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97>의 윤제와 시원

<응답하라 1997>의 윤제와 시원 ⓒ tvN


영화 <건축학개론>의 "썅년"에 이어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이 2012년의 명대사 하나를 선사했다. 

"친구? 지랄하네."

1998년 1월, 윤윤제(서인국 분)는 소꿉친구 성시원(정은지 분)에게 마음을 고백했으나 이내 친구로 지내자는 답에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건축학개론>의 승민(이제훈 분)이 '압서방' 선배의 부축을 받고 집으로 들어가는 취한 서연(수지 분)을 발견하고 첫사랑을 접은 시점은 그에 앞선 1996년 12월 즈음이었으니, 1990년대 후반 첫사랑의 정서를 공유하는 두 작품의 시간적 배경의 간극은 크지 않다. 

'기억의 습작'과 '취중진담'으로 대변되는 전람회와 '짝퉁' 게스 티셔츠, 그리고 첫사랑. <건축학개론>과 <응답하라 1997>은 서울 정릉과 부산이란 공간을 제외하고 시대와 문화적 배경, 회고적 정서에서 가히 이란성 쌍둥이라 칭해도 무방해 보인다. <응답하라 1997>의 제작진이 영화 <건축학개론>의 흥행을 보며 처음에 낙담했다는 일화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두 작품에서 촉발된, 아니 이미 2011년부터 잉태되었던 90년대에 대한 회고의 정서를 대중문화, 언론, 대중이 극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2012년. 그 중심에 선 <응답하라 1997>은 분명 이전까지와는 다른 적극적인 메시지를 보인다는 점에서 꽤나 문제적이다.(영화와 드라마의 즉자적 비교는 무리이지만, <건축학개론>의 일정 정도의 자기반성적 혹은 패배적 시선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리고 그것이 팬덤 문화와 전방위적 대중문화, 부산사투리 등 깨알 같은 디테일로 무장한 것과는 또 다르게 구체적이고 즉물적이란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어쩌면 '리얼리즘'이란 무거운 한국적 정통을 던져버린 발랄함 속에 담긴 진득하고 속 깊은 '88만원 세대'에 대한 발랄한 응원가랄까.

 <응답하라 1997>의 '빠순이들'

<응답하라 1997>의 '빠순이들' ⓒ tvN


2개의 미끼 혹은 오해, IMF와 '빠순이들'

먼저 두 개의 오해. '1997년'이란 시기가 호명됐을 때, 다수의 기사와 시청자들이 불가항력적으로 연상했던 것은 IMF 구제금융이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대통령 이하 결정권자들을 제외한) 찾아와 다수의 '국민'을 수렁으로 몰아넣었던 그 공통의 기억. 그로부터 파생되는 절망과 재건의 서사들 말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던 뉴스 화면을 잊지 않고 비췄던 <응답하라 1997>은 그러나 180만 원을 회식비로 쓰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성시원에게 그러한 경제적 여파는 없었다는 알리바이를 마련한다. 그리고 서울 상경 이후 자취 공간 역시 '아이라이크스쿨'이란 사이트로 벤처붐을 일으킨 윤태웅(송종호 분)의 원조로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1997년의 강박을 간단히 뛰어넘는 영민함은 극의 내외부와 단단히 결속된 셈이다. IMF에 모든 국민이 타격을 받았을 리 없다는 지극히 명료하면서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진실과 단단하게 쌓아올린 캐릭터와 극적 전개에 녹여 내는 여유를 동시에 갖췄다고 할까.

H.O.T 토니안이 직접 출연하고, 갖가지 고증으로 화제를 낳은 '1세대 빠순이' 문화에 대한 묘사도 마찬가지다. 시트콤과 드라마의 중간 형태를 취한 <응답하라 1997>이 방영 전 그저 그런 '추억팔이 상품'이나 팬덤문화에 대한 희화화로 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허나 제작진은 이 역시 주인공 성시원의 성장사라는 주제와 단단히 엮어냄으로써 우려를 탄성으로 돌려놓았다. '클럽 H.O.T' 부산지부 임원이 된 성시원에게 토니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오롯이 삶의 이유요, 개성의 표현이다.

제작진은 이를 넘어 윤윤제와의 데이트 공간을 만들어 주고(부산 제일은행 앞에서의 티켓 사수 전쟁), 아버지와의 갈등의 전제가 되고(머리를 잘린 시원에게 '정 CF'를 패러디하게 만든 센스), 친구와의 우정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계기이며(젝키 팬으로 돌아선 유정과의 눈물 넘치는 화해를 보라), 심지어 '팬픽'을 연재하던 시원의 재능 발굴을 통해 대학(토니가 졸업한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진학을 이루고 심지어 직업(방송작가)까지 찾게 된다.

