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 당시 걸 그룹의 성공 전략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청순하면서 정적인 모습을 전면에 내세우거나 파워풀한 댄스로 보이시한 모습을 연출하거나. 핑클과 SES의 라이벌 구도, 그리고 보아의 등장은 당시의 시장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섹스어필을 통해 인기를 얻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대가가 따랐다. 데뷔곡 '야야야'로 발랄하고 귀여운 이미지를 선보였던 베이비복스는 'Why(와이)'와 '킬러'라는 곡을 통해 제한적인 섹스어필을 시도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지만 동시에 10대 소녀들을 적으로 만드는 부작용이 따라왔다. 베이비복스를 주적으로 설정한 소녀들은 그룹명 대신 '미아리복스'라는 비하적인 표현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며 적의를 불태웠다.

 소녀시대

소녀시대 ⓒ CJ엔터테인먼트


그때를 생각하면 대중들의 인식은 많이 변했다. 이제 남자들은 걸 그룹에게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투사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자들도 남자들의 시선을 경멸적으로 바라보거나 질투하기보다 오히려 그녀들의 성적 매력을 부러워하고 과감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2006년 이후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를 필두로 서서히 팽창하던 걸 그룹 시장은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유도했다.

2000년대 말은 걸 그룹의 팽창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2NE1, 레인보우, 포미닛, 애프터스쿨, 시크릿과 에프엑스는 모두 2009년에 데뷔했다. 극도로 팽창한 걸 그룹 시장에서의 치열한 경쟁은 콘셉트의 경쟁으로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섹스어필의 범람을 낳았다. 알앤비와 미들 템포의 댄스곡으로 활동하던 브라운아이드걸스는 노골적인 섹스어필이 묻어나는 '아브라카다브라'를 통해 대히트를 쳤고, 발랄한 이미지의 'Gee(지)'로 걸 그룹 최강자로 군림한 소녀시대는 후속타인 '소원을 말해봐'에서 선보인 밀리터리 룩으로 절제된 페티시즘을 자극했다. 모두 섹스어필과는 거리가 있던 팀들이었다.

치열한 경쟁, 고갈된 콘셉트. 유일한 출구는 섹스어필

지금 가요계의 모습은 3년 전의 흐름을 떠오르게 한다. 뽀송한 털장갑을 끼고 '프리티 걸'을 외쳤던 카라는 이제 "나에 대해 반도 안 보여줬어"라며 과감히 뒤태를 드러낸다. 포미닛과 시크릿은 '쩍벌춤'을 전면에 내세웠다. 줄곧 친숙한 이미지를 유지해온 걸스데이와 주얼리 역시 섹시 콘셉트로 활동을 시작했다.

3년 전에 벌어진 섹스어필 경쟁이 걸 그룹 시장의 팽창과 궤를 같이했다면 지금의 상황은 시장 조정 국면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획사들의 몸부림에 가깝다. 지난 몇 년간 한류열풍을 등에 업고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한 걸 그룹 시장은 이제 조정 국면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유지 자체가 어려운 상황으로 흐르고 있다. 한류의 성장을 믿고 데뷔했지만 정작 진출의 기반이 되는 국내의 호응도는 예전 같지 않다. 퍼포먼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콘셉트도 고갈을 걱정해야 할 만큼 소비된 상태다.

"그러니까 실력으로 승부하라"는 허공에 뜬 이야기를 여기서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누가 뭐래도 섹시하면 팔린다. 그만큼 폭발적인 상업적 자산은 흔치 않다. 갖고 있다면 굳이 버릴 이유가 없다. 다만 섹스어필에도 방법이 있고 도가 있다.

2009년, 2년 만에 재기를 노리던 아이비는 과도한 섹스어필로 실패를 맛봤다. 세밀한 콘셉트 설정 없이 지나치게 노골적인 안무로만 승부를 보려 한 게 원인이었다. 단시간에 예전의 인기를 만회하려 했던 욕심이 문제였다. 그녀의 판단은 안일했고, 결국 소녀들을 주적으로 만드는 위기를 맞았다.

사건의 발단은 케이블 음악 채널 시상식에서 닉쿤을 상대로 연출한 과도한 침대 퍼포먼스였다. 그녀가 무대에서 보여준 것은 섹시함이 아닌 섹스에 대한 직접적 묘사였다. 무대 전개상 굳이 넣을 필요가 없는 퍼포먼스였다. 화가 난 2PM 팬들은 아이비에게 총공격을 가했고 아이비는 자신의 미니홈피를 폐쇄하며 이에 대응했다.

