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전, 인천 수비수 정인환의 왼발 발리슛이 동료 한교원의 뒤통수에 맞는 순간.

전반전, 인천 수비수 정인환의 왼발 발리슛이 동료 한교원의 뒤통수에 맞는 순간. ⓒ 심재철


어젯밤 8시 53분경 김성호 주심의 휘슬이 길게 울리고 경기가 끝났습니다. 제 옆에 앉아서 내내 경기를 지켜봤던 직장 동료가 한 마디 합니다.

"그물이 철렁거리는 골을 못 봐서 그런지 뭔가 허전하다. 득점 없이 비겼지만 왠지 진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뭔지..."

제 마음도 딱 그랬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배는 고프지 않지만 냉면이 생각난다고 했습니다. 저도 사실 배가 조금 고팠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너무 복에 겨워 그랬나 봅니다.

그만큼만 해도 인천 유나이티드가 정말 잘 한 것인데,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것인데 마지막 순간까지 팬이랍시고 너무 큰 욕심을 부렸나 봅니다. 지쳐 쓰러질 정도로 최선을 다해 뛴 인천 유나이티드 선수들과 김봉길 감독님에게 무한한 지지와 감사의 뜻을 보냅니다.

배신감 그리고 절망

저를 포함한 인천 유나이티드의 대다수 팬들은 여러 해 동안 2012년 3월 11일을 기다려 왔을 것입니다. 2004년 3월 1일부터 깊은 정이 든 곳이지만 그라운드와의 거리가 조금 멀어서 불편했던 문학월드컵경기장을 떠나 드디어 최적의 관람 시야를 자랑하는 숭의 아레나(인천 축구전용경기장)로 옮겨와 첫 경기를 치른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기념비적인 새 경기장 개장 첫 경기가 시작 전부터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일찌감치 시즌권이나 1일 입장권을 예매한 사람들도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으니 얼마나 원망스러웠겠습니까? 추위에 떨며 날바닥에 서서 1시간 이상 기다리는 동안 밀려드는 배신감은 좀처럼 참기 어려웠습니다.

 76분, 인천 유나이티드 미드필더 박준태(19번)가 오른발로 찬 프리킥이 수비벽에 걸리는 순간.

76분, 인천 유나이티드 미드필더 박준태(19번)가 오른발로 찬 프리킥이 수비벽에 걸리는 순간. ⓒ 심재철


그래도 2003년 창단 때부터 미운정 고운정 모두 쏟아 온 나의 팀이니 좀 기다리자는 마음을 먹으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돌아가는 출발점에서 1만7662명이라는 적잖은 관중들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그랬을 것이라 제 마음을 다독였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형편 없는 경기력은 또 한 무더기의 팬들을 안방에서 쫓아내는 구실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한국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원정 16강 달성이라는 훈장을 달고 인천 유나이티드에 부임한 허정무 감독은 그 외형과는 달리 인천 유나이티드의 경기력을 끌어올리지 못했습니다. 구단 운영의 문제점이 일부 드러났지만 그것은 팬들의 귀에 핑계로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전임 허정무 감독이 불명예스럽게 물러나고 김봉길 수석코치가 난파선이나 다름없는 인천 유나이티드를 이어받았습니다. 웬만한 팀이었다면 여기서 주저앉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감독은 선수들을 믿고, 팬들은 감독을 믿고

아름다운 축구전용경기장에서 야심차게 개장 기념 경기를 치른 뒤 딱 한 달만에 허정무 감독은 마지막 경기(인천 1-1 광주, 2012. 4. 11)마저 무승부 기록으로 남기고 훌쩍 떠났습니다. 이에 갑작스럽게 팀을 떠맡은 김봉길 수석코치는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나흘 뒤에 상주에서 열리는 K리그 8라운드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 당시의 아득함은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일입니다.

이후에 거듭된 인천의 경기력 부진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팬들의 어깨가 축 처지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선수들마저 절망할까봐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빛나기 시작한 것은 김봉길 감독대행의 조용한 지도력이었습니다. 그는 선수들의 기량을 전폭적으로 믿었고 자연스러운 조직력을 이끌어내기 시작했습니다.

6월 23일 저녁 인천 축구전용경기장에서 열린 상주 상무와의 안방 경기 1-0 극적인 승리가 대반전의 시작이었습니다. 김봉길 감독대행께서 지휘봉을 넘겨받은 첫 경기도 상주와의 방문 경기(0-1 패)였으니 참 절묘한 인연이 만들어진 셈입니다. 그렇게 인천 유나이티드의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었습니다.

특급 골잡이 설기현을 고립시키지 않고 공격형 미드필더들(남준재, 박준태, 김재웅, 한교원)을 적극 활용하는 김봉길 감독의 박진감 넘치는 축구는 경기를 거듭할 때마다 믿음직스럽게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경기장 서포터즈 자리에서는 선수들의 이름 못지 않게 김봉길 감독의 이름도 큰 소리로 울려퍼지기 시작했습니다.

7월 8일 저녁 부산 아시아드로 들어간 인천 선수들은 믿기 어려운 2-1 승리를 만들어냈습니다. 올 시즌 짠물 수비의 진수를 보여준 상대 팀이었기에 그 결과는 더욱 값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우리 선수들은 더 어려워 보였던 FC 서울과의 안방 경기를 이번 시즌 최고의 명승부로 만들며 3-2 펠레 스코어 승리를 거뒀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 선수들은 무엇보다 소중한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20분, 인천의 왼쪽 수비수 박태민이 왼발 인사이드 킥으로 골을 노렸지만 상대 문지기의 선방에 걸리고 말았다.