이러한 '팬질'이 시원이 삶에 끼친 지대한 영향력을 '빠순이의 옳은 예'와 같은 궁극의 판타지라 비아냥대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시원의 삶을 극적으로 몰아가지 않는 <응답하라 1997>의 리얼리티를 보며 '현실의 시원이'들이 감탄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오히려 시원을 순정만화 주인공으로 변모시키는, 이를 넘어 <응답하라 1997>이 이 99학번 시원이에게 보내는 응원이 궁극의 판타지로 기능하는 것은 윤제와 태웅 형제에 대한 묘사로 넘어올 때다.

 <응답하라 1997>에서 의외로 도드라지는 멘토 윤태웅

<응답하라 1997>에서 의외로 도드라지는 멘토 윤태웅 ⓒ tvN


이 시대의 멘토와 '88만원 세대'의 시대정신

윤태웅은 부산을 주름 잡는 수재였지만 가정 형편상 사범대를 택해 교사로 재직하다 '아이라이크스쿨' 창업으로 1153억 원의 개인자산을 가진 국내 최초 벤처 재벌이다. 그는 최연소 시장을 거쳐 지지율 43%를 넘긴 대선 후보에 이른다. 

작가진이 유력 대선후보로 떠오른 안철수 원장을 참조한 혐의가 짙어 보이는 그가 7화 '장래희망' 편에서 시원을 비롯한 여고생들의 멘토로 나섰다는 점은 꽤 의미심장하다. 비록 '팬픽'이란 극적 장치를 거쳤지만, 시원이 가진 글재주를 발견한 따뜻한 진학상담도 물론 그의 몫이었다. 또 다른 '빠순이'들에게 큐레이터, 편파중계자 등의 미래도 부여한다. 

"그래도 실패가 두려워 부딪쳐 보지도 않고 뭘 먹고 살지 고민하는 것도 서럽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해 보자. 인생 한 번뿐 아이가. (의사를 꿈꾸는 학생에게) 그래도 이건 안 된다. 15등급을 받아주는 대학이 어디 있나. 의사는 다음 생에 하고."

이러한 응원이 눈에 띄는 것은 현실의 시원이들이 지닌 상징성 때문만은 아니다. '88만원세대'의 선두인 99학번(<88만원 세대>가 출간됐던 2007년 현실의 28살이었다)인 현실의 시원이들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보듬는 작품이 어디 있었던가.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에서 비굴하기까지 한 안쓰러운 모습으로 형상화된 백진희를 제외하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간 소비력이나 구매력이 적다는 이유만으로 대중문화에서 소외됐던 이 계층에게 맞춤형 회고담인 <응답하라 1997>은 그 어느 작품도 보여주지 않았던 응원과 위로를 보내고 있다. 윤태웅이란 희대의 영웅과 윤윤제란 순정만화 주인공, 그리고 이 세대가 듣고 자란 온갖 유행가들을 양손에 든 채로. 그리고 그 응원은 인생을 고민하는 세상의 모든 10대, 20대들에게 유효하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지극히 교훈적이지만 세상의 잣대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진실.

 <응답하라 1997>의 주인공들

<응답하라 1997>의 주인공들 ⓒ tvN


'현실의 시원이들' 모두 응답하셨습니까?

"젝스키스가 돌연 해체를 선언했고, 성난 팬들은 애꿎은 조영구의 차를 불 질렀다. 2001년 HOT 오빠들도 해체를 선언했고, 하늘은 무너졌다. 뉴욕 한복판에 비행기가 떨어졌고, 인천공항이 문을 열었으며,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에 진출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었다.

노무현 후보가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강타하고, KTX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렇게 대망의 21세기가 시작됐고 우리들의 90년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나의 90년대는 끝난 줄 알았다."

<응답하라 1997>은 이렇게 미끼이면서 성장의 동력이었던 1997년 시원의 삶을 현재로 연결시키려 한다. 그리고 2005년에서 다시 2012년까지 시원이 임신한 아이의 아빠가 누구냐란 궁금증을 동력으로, 이야기는 윤제를 다시 만난 시원이의 과거와 현재를 부지런히 오가며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시트콤적인 상황 묘사와 정극에 버금가는 감정의 교차, 시대적 디테일로 중무장한 꼼꼼함과 대중문화에 대한 자기반영, 현재의 커플에 대한 미스터리를 품은 채로 과거와 현재를 부지런히 교차시키는 세련된 형식까지. <응답하라 1997>은 주 시청자 층을 정확히 꿰뚫고 그들의 감성과 눈높이를 정확히 공략하는 영민함과 그 세대에 대한 진심 어린 응원을 갖췄다. IMF라는 시대적 중압감을 던져버렸을 때, 이 드라마의 방향성은 이미 결정돼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응답하라 1997>이야말로 현 '88만 원 세대'의 소박한 시대정신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철수와 닮은 멘토 윤태웅 선생에게 한 표를 행사할 친구들과 동창회에서 만나 열여덞 그때를 행복하게 회고할 수 있는, 크지 않지만 진실한 소망 혹은 욕망. 15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현실의 시원이들의 소망은 변치 않았다.

응답하라1997 서인국 정은지 건축학개론 88만원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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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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