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은교>의 포스터.

영화 <은교>의 포스터. ⓒ 정지우 필름


영화가 개봉한 지 어느덧 넉달이 지나서야 마침내 <은교>를 보게 되었다. 극장 개봉 당시, 여고생 은교 역을 맡은 여배우의 파격적 노출장면에 초점이 맞춰진 영화 홍보에 은근한 거부감이 들어 극장을 찾지 않았다. 포스터의 문구만 봐도 '나의 영원한 처녀, 은교', '시인과 제자, 열일곱 소녀를 서로 탐하다' 같은 얼굴 화끈해지는 선정적인 소재들을 부각시킨 것들이었고, 그로 인해 자극적인 장면으로 채워진 낯뜨거운 소재의 영화일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해였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난 다음, 슬픈 분위기의 영화음악이 흘러나오며 제작진의 자막이 화면을 채우는 그 순간에 나는 내가 이 영화에 대해 큰 착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은교>는 내가 생각했던 단순한 성인물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영화였던 것이다. 영화가 남긴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편견을 갖고 이런 명작을 알아보지 못했던 스스로를 자책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적절한 장면에 잔잔하게 깔리는 영화음악, 색감표현이 뛰어난 영상미, 주연과 조연의 구분없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탄탄한 줄거리가 이끌어가는 긴장감과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영화를 뒤늦게야 보게되었음에 "아!" 하고 아쉬움과 기쁨이 섞인 탄식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나이든 시인 이적요, 때묻지 않은 청춘 은교를 만나다

 영화 <은교>의 한 장면.

영화 <은교>의 한 장면. ⓒ 정지우 필름


영화는 한적한 산속 별장에서 살아가고 있는 시인 이적요(박해일 분)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넓은 집에서 혼자 살아가는 그는 '나이많은 시인'을 떠올렸을 때 누구나 흔히 그려낼만한 점잖고 무게있는 인물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책들로 빽빽하게 채워진 공간에서 느껴지는 인상도 그의 이미지와 흡사하기에 마치 그가 지내는 집이 곧 시인 이적요, 그 자체를 표현한다는 생각도 든다.

바깥세상과 동떨어져 홀로 살아가는 늙은 이적요를 돕는 인물로는 그의 제자인 젊은 신인소설가 서지우(김무열 분)가 있다. 이적요의 곁에서 항상 그를 지키면서 밥과 청소, 빨래 등 모든 허드렛일을 도맡아 보살피던 서지우는 대학교 시절부터 알게 된 스승 이적요를 존경하는 제자이다. 그런데 지우의 저서가 인기를 얻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고, 그로 인해 바빠진 일정을 이유로 그는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잠시 대신하여 맡기게 된다.

그것을 계기로 이적요의 집에 발을 들이게 되는 인물이 바로 동네에 사는 여고생 '은교(김고은 분)'다. 발랄한 소녀 은교는 우연히 담을 넘어 이적요와 만나게 된 것을 인연으로 그의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위해 같이 지내게 된다. 열일곱살인 그녀는 소녀 특유의 순수한 모습으로 이내 무뚝뚝한 이적요의 마음의 벽을 허물어 버린다. 은교는 이적요의 순박함에 끌려 졸졸 따라다니고, 이적요도 청춘인 은교의 아름다움에 매혹된다.

혼자 집에 틀어박혀 세월의 끝자락을 보내던 노인 이적요, 그리고 이제 갓 세상을 알아가는 어리고 여린 영혼인 은교는 자신의 속마음과 과거의 기억들을 공유하며 급속도로 서로에게 다가간다. 숨김없이 각자의 진심을 드러낸 둘은 나이차이를 뛰어넘어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가 된다. 하지만 단순한 우정으로 머물기엔 은교가 너무 아름다웠던걸까. 이적요는 은교를 통해 자신의 나이조차 잊어버리고 순수한 애정을 경험한다.

은교에 대한 두 남자의 욕망과 질투, 그리고 비극

 영화 <은교>의 한 장면.

