 갑작스러운 장면이, '찰리 스토커'와 '인디아 스토커'의 관계를 다룬, 영화 <스토커>의 전부였던 겁니다.

이후 영화는 속도를 내기 시작합니다. 도입부부터 피아노 장면에 이르는 영화의 전반부가 인디아 스토커와 찰리 스토커의 '관계 묘사'에 치중하고 있다면, 영화의 후반부는 찰리가 벌이는 폭력의 미학에 침전해 기어이 광기의 꽃을 피워내고 마는 인디아 스토커의 묘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가정부의 사체를 목격한 후 '묘한 감정'을 느꼈던 인디아는, 자신을 괴롭히던 학교 학생을 날선 연필로 찌르는 것을 시작으로 타인을 향한 폭력의 수위를 점차 높여갑니다. 그리곤 그 모든 상황의 뒤엔 그것을 지켜보는 찰리 삼촌이 있습니다. 인디아는 마치 사냥을 하듯 자신의 동급생 '윕'을 숲으로 유인한 후 입술을 물어뜯기도 합니다. 공격을 받은 윕은 인디아를 때리곤 그녀를 겁탈하려 하지만, 곧 상황을'지켜보던'찰리가 등장해 인디아를 구하고, 그녀를 해치려던 윕을 살해하지요. 놀라운 것은, 살인을 목격한 인디아의 반응입니다. 그녀는 범죄 현장에서 도망치는 대신, 고통에 몸부림치다 목이 꺾이는 윕의 모습에서 성적인 쾌감을 느낍니다. 찰리가 일깨운 스토커 가문의 광기에 인디아가 조금씩 젖어들기 시작한겁니다.

그런데, 과연 이유가 뭘까요?찰리는 왜 인디아에게 접근해, 인디아에게 광기를 가르치는 것일까요?예고편에도 등장한 인디아의 대사, what do you want from me?(저한테 원하는 게 뭐죠?)에 대한 찰리의 진짜 대답은 과연 무엇일까요?

왜 사람들은 자식을 낳을까?

'교육'이란 낱말의 정의를, '이전 세대의 기질을 후세에 이식하는 것'이라 이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찰리는 인디아에게 광기를 교육시키죠. 인디아가 실종된 가정부의 사체를 발견하는 장면을 상기해보시기 바랍니다. 찰리는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와서는, 아이스크림을 냉동고에 넣는 일을 굳이 인디아에게 시킵니다. 자신이 살해한 가정부의 사체가 들어있는 바로 그 냉동고 말이죠. 인디아로 하여금, 사체 유기 현장을 '목격하도록'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인디아가 광기를 확장시켜가는 모든, 그러니까 가정부의 사체를 목격한 충격을 계기로 날선 연필로 동급생의 손바닥을 찌르고, 마치 사냥하듯 자신의 동급생을 숲으로 유인해 공격하는 그 모든 상황의 뒤엔 그것을 지켜보는 찰리가 있습니다. 애초에 찰리가 인디아의 어머니에게 접근한 것도, 인디아의 일탈을 유도하기 위함이죠.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고 유독 아버지만 따랐던 인디아에게, 삼촌과 어머니의 육체적 접촉은 엄청난 충격이었을겁니다. 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이블린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곤 인디아로 하여금 자신과 이블린의 입맞춤을 보게 하지요. 인디아가 윕을 '사냥'하는 것은, 어머니와 삼촌의 충격적인 입맞춤 장면을 목격한 바로 그 다음이었습니다.

왜일까요?찰리는 인디아에게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요?사실, 이 질문은 영화에 직접적으로 등장을 합니다. 인디아는 찰리에게 묻죠. '저한테 원하는 게 뭐죠?'이에 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to be friend. (친구 되기. )'그러나 찰리의 진짜 대답은, 사실 연이은 인디아의 대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we don't have to be friends. we are family. (친구가 될 필요 없어요. 우린 가족이니까. '

