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팀 레바논 선수들은 4-5-1 포메이션을 쓰면서 미드필드에서 우리 선수들에게 공간을 내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지난 주말 카타르 도하 방문 경기를 마치고 돌아와 시차 적응을 거꾸로 하느라 어려움을 겪은 우리 선수들의 몸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오밀조밀하게 공간을 선점한 레바논 선수들을 상대로 짧고 빠른 연결을 통해 새로운 공간을 효율적으로 만들어내야 했지만 마음처럼 몸과 공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러한 경기 양상은 우리 선수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급한 마음만 커질 뿐이었다. 그러던 중 미드필더들의 번뜩이는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상대 수비수들을 속이는 제3자 패스를 통해 측면을 시원하게 무너뜨린 것이다. 비로소 우리 공격의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었다. 이후 전개된 경기 양상은 우리 뜻대로 펼쳐졌다. 축구장에서 어느 한 팀의 뜻대로 경기가 풀려나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가르쳐주는 명장면이었다.

최강희 감독이 이끌고 있는 한국 남자축구대표팀은 12일 저녁 8시 고양종합운동장에서 벌어진 2014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 A그룹 레바논과의 두번째 경기에서 3-0 완승을 거뒀다. 결코 쉽지 않았던 초반 2연전을 깨끗하게 승리(7득점 1실점)로 장식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기성용의 어두운 표정

우리 시각으로 지난 토요일(6월 9일) 새벽에 카타르 도하에서 경기를 끝내고 채 나흘도 안 되어 경기도 고양시로 날아와 두번째 경기를 치른다는 것은 아무나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른바 '역' 시차 적응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선수들은 경기 초반에 마음대로 공을 돌리지 못했다.

더구나 간판 미드필더 기성용이 비교적 이른 시간(20분)에 다리 근육 이상을 호소하는 바람에 우리 선수들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우리의 유능한 미드필더들은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해법을 찾아 제시했다. 역시 축구장의 올바른 해법은 패스로 조직력을 완성시키는 과정에서 찾아야 했다.

레바논 선수들이 쳐 놓은 배수의 진은 여전히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이근호-박주호-염기훈' 등 우리 선수들은 좁게만 보였던 왼쪽 옆줄 바로 앞에서 훌륭한 조직력을 자랑했다. 공을 잡은 이근호는 왼쪽 수비수 박주호와 공을 주고받으며 빈 틈을 노렸다. 여기서 옆줄 바로 앞에 기다리고 있던 염기훈을 이용하여 3자 패스가 박주호의 발끝에서 뻗어나갔다. 그 앞을 시원스럽게 빠져나간 주인공은 이근호였다.

이렇게 경기 시작 후 30분 만에 귀중한 선취골이 만들어졌다. 이근호가 왼쪽 끝줄 가까운 곳에서 날카롭게 꺾어준 공은 정면에서 달려든 김보경의 왼발에 제대로 걸렸고 레바논 문지기 엘 사마드가 손바닥으로 쳐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축구장은 평면이지만 공을 주고받는 형태에 따라 입체적인 전술이 만들어질 수 있다. 바로 '박주호-염기훈-이근호-김보경'으로 이어지는 수준 높은 3자 패스 하나가 이를 입증하는 순간이었다.

축구장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2:1 패스를 근간으로 삼아 더 좋은 공간으로 빠져나가는 제3의 동료에게 공을 연결해주는 '3자 패스'는 보기에는 쉬워도 실제로 이처럼 좁은 공간에서 구현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 유능한 미드필더들은 이 중요한 순간에 이를 보란 듯이 해내고 말았다.

'대세' MF 김보경

@IMG@

이번 최종 예선에서 이근호와 함께 최고의 경기력을 자랑하고 있는 왼발잡이 미드필더 김보경은 카타르와의 첫 경기 2도움 활약에 이어 이번 경기에도 혼자서 2골을 터뜨리며 가장 빼어난 성장세를 드러냈다.