영화 <은교>의 한 장면. ⓒ 정지우 필름


자신이 받던 이적요의 관심을 은교가 독차지하는 듯한 기분에 제자 지우는 그녀를 밀어내기 위해서 상처를 준다. 하지만 되레 그럴수록 이적요와 은교의 관계는 더욱 깊어지고, 아슬아슬한 단계까지 발전해간다. 그러면서도 이적요는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거나 은교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두 사람이 서로를 진심으로 좋아할지라도, 이들의 관계가 진지한 애정이 되어버린다면 세상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여고생과 노인의 불순한 교제가 되어버릴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적요는 자신이 쓴 작품을 제자 서지우를 통해 대신 출간하기도 한다. 문학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존경받는 시인으로서의 체면이 '대중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타격받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출간된 소설은 수십만부의 판매고를 기록하고 그 덕분에 제자인 지우는 편하게 명예와 부를 거머쥐게 된다.

나이, 지위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억눌러야만 했던 이적요와 달리, 혈기왕성한 청년 서지우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가지려고 손을 뻗는다. 시인 이적요가 은교와 지내며 겪은 이야기를 토대로 남몰래 써놓은 단편소설 <은교>를 훔쳐 문학계에 발표한 것이다. 제자 서지우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소설 <은교>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문학제에서 입상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더불어, 서지우는 은교에게 육체적 관계를 목적으로 접근한다. 문학잡지에 실린 소설을 보게된 은교는, 자신을 아름다운 글을 표현해낸 진짜 인물이 이적요임은 까맣게 모른채 지우에게 호감을 갖고 관계를 갖게 된다. 결국, 이적요가 늙은 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질 수 없었던 부와 명예, 아름다운 은교까지 제자 지우는 젊다는 이유만으로 거침없이 모두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삼각관계에서 처음 돌출된 '이적요를 은교에게 빼앗긴 서지우의 질투'는, '은교를 서지우에게 빼앗긴 이적요의 질투'로 반전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열일곱살 소녀를 가운데 둔 두 남자의 질투심은 이윽고 극심한 분노로 발전하고, 끝내 폭발한 감정의 충돌은 세 사람 모두에게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오면서 막을 내린다.

은교를 보내야만 했던 이적요... "잘가라, 은교야"

 영화 <은교>의 한 장면.

영화 <은교>의 한 장면. ⓒ 정지우 필름


"잘가라, 은교야"

이적요는 눈물을 흘리면서 은교를 보내야만 했다. 슬픔마저도 보이지 않도록 뒤돌아 누운채로, 그는 떠나는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적요가 불에 태우는 소설 <은교>의 원고지는 그가 나이와 지위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던 대중소설가로서의 명성과 아름다운 소녀 은교를 동시에 담아내고 있는 듯 하다.

"나 이적요는, 늙었습니다. 늙는다는 건, 이제껏 입어본 적이 없는 '납으로 만든 옷'을 입는 것이라 시인 로스케는 말한 적 있습니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극중 나이든 시인 이적요는 사람들에게 위와 같이 말한다. 늙어가면서 피부엔 주름이 늘어나고, 몸이 약해지는 것도 분명 서러운 일인데 이적요는 늙음으로 인해 더 많은 제약을 받아야만 했다.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되지 못한 소설은 불에 태워버리는 것으로 마음을 정리하는 모습이지만, 은교를 떠나보내는 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은 이적요가 받기에는 너무나 가혹하고 부당한 벌이기에 가슴아플 뿐이다.

"은교... 예쁘게 써줘서 고마워요. 내가 그렇게 예쁜 애인지 몰랐어요"하고 울먹이며 뒤늦게 고백하는 소녀, 아름다운 그녀가 떠나간 뒤에야 나지막히 잘가라고 인사하는 노인. 너무 어려서 진심을 못 알아봤던 그녀와 그녀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도 너무 늙어서 삼켜야만 했던 그. 끝내 서로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이들의 슬픈 이야기는 "우리는 너무 빨리 늙고 너무 늦게 철이 든다"던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우리 모두의 비극인지도 모른다.

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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