20분, 인천의 왼쪽 수비수 박태민이 왼발 인사이드 킥으로 골을 노렸지만 상대 문지기의 선방에 걸리고 말았다. ⓒ 심재철


뜨거웠던 8월, 감동의 인천 유나이티드 FC

바로 그 다음날 '대행' 꼬리표를 떼고 정식 감독 자리에 앉은 김봉길 감독은 누구보다 냉정한 마음으로 가장 뜨거운 계절을 준비했습니다. 2012년 8월에 벌어진 여섯 경기를 결코 잊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시즌 중 감독 교체에 이어진 성적 부진은 좀처럼 견디기 힘든 시기였습니다. 14라운드부터 17라운드에 이르기까지 인천 유나이티드는 꼴찌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팬들의 바람은 내년 시즌을 앞두고 강등권(15위, 16위)을 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8월은 더욱 뜨거웠고 목이 타들어가도록 간절함으로 가득했습니다.

8월 4일 토요일 저녁 인천 축구전용경기장에서 우리 선수들은 전남 드래곤즈를 맞아 1-0 승리로 야심차게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승리 행진이 이어졌습니다. 주중에 열린 대전 시티즌과의 방문 경기(2012. 8. 9)에서 놀랍게도 2-0의 완승을 거뒀습니다. 박준태의 아름다운 직접 프리킥 골은 지금도 그 궤적이 생생하며 주장 완장을 찬 간판 수비수 정인환의 발리 슛은 수많은 공격수들을 비웃을 정도로 훌륭한 동작이었습니다.

8월 12일 강원 FC와의 안방 경기를 2-0으로 이기며 3연승을 기록한 인천 선수들은 이후에 험난한 산을 만납니다. 강 팀 울산, 전북과의 두 경기 연속 방문 경기 일정입니다. 울산은 2012 AFC(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8강 토너먼트에 유일하게 올라가 있는 K리그의 자존심이고 전북 모터스는 디펜딩 챔피언입니다. 난공불락의 상대들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봉길 감독의 지도 아래 자신감을 얻기 시작한 우리 선수들은 그 어려운 경기에서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자신들이 준비한 조직력을 맘껏 자랑했습니다. 간판 골잡이 설기현은 멋진 돌고래 점프로 울산과의 방문 경기(2012. 8. 18)에서 천금같은 헤더 결승골을 터뜨렸습니다.

그 결과 인천 유나이티드는 단 10라운드만에 리그 순위를 8위까지 끌어올렸습니다. 마음 속에서는 간절한 바람이 조금은 남아 있었지만 불가능이라 여겼던 상위 스플릿(1~8위) A그룹이 바로 눈앞에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전북과의 방문 경기(2012. 8. 23)에서도 믿기 어려운 2-1 승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골잡이 이동국과 유능한 외국인 미드필더 에닝요, 드로겟이 인천의 수비 라인을 경기 내내 위협했지만 이를 잘 견뎌내고 효율적인 띄워주기를 통해 측면 미드필더 둘(한교원, 남준재)이 나란히 한 골씩 넣은 덕분이었습니다.

 후반전 추가 시간, 인천 미드필더 한교원의 빠른 역습 전개 과정

후반전 추가 시간, 인천 미드필더 한교원의 빠른 역습 전개 과정 ⓒ 심재철


넘지 못한 고비, 그러나 "사랑한다. 인천!"

이렇게 8월에 열린 다섯 경기를 모조리 이겨낸 인천 유나이티드는 그야말로 파죽지세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어느 팀도 두려울 것 없었습니다. 8득점 1실점이라는 수치만으로도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이제 우리 선수들은 정규리그 30라운드 마지막 대결로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안방 경기만을 남겨놓고 있었습니다.

A그룹(상위 8팀)에 들어가기 위한 자리는 실질적으로 단 1자리만 남았습니다. 대구 FC와 경남 FC가 인천과 함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상대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인천 선수들이 승리하면 다른 경기 결과와 전혀 상관 없이 자력으로 8위 자리를 당당히 차지할 수 있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보다 힘겨운 8월을 견뎌온 선수들의 체력이었습니다. 목요일 전주성 방문 경기를 끝내고 채 이틀을 쉬지도 못한 상태에서 다시 그라운드에 나서야 했던 우리 선수들은 이 30라운드 경기에서 제대로 팀 스피드를 끌어올리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전반전 끝무렵 방문 팀 골잡이 서동현에게 결승골을 내주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운 경기였습니다. 후반전 공격 작업은 우리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체력 저하는 정확한 패스 연결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새로운 공간을 찾아 움직이는 제2, 제3의 동작도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허탈하게 득점 없이 경기는 끝났습니다. 그러나 관중석 이곳 저곳에서 들릴 줄 알았던 탄식보다는 격려의 박수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3월 11일 수원 블루윙즈와의 개장 경기 이래 가장 많은 관중(1만4033명)이 찾아와 파도 타기까지 만들어진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추억입니다. 손 글씨 응원에 이어 "사랑한다, 인천!"이라는 가슴 뭉클한 응원 구호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30라운드의 정규리그를 끝내고 스플릿 시스템에 의해 A, B 두 그룹으로 갈라져 팀 당 14경기를 더 치르는 이 일정은 수많은 축구팬들에게 '우승 경쟁, 강등 피하기 경쟁' 등의 아슬아슬한 재미를 선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축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가을, 겨울의 축구장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박진감으로 넘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그곳에서 행복할 것을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스플릿 인천 유나이티드 FC 김봉길 축구 K리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