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용의자X>에서 석고 역의 배우 류승범이 11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 <용의자X>에서 석고 역의 배우 류승범이 11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배우 류승범을 수학 용어에 비유하자면 '미지수 X'와 같은 존재다. 어떤 작품에서도 그는 소름 돋을 만큼 감독이 의도한 캐릭터를 완벽하게 구현하려 했다. 특히 영화 <용의자 X>는 캐릭터를 차치하더라도 이처럼 류승범 이미지에 맞는 작품이 있을까 싶었다.

2000년 그의 형인 류승완 감독의 연출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데뷔한 이후 류승범은 한국 영화계에서 독특한 입지를 구축했다. 한국 영화계는 그에 대해 '본능적으로 연기하는 배우' '타고난 배우'라고 표현했다. 스스로는 "그건 타인의 시선이죠. 어떻게 내 입으로 날 규정하겠어요"라며 에둘러 간다.

류승범은 영화 <용의자 X>에서 천재 수학교사 석고 역을 맡았다. 일본 원작 소설 <용의자 X의 헌신>을 접했던 이들에겐 이미 익숙한 캐릭터. 생의 허무함에서 우연히 찾아온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치려는 남자.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로고스 세계의 철저한 신봉자이던, 그래서 사랑 역시 그 안에 있다고 믿었던 석고는 류승범을 통해 '완전한 사랑'을 맛봤다.  


류승범, <용의자 X>에 대한 첫 인상은 이랬다

그는 일본 원작 소설과 영화를 보고 작품에 임했다. 한국적 감성에 맞게 각색해야 했고, 캐릭터의 변화도 있었지만 류승범은 "태생적으로 이런 작품은 원작과 비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며 비교 가능성을 인정했다. 방은진 감독이 연출한 <용의자 X>의 초기 제목은 '완전한 사랑'이었다. 추리와 스릴러적 성격에서 주인공의 사랑이야기를 강화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일단 전 <완전한 사랑>이란 제목을 반대했던 사람 중 하나에요. 안 와 닿더라고요. 이제 와서 편하게 얘기하자면 이 영화에 어쩔 수 없이 신파 코드가 있잖아요. 감독님께서도 신파로 풀고 싶다고 하셨어요. 잘못하면 영화가 좀 떨어져 보일 수도 있겠지만 촬영하면서 이 이야기의 진심은 신파에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헌신적인 사랑'이잖아요. 요즘 이런 사랑이 흔하지 않고, 헌신적 사랑을 다룬다면 신파가 맞을 수 있다며 동요했어요.

개인의 성향을 얘기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영화는 공동의 작업이고, 어쩔 수 없이 감독의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배우도 창작에 참여하고 충분한 도구가 되지만 감독의 성향이나 틀은 배우의 성향과는 별개에요. 그렇기 때문에 배우가 '작품이 이렇길 원했었다'고 얘기하는 게 조심스럽죠."

 화선(이요원)의 따뜻한 마음에 사랑을 키우는 석고(류승범).

영화 <용의자 X>의 한 장면. ⓒ K& 엔터테인먼트


<용의자 X> 류승범의 해석은 이랬다

초반부에서 밝힌 <용의자 X>의 초기 제목을 굳이 기억하지 않더라도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애써 무시하긴 어렵다. 영화 개봉 초기 극장 출구에서도 '석고의 사랑이 완전한 사랑인가 미친 사랑인가' 설문 조사하는 진행 요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결국 이 영화의 큰 줄기는 사랑이다. 그것도 '완전한' 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법한 사랑 말이다.

"이해하긴 어렵죠. 잘 모르는 여자잖아요. 저도 그게 끝까지 궁금했어요. 연애를 오래 하고 수십 년 같이 산 부부도 이별할 수 있는데 잘 모르는 사람이란 건 분명 퀘스쳔 마크가 될 수 있죠. 어찌 보면 위험한 사랑일 수도 있죠. 화선(이요원 분)에겐 힘든 사랑이거든요.

