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첫 태극마크를 단 김윤재(23, 고려대)

올해 첫 태극마크를 단 김윤재(23, 고려대) ⓒ 정인영


김윤재(23, 고려대)는 한국 쇼트트랙의 슈퍼 유망주였다. 때는 그가 13살이던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당시 올림픽 조직위원장이던 미트 롬니는 개막식에서 "향후 올림픽을 빛낼 꿈나무"로 김윤재를 호명했다. 그런 그가 가슴에 처음 태극마크를 새긴 건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2년. 늦어도 2010 밴쿠버에서는 금메달을 딸 거라는 주변의 기대는 진작 사라지고도 난 뒤였다. 

그가 가장 빛난 건 2008년 세계주니어선수권이었다. 밴쿠버 올림픽 2관왕에 빛나는 이정수를 2위로 밀어내고 안현수의 뒤를 이어 5관왕을 차지했다. 얼마 후 열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그가 태극마크를 달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되자 김윤재의 자신감은 자만심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주니어선수권 후에 열린 전국동계체전에서도, 종별종합선수권에서도 '5관왕 김윤재'의 위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후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그는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슬럼프가 시작된 것이다. 탄탄대로일 것만 같았던 그의 쇼트트랙 인생에서 자만으로 인한 슬럼프는 부상보다 더 큰 시련을 주었다. 첫 해에는 그것이 슬럼프인 줄도 몰랐다. 쭉 잘해왔기 때문에 잠시 주춤해도 언젠가 다시 될 거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언젠가'는 2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김윤재는 그제야 심각성을 깨닫고 훈련방법부터 사소한 습관까지 많은 것에 변화를 주었다.

그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윤재는 작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차 관문인 타임레이스의 벽조차 넘지 못했다. 허무하게 날아가 버린 국가대표의 꿈. 그는 다시 한 번 쓴맛을 봤다. 쇼트트랙 선수로서 모든 걸 바꾸고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22세.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막상 그만두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니 그동안 쇼트트랙을 위해 모든 걸 바친 내 인생이 너무 아까웠어요."

그의 말처럼 그는 오직 쇼트트랙밖에 몰랐다. 그렇기에 그것을 놓는 건 인생의 전부를 잃는 것과 같았다. 결국 끝낼 때 끝내더라도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고 다짐하며 그는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1년이 지난 2012년 4월 김윤재는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았다.

그로부터 5개월. 김윤재는 10월에 있을 그의 첫 시니어데뷔 무대를 위해 태릉선수촌에서 밤낮으로 훈련 중이다. 김윤재를 만나 첫 월드컵 무대에 대한 설렘과 고민을 들어봤다. 또 올 시즌 한국 대표팀의 성적도 함께 예상해봤다.

월드컵,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무대

- 다가오는 10월 쇼트트랙 1차 월드컵을 치른다. 국제무대는 2008 세계주니어 선수권 이후 4년 만인데,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4년 전에는 주니어 무대였고 시니어 무대로는 첫 데뷔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처음 도전하는 기분이에요. 굉장히 설레기도 하면서 또 떨리는데 한편으로는 기대도 많이 돼요."

- 국가대표로 선발된 후 첫 시즌을 앞두고 있다. 어떤 점에 초점을 맞추고 훈련을 하고 있나?
"개인종목도 중요하지만 다 함께 메달을 딸 수 있는 계주종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꾸준히 연습하고 있는데 계주는 다 함께 호흡이 맞아 하다 보니 아직은 어렵더라고요. 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부족한 부분을 시즌 전에 빨리 보완해야 할 것 같아요."

- 성시백 선수의 은퇴와 함께 남자대표팀 단거리 성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실제로 이번에 선발된 남자대표팀을 봐도 곽윤기 선수를 제외하고는 단거리에 뚜렷한 성적을 낸 선수가 없다. 김윤재 선수도 장거리 선수인데 단거리에 대한 보완은 따로 하고 있나?
"저는 아직 대표팀 1년 차이기 때문에 단점을 보완하기보다는 장점을 더 부각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어요. 그래서 500m보다 1500m에서 기량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도록 훈련하고 있어요. 물론 단거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지만 대표팀에서 김병준(경희대), 이한빈(서울시청) 선수도 단거리를 잘 타기 때문에 좋은 성적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 보통 쇼트트랙은 해외 선수들보다 국내 선수들의 벽을 넘기가 더 어렵다고들 한다. 10월 월드컵을 시작으로 앞으로 해외 선수들과 겨루게 될 텐데 이에 대해 김윤재 선수의 생각은 어떤가?
"물론 우리나라 선수들이 뛰어난 건 맞는 말이지만 그것 때문에 부담감이 크기도 해요. 저는 외국선수들을 대비하고 있다기보다는 팀 내에서 랭킹이 높은 (노)진규나 (곽)윤기 형을 보면서 같이 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 둘만 따라가도 외국선수과 겨루는 데는 큰 문제없다고 봐요."