그렇습니다. 찰리 스토커는 인디아 스토커를 자신의 가족, 그러니까'자식'으로 만들고 싶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블린의 대사를 통해 알 수 있죠. '사람들은 왜 자식을 낳는 걸까, 고민해본 내 대답은, 자신의 삶이 뭔가 손 쓸 수 없을만큼 망가진 걸 깨달은 순간, 모든 과거를 지우고 날 닮은 누군가가 다시 한 번 잘 해 내주길 바란다는 거야. '비록 뒤틀리긴 했지만, 영화는 이렇게 던진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을 스스로 품고 있습니다. 찰리는, 자신의 피가 흐르는 인디아 스토커를 통해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렇게 찰리와의 요란한 피아노 연주와 수 차례의'사냥 실습'까지 마친 인디아는, 아버지의 서재를 정리하다 찰리 삼촌의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찰리는 반사회성 인격장애 환자로, 어렸을 적 자신의 형이자 인디아의 아버지인 리처드가 자기 말고 막내동생 조나단만 예뻐한다는 이유로 막내동생을 놀이터에 생매장해 살해한 후 평생을 정신병원에서 살아온 인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멀쩡해보이는 방법엔 이미 도가 튼 찰리는 말끔한 얼굴을 유지하다 인디아의 생일에 스스로 퇴원합니다. 그리고는 인디아의 아버지를 살해하지요.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인디아는 찰리로부터 도망치는 대신, 그가 신겨주는 '하이힐'을 받아 신습니다. 일종의 성인식이죠. 하지만 찰리가 신겨준 신발을 인디아가 받아 신은 바로 그 순간, 이블린은 둘의 모습을 발견하고 맙니다. 곧, 마을의 보안관도 연쇄살인의 심증을 찾고는 이들을 심문하지요. 이에, 찰리는 인디아에게 뉴욕으로의 도주를 제안합니다. 그날 밤, 이블린은 인디아를 불러, 모두 자신의 자식들이 나와 같은 실수 없이 인생을 잘 살아내길 원하지만, 나는 네 삶이 갈가리 찢어지는 꼴을 보고싶다는 대사를 내뱉습니다. 인디아를 더 이상 자신의 딸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인 것이죠. 그리곤, 찰리를 방으로 불러와 사라진 가정부와 연락이 끊긴 고모할머니에 대해 추궁하지요. 이블린의 말을 가만히 듣던 찰리는 이내 이블린의 목에 자신의 허리띠를 감아 조릅니다. 그리고는 가정부의 사체를 목격하게 만들고, 윕의 죽음을 목격하게 만든 것처럼, 광기를 교육시킬 목적으로 얼른 와서 네 어머니의 죽음을 보라며 인디아를 부르죠. 바로 그 때, 인디아는 찰리를 총으로 쏘아 살해합니다.

찰리의 딸이 되길 선택한 인디아

자, 그런데 왜 인디아는 찰리를 죽인 걸까요? 자신의 어머니를 구해내기 위해서였을까요?모든 윤리의식을 뒤틀고 왜곡하던 영화가, 끝나기 오 분 전에 제 정신을 찾은 것일까요?

물론 그런 해석도 '가능한 해석들'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개봉 전부터 홍보용으로 장면을 흘렸던 이블린의 독백, '사람들이 자식을 낳는 이유'에 대한 그녀만의 해석은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전반부의 피아노 연주 장면 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이블린은, '과거를 지우고 다시 시작하려는 욕망이 자식을 갖게 만든다'고 말하죠. 그리고 영화는, 인디아가 총을 쏘기 직전, 이블린의 목을 조른 찰리와 찰리에게 목이 묶인 이블린, 이 둘을 번갈아 보여줍니다. 이건 일종의 객관식입니다. 연이은 장면에서, 인디아는 엄마를 쏠까요, 찰리를 쏠까요?하는, 아주 위험한 객관식 문제죠. 인디아는 자신의 엄마를 죽이려는 찰리를 쏩니다. 그러나 이미 찰리와 도주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인디아이고,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데다 반사회성 인격장애 기질마저 이미 관객들 앞에 다 노출시킨 상황인지라, 관객들은'엄마를 살해하려는 미치광이를 쏴 죽인'이 당연한 상황을 의아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블린의 대사에 주목한다면, 이 장면에서 인디아는 자신의 엄마를 구해준 것도 아니고, 찰리를 죽이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인디아는, 자신이 누구의 자식이 될 것인지를 선택한 겁니다. '과거를 지우고 깨끗이 다시 시작'하기 위해, 둘 중 누구를 지울지 스스로 결정한 겁니다. 인디아는 찰리를 지움으로서 찰리의 딸이 되었고, 스토커 가문의 피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마지막 장면, '찰리 스토커'의 피를 얼굴에 흥건히 묻힌 채 살아남은 자신의 엄마를 내려다보는 인디아의 모습은, '널 내 딸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엄마의 독설에 대한 딸의 '박찬욱식 대답'인 것이죠.