강한 왼발 돌려차기로 선취 결승골의 주인공이 된 김보경은 후반전 시작 후 3분 만에 만들어낸 역습 상황에서 그 누구보다 침착하게 깨끗한 추가골을 성공시켰다. 이근호가 이마로 떨어뜨린 공을 염기훈이 반대쪽으로 연결하는 과정이 역습의 모범 답안, 바로 그것이었다. 이처럼 준비된 조직력은 상대 팀 선수들에게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이미지로 굳어지게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김보경의 드리블과 마무리 동작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미드필더로서 근래에 보기 드물게 안정된 동작으로 공을 다루며 템포를 조절할 줄 아는 드리블 실력, 정교한 왼발 킥 기술을 고루 갖추었다. 무엇보다도 김보경의 장점은 경기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축구장의 'brain'(뇌)이 잘 발달되어 있다는 점이다.

축구를 누구보다 잘 알고 하면서 매우 효율적으로 동료들과 어울리고 있으니 어느 팀에 가서도 자신의 역량을 모자람 없이 고르게 발휘할 줄 아는 것이다. 최종 예선 초반 두 경기 상대 팀이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지만 미드필더로서 매 경기 두 개씩의 공격 포인트를 올렸다는 것은 보기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자주 쓰는 말로 '대세' 그 자체다.

구자철에게 어울리는 자리

@IMG@

기성용의 갑작스런 부상으로 몸이 제대로 준비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20분 만에 들어온 구자철은 오래간만에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 서서 공격과 수비의 조율에 힘썼다. 그런데 지난번 카타르와의 경기에서 뛴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보다 훨씬 잘 어울리는 모양새였다.

그의 앞에서 뛰는 골잡이 이동국, 공격형 미드필더 '염기훈(손흥민)-김보경-이근호' 등이 매우 효율적으로 공간을 나눠 뛰는 바람에 이들을 적시에 활용하기가 비교적 편했지만 구자철 특유의 날카로움이 돋보였다.

특히, 78분에 김정우 대신 지동원이 들어오면서 구자철의 수비형 미드필더 파트너는 김보경으로 바뀌었고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구자철이나 김보경의 발끝에서부터 공격이 시작되는 새로운 조직력도 조금 느낄 수 있었다.

2014 브라질 월드컵 본선 무대까지 겨냥할 때 이들 새내기들이 엮어내는 새로운 공격 조합들은 봉동이장 최강희 감독이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비장의 전술처럼 보였다. 맏형 이동국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최적의 조합을 고민한 흔적이 느껴졌다.

구자철이 단순히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만 맡을 인재가 아님을 경기 종료 직전에 멋진 쐐기골로 보여주었다. 자기 팀 골문 앞에서 흘러나온 공을 잡아서 역습으로 전개하려던 레바논 미드필더 후세인 다킥은 구자철의 벼락같은 압박 수비에 공을 빼앗겼고 곧바로 구자철의 왼발이 빛났다. 역시 슛은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일깨워주는 멋진 쐐기골 순간이었다. 그는 동료들과 환한 미소를 나눌 자격이 충분했다.

이제 우리 대표팀은 오는 9월 11일 밤에 열리는 우즈베키스탄 방문 경기로 최종 예선 3차전을 준비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 2014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 A그룹 결과, 12일 밤 8시 고양종합운동장

★ 한국 3-0 레바논 [득점 : 김보경(30분,도움-이근호), 김보경(48분,도움-염기훈), 구자철(90분)]

◎ 한국(감독 : 최강희) 선수들
FW : 이동국
AMF : 염기훈(63분↔손흥민), 김보경, 이근호
DMF : 기성용(20분↔구자철), 김정우(78분↔지동원)
DF : 박주호, 이정수, 곽태휘, 오범석
GK : 정성룡

◎ 레바논(감독 : 테오 부커) 선수들
FW : 하산 엘 모하마드(63분↔모그라비)
MF : 하산 마투크(54분↔차라라), 후세인 다킥, 압바스 아트위, 무하마드 차마스(85분↔모하마드 하이다르), 아마드 즈레이크,
DF : 왈리드 이스마일, 유세프 모하마드, 비랄 나자린, 라메스 다유브
GK : 엘 사마드
김보경 구자철 축구 월드컵 레바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