곽윤기-노진규, 한국 쇼트트랙의 보물

- 나이는 어리지만 국가대표 연차로 치면 노진규가 선배인 셈이다. 노진규의 경우 이제 막 20살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다음해 열릴 세계선수권에서도 곽윤기-노진규-김윤재 선수가 종합 우승을 놓고 경쟁을 벌이게 될 텐데 노진규 선수를 평가해 보자면 어떤가?
"제가 감히 진규를 평가해도 될까요?(웃음) 진규는 기술적으로도 좋지만, 일단 매우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에요. 연습벌레 이상으로 중독자같이 운동을 해요. 저희 선수들이 기술적인 면을 일컬어서 '스케이팅'이라고 하는데 진규는 스케이팅이 정말 좋아요. 그리고 체력은 원래 좋았는데 최근에는 순발력이나 스피드면에서도 굉장히 발전 했어요. 꾸준히 오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선수에요."

- 곽윤기 선수는 어떤가? 올해 세계선수권자인만큼 아마 가장 큰 경쟁 상대가 아닐까 싶은데?
"냉정하게 말해서 경쟁자이기 보다는 제가 많이 배우고 있는 입장이에요. 저도 욕심 같아서는 경쟁자이고 싶은데 경쟁자라고 치기에는 윤기형이 저한테 기술적인 면을 정말 많이 알려주시거든요. 경쟁자라고 생각하면 안 알려주지 않을까요?(웃음) 개인적으로 기술적인 거나 게임운영 능력 면에서 봤을 때 윤기 형은 현 대표팀에서 가장 좋은 기량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 그럼에도 현 대표팀에서 '이것만은 내가 다른 선수들보다 자신 있다' 싶은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
"겸손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하나도 없어요. 저는 장거리 선수이기 때문에 제 스스로는 '내 장점은 체력이다'라고 생각했었는데 대표팀에 오니까 노진규라는 괴물이 하나 있더라고요.(웃음) 진규 보면서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싶었어요. 대표팀에 들어오면 마냥 좋을 줄 알았는데 열등감만 는 것 같아서 고민이에요.(웃음)"

2012년, 김윤재의 봄

- 올 4월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국가대표로 선발된 것이 처음이었음은 물론이고, 종합 2위로 다음 해 세계선수권 출전권까지 따냈다. 대회에 출전할 당시만 해도 김윤재 선수가 그렇게 좋은 성적을 올릴 거란 생각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본인은 예상했었나?
"저는 이만하면 되겠다 안 되겠다가 아니라 '어떤 일이 있어도 대표팀에 꼭 들어가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그 생각이 워낙 강해서 몇 등 몇 등을 해서 대표팀에 들어가야겠다는 계획보다 '꼭 될 거야, 돼야 해'라는 마음뿐이었어요.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잖아요? 엄청나게 간절했나 봐요."

- 올해부터 기업의 후원에 힘입어 선발전에서 종합우승을 한 선수에게는 500만 원이라는 상금이 주어졌다. 종합 1위를 차지한 노진규와의 점수 격차가 크긴 했지만 그래도 우승이 아쉽진 않았나?
"제 목표는 대표팀에 들어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등수에 상관없이 태극마크를 단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어요. 더구나 생각도 못했던 세계선수권 출전권까지 따냈기 때문에 2등도 감사했죠. 2등을 확정짓고 시상대에 섰는데 옆에 진규를 보니까 표정이 덤덤하더라고요. 덩달아 덤덤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정말 좋아 죽는 줄 알았어요. 종합우승자도 가만히 있는데 2등이 신나서 방방 뛰면 웃기잖아요. 참, 그러고 보니 진규가 상금 받고 한 번 쏘기로 했는데 안 쐈네요?"

- 중학생 때 처음 출전한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쟁쟁한 선배들을 모두 제치고 8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 후 계속된 부진으로 인해 불과 1년 전 선발전에서는 타임레이스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년 만에 종합 2위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첫 태극마크를 달았다. 돌이켜보면 참 롤러코스터 같은 선발전을 치렀는데 김윤재 선수에게 국가대표 선발전은 어떤 의미인가?
"첫 출전 땐 워낙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저보다는 부모님이 많이 아쉬워하셨어요. 그때는 올림픽 출전자격이 7위까지였거든요. 하지만 저는 '내가 중학교 때 이 정도 했으면 고등학교 때는 당연히 국가대표가 되겠지'하는 건방진 생각이 있었어요. 여기에 부상 후 복귀하고 나서도 성적이 좋으니까 자만심에 가득차서 올라오기 힘들 정도까지 추락했죠. 그렇게 부진을 겪으면서 작년 타임레이스까지 떨어지고 나니까 고개를 못 들고 다닐 정도로 제 자신이 싫어지더라고요.