영화의 마지막, 인디아는 가방을 싸서 거리를 질주합니다. 새출발이죠. 그리고 과속을 하던 그녀를 따라온 보안관을 잔인한 수법으로 살해한 그녀는, 자유롭습니다. 주제가 <becomes the color>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어머니의 블라우스, 아버지의 허리띠에 삼촌의 신발을 신고 갈대밭에 외로이 선 인디아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율입니다.

당신의 영화 <스토커>는 무엇입니까

'피아노 장면'으로 상징되는 찰리 스토커와 인디아 스토커의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 묘사를 전반부로, 그리고 '자식을 왜 낳을까?에 대한 이블린의 철학적 독백에서 드러나는, '찰리의 광기가 고스란히 이식된 인디아 스토커의 탄생'을 후반부로 보아 거기에 담긴 은유와 상징의 원관념을 읽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정답'이 아닙니다. '하나의 답'이죠.

전반부 후반부로 크게 나누긴 했습니다만, 작게 쪼개면 살펴볼만한 주제와 구석이 계속해서 나오는 영화입니다. (영화평론가 듀나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영화 <스토커>에 대해'모든 미장센이 불필요할 정도로 빽빽한 의미로 채워져있는 영화'라고 표현했습니다. 갑갑하게 들리지만 그건 박찬욱의 개성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죠)혹자는 영화의 '이야기'가 너무 빈약하다고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어린 소녀의 생일에 소녀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형을 죽인 미치광이 남자가 나타나, 자신의 조카이자 죽은 형의 딸을 '자기처럼'만든다는 게 영화 내용의 전부니까요.

그러나 <스토커>는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영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야기의 비중을 최소화하려 애쓰는 영화죠. 최대한 입을 다물고, 여러 해석이 가능한 '단서'만을 잔뜩 흩뿌려놓고는, 그 나머지 공간은 관객과 비평가들의 토론으로 채울 것을 주문하는 영화입니다.

어떤 관객은 이 영화를, 만 열 여덟살이 되어 '성'에 눈을 뜬 소녀의 이야기로 해석하더군요. 성에 눈을 뜨고, 자신의 아버지를 남자로 보게 된 한 소녀의 성인식 과정이라고 말이죠. 소녀가 자신의 삼촌, 찰리와 같은 계단에 서서 처음 하는 대사를 기억해보세요. you look like my father. '아빠를 닮으셨네요. '자신의 아빠를 닮은 이를 따르는 소녀의 묘사, 그리고'자신의 딸을 연적으로 취급하는 엄마'에 대한 묘사를 보면 이 해석 또한 일리가 있는 해석입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 님은, 거의 모든 장면에 감독의 인장이 새겨진 영화라며 그의 전작들과의 관계에 좀 더 주목하시더군요.

어느 해석에도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제대로 된 감상을 위해서는 분석적인 태도가 반드시 필요한 작품이죠. 말하자면, 영화 <스토커>는 박찬욱이 연출하고 내가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작품인 겁니다. 영화를 보신 여러분들께 묻습니다. 인디아는 왜 자신의 첫 살인 대상으로 경찰을 골랐을까요?가정부의 사체가 보관된 냉동고 옆에서 게걸스레 아이스크림을 먹는 인디아의 모습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이블린은 왜 계속해서 '지금 몇시지?'라는 대사를 흘리고 다니는 걸까요?당신이 해석한 <스토커>는, 무슨 영화입니까?

박찬욱 스토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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