영화에선 석고의 일방적 사랑으로 보일 수 있어요. 완전한 사랑이 아닐 수 있다는 거죠. 사랑에 모범답안이 있는 건 아니지만 화선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완전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긴 어려울 것 같아요. 완전한 사랑이란 말을 붙이려면 예수의 사랑처럼 불멸의 형태여야 하지 않을까요? 석고의 사랑은 공격할 여지가 많잖아요. 완전한 사랑이란 건 종교적 사랑처럼 건드릴 수 없어야죠.(웃음)"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감정선에서만큼은 큰 에너지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단다. 피로도가 쌓였던 찰나 작품을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용의자 X>가 찾아왔고, 방은진 감독과 스태프의 열정에 류승범 또한 몸을 던질 준비가 된 셈이었다.

"감독님, 촬영, 조명 감독님과 몇 번을 만났는데 모두 다 영화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셨어요. 이 팀은 이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게 초점이었죠. 일단 작업을 완주했다는 것에 박수를 받고 싶어요. 나머진 취향의 문제죠. 우리 영화의 캐스팅이 뭔가 화려하거나 뚱뚱한 느낌이 아니잖아요. 관객에게 툭 하고 다가가는 거죠."


류승범에 대한 류승범의 해석은 이랬다

류승범은 철저하게 방은진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배우 출신 방 감독이 가장 애틋한 마음을 드러낸 캐릭터가 바로 류승범이 맡았던 석고였다. 영화 속 석고는 자신의 감정을 수학 공식처럼 켜켜이 쌓아갔다. 그리고 영화 말미에 터뜨렸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었던 석고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대사의 쉬는 부분, 느낌표, 물음표까지도 감독님이 코치해주셨어요. 그만큼 석고에 대한 감독님의 감정이 있었던 거 같아요. 제 연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습니다. 일단 캐릭터에 들어가면 다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이렇게 하니 다른 분들이 이렇게 받아들여 주시고 뭐 이런 게 배우라는 직업의 특성인 거 같아요. 저를 해석하는 시선은 여러 개인데 굳이 제가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류승범은 마치 미지수 X처럼 답했다. 관객과 주위의 평가에 맡기겠다는 취지로 이해할 수 있겠다. 타고난 배우, 본능적인 연기를 하는 배우라는 세간의 평가에 대한 판단을 부탁했을 때 그만큼 규정하기를 꺼렸던 것도 이해가 갔다.

"(웃음) 제 입으로 절 얘기하긴 어렵죠. 글쎄요. 이거 떠넘기는 건가? 어떤 배우분들은 '이젠 다른 모습 보이겠다' 하시는데 전 그런 게 없어요. 필모그래피를 위해 연기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물론 필모그래피가 배우의 가치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요.

전 과거보다 지금을 보는 스타일이에요. 제가 했던 작품이 중구난방이고 '왜 이 작품을 했느냐' 핀잔도 듣는데 제가 신인 감독님과 작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전 배우이고 배우를 하고 싶은 거지, 어떤 타이틀이나 상품 가치를 만들고 싶진 않아요. 그래서 그런가? 어렸을 때 받은 상장도 다 집안 구석에 들어가 있어요.(웃음)"


인간관계에서도 누군가 확 다가오고 또 누군가에게 확 다가가는 게 싫다던 류승범은 말 그대로 자연스러움에서 모든 걸 택하는 사람이었다. 드라마를 하지 않는 이유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회사에선 참 아쉽겠지만 류승범은 배우로서 자신의 철학을 부끄럽지 않게 지키고 싶어 했다.

"드라마는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예요. 능력치가 안되고 제가 육체적으로 강인하지 못하기도 하고요. 뭔가를 빨리 숙지해서 하는 걸 못해요. 좋은 친구가 있는데 안 맞는 친구와 굳이 사귈 필요 있나요? 그래서 드라마까지 하는 배우들을 존경합니다.

축구선수가 야구장에서 팬서비스할 순 없잖아요. 감동을 주는 게 팬서비스라면, 진짜 팬을 원한다면 자기에게 맞는 곳에서 활약해야죠. 물론 함부로 얘기할 순 없어요. 다 철학이 다르니까요. 그래서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분들을 존중하고 인정하고 부럽기도 해요. 전 패닉이에요. 안 외워지는 걸 어떡해.(웃음)"

류승범 용의자X 이요원 조진웅 방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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