하지만 그 이후는 없었다. 사이버 공간 곳곳에서 대첩을 연출하며 그녀를 보호해준 남성 팬들은 그녀의 위기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녀가 연출했던 섹스어필이 궁극적으로 남성 팬들을 위한 것임을 생각하면 당시의 반응은 굉장히 의외의 것이었다. 그녀의 재기전은 결국 모두에게 어필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무대에서 연출하는 '섹시'와 '섹스'는 이렇게 한 끝 차이지만 대중들의 호응도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낳는다. 대중들이 원하는 건 섹스의 연출이 아닌 섹시함이고 동경과 상상이다. 똑같이 야해도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리한나와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무대. 인기를 얻는 섹시함의 비결은 높은 수위가 아닌 동경과 상상의 유무에 있다.

리한나와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무대. 인기를 얻는 섹시함의 비결은 높은 수위가 아닌 동경과 상상의 유무에 있다. ⓒ goole


벗어야 장땡? 동경하고 상상하게 만들어야 한다

작년 빌보드 시상식에서 리한나와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보여준 S&M 퍼포먼스는 선정성을 넘어 포르노그래피의 영역까지 침범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채찍과 수갑, 가터벨트와 봉 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이 무대는 마조히스트와 사디스트의 관계가 직접적으로 연상된다.

하지만 그녀들이 보여준 무대 장악력은 특정 아이템과 안무에 집착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뛰어난 무대 연출과 의상, 그리고 각 파트의 세션들은 그녀들이 뿜어내는 카리스마를 극대화했다. 리한나와 브리트니는 금기된 영역을 상상하는 관객들의 심리를 자극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치밀하고 단단한 퍼포먼스를 구축했다. 누드 의상과 '쩍벌춤'으로 주목을 끄는 장난과는 지구와 안드로메다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다.

얼마 전 나온 가인의 새 싱글 '피어나'는 노출이 없는 섹스어필이 얼마나 야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페티시즘을 느낄만한 아이템은 허벅지에 감긴 가터벨트와 짧은 핫팬츠가 전부다. 상체는 품이 넓은 스웨터다. 원색적인 메이크업도 민망한 포인트 춤도 없다. 하지만 그녀가 의자에 앉은 채 허리를 뒤로 젖히고 허벅지를 쓸어내리는 퍼포먼스는 남자들로 하여금 온갖 야한 상상을 끌어낸다. 가인의 섹스어필은 철저히 콘셉트에 맞게 짜인 치밀한 안무와 퍼포먼스의 맥락 안에서만 소비된다. 잘 짜인 콘셉트와 고도의 전략적인 절제가 없으면 연출하기 힘든 성격의 퍼포먼스다.

 가인의 섹스어필은 철저히 콘셉트에 맞게 짜인 치밀한 안무와 퍼포먼스의 맥락 안에서만 소비된다.

가인의 섹스어필은 철저히 콘셉트에 맞게 짜인 치밀한 안무와 퍼포먼스의 맥락 안에서만 소비된다. ⓒ 로엔엔터테인먼트


대중들은 이제 얼굴 되고 몸매 되는 여자가 무대에서 야한 옷을 입고 야한 춤을 춘다는 사실에 반사적으로 호응하지 않는다. 과도한 포인트 춤과 의상은 오히려 반감을 산다. 대중들은 무대를 장악하는 포스와 판타지를 자극하는 콘셉트, 그리고 그 속에서 우러나오는 은근한 색기를 원한다. 보여주는 데 집착하기보다 고급스러울 줄 알아야 하고 상상하고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대중들의 안목은 변하는데 섹스어필이 연출되는 방식은 2002년 월드컵에서 미나가 세미 누드로 히트를 쳤을 때랑 크게 변한 게 없다.

걸 그룹에게 과도한 포인트 안무를 요구하고 말도 안 되는 의상을 입혀놓은 채 대중에게 섹시 판타지를 강요하는 건 '대박'에 목말라하는 기획사 입장에서도 손실이고, 아이돌 이전에 여성으로서 그녀들의 마음에도 상처다. 어설프게 할 거면 차라리 시도도 하지 않는 게 서로의 정신건강에 좋다. 단순히 말초신경을 자극할 만한 볼거리들은 이미 토렌트 사이트와 각자의 하드디스크에 차고 넘친다. 대중들이 원하는 섹시의 영역은 기획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이미 한 차원 위에 있다.

걸그룹 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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