사실 선수는 경기에서 지면 화가 나고 슬퍼야 정상인데 제가 지는 거에 너무 익숙해져버려서 어느 순간엔 져도 아무렇지 않게 되더라고요. 거기서 한 번 충격을 받고, 부모님이 힘들어 하시는 모습 보면서 또 한 번 충격을 받았어요.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이번에 대표에 되고 난 후에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모습 보니까 그게 가장 좋았어요. 생각해 보면 국가대표 선발전만 봐도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희로애락을 다 겪은 것 같아요."

- 2002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에서 조직위원장으로부터 받은 찬사와, 2008 세계주니어선수권 5관왕 그리고 지난 4월 국가대표 첫 승선. 이 중에 가장 기쁜 순간은 언제였나?
"(오랜 시간 고민 후) 어려운데요, 굳이 꼽자면 올해 국가대표 된 게 가장 기뻤어요. 하지만 2002년 때의 기억도 정말 좋았어요. 사실 세계주니어 선수권 우승자는 매년 나오고, 국가대표도 매년 6명씩 누군가는 되잖아요? 하지만 올림픽 개막식 때 위원장으로부터 이름이 호명된다는 일은 흔하지 않을 일이기 때문에 저한테는 소중한 추억이에요. 이번에 잘해서 다시 소중한 순간을 만들고 싶어요."

"그래도 아직은 20대인 걸요"

- 어린 시절 대한민국 쇼트트랙을 책임질 슈퍼 유망주에서 10년이 지난 지금의 김윤재를 비교해본다면 어떤 점이 가장 많이 달라진 것 같나?
"큰 슬럼프도 오랫동안 겪었고 환희와 눈물의 시절도 다 겪어봤기 때문에 운동선수 김윤재로는 한층 더 성숙해졌어요. 예전에는 제가 운동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자기주장이 정말 강했거든요. 하지만 여러 일을 겪으면서 지금은 제 주장을 바꿀 줄도 알고 남의 의견도 수렴할 줄 알게 됐어요.

그런데 사람 김윤재로는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웃음) 아직도 엄마나 동생이랑 자주 티격태격 하거든요. 남들은 저의 이런 모습이 철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제가 이럴 때가 가장 나인 것 같아서 좋아요."

- 내년에 대학교를 졸업한다. 쇼트트랙 선수로써 전성기를 맞기에는 적지 않은 나이인데, 이에 대해 아쉽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없나?
"보통 대학교 졸업 후 실업팀에 입단하면서 은퇴를 생각하는데 저는 23살에 처음 국가대표가 됐으니 좀 늦은 감이 있죠. 쇼트트랙만 보고 살아왔는데 바친 세월에 비해 쇼트트랙의 선수생활이 너무 짧다 보니까 아쉽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 당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재에만 집중하고 싶어요. 그래도 아직은 20대인데, 한창 뛸 나이잖아요."

- 가깝게는 2012/2013 시즌부터 멀게는 2014 소치 올림픽을 앞둔 상황에서 어떤 플랜을 갖고 있나?
"현재는 내년에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는 게 가장 큰 목표에요. 내년 세계선수권에서 우승을 해서 자동선발 되는 게 가장 편한 방법이지만 대표팀 첫 해이기 때문에 우승까지는 크게 기대하지 않아요. 일단 대표선발전에서 열심히 하고, 다음 계획은 올림픽 출전권을 따 놓고 생각하고 싶어요."

- 올 시즌 자신과 대표팀의 성적을 예상해 본다면?
"1500m는 색깔에 상관없이 메달을 따고 싶고요, 1000m는 메달보다는 꾸준히 결승에 가는 게 목표에요. 월드컵에서 1500m 금메달 두 개만 따면 좋겠는데 진규가 워낙 잘하니까 실전에서 뛰어봐야 윤곽이 잡힐 것 같아요. 마음 같아선 진규가 두 번 정도 양보해줬으면 좋겠는데…. 기사에 양보해주기로 했다고 써주실래요? 그러면 진규도 빼도 박도 못하겠죠?(웃음)

한국 대표팀 성적은 굉장히 좋을 것 같아요. 비록 이번 시즌에 (이)호석이 형도 (이)정수 형도 없지만, 그들을 대신해서 들어온 멤버들도 잘 타거든요. 그리고 다 같이 열심히 하는 분위기라서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아요."

- 끝으로 쇼트트랙을 사랑하고 김윤재 선수를 응원하는 팬들에게 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올해가 첫 데뷔시즌인데 팬 분들이 큰 기대를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저도 그 기대에 미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큰 기대를 하되 만약 제가 거기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너무 큰 실망은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지만 그래서 이렇게 부탁드리는 거예요. 응원도 열심히 하고 기대도 크게 하시되 실망은 안 하시는 걸로~ 요즘 잘 나가는 장동건 스타일, 맞죠? 저랑 약, 속, 하, 는, 걸, 로!"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아이스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윤재 쇼트트랙 국가대표 곽윤기 노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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