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발견이다. 실제 아이들의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는 이 영화는 긴 시간 동안 관객을 몸서리치게 한다. 또한, 뇌리에 각인될 만큼 인상을 남긴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이 영화의 메시지가 무시무시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어디서건 이 영화의 현실과 다를 바 없는 장면들이 플레이(재생) 된다는 것이다. 비단 영화의 배경이 된 스웨덴뿐 아니라 당신이 밟고 있는 여기저기의 땅 위에서도. 내가 본 것은 그야말로 끊임없이 '플레이' 되는 지옥경 <플레이>다.

12~13살 무렵의 아이들이 출연하지만, 이 영화는 시종일관 무겁고 절망적이다. 몇 번이나 "제발, 여기까지만"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영화가 나타내는 현실의 모습과 사건의 실체가 견디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같은 나라에서 제작된 <렛미인>이 밤의 공포를 그리고 있다면 <플레이>는 낮의 공포를 그리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심지어 이 영화의 장르가 공포영화가 아닌데도 영화 속에는 상상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지옥'의 모습이 그대로 펼쳐져 있다.

아이에게 행해지는 폭력이란 '학교 폭력'이 다가 아님을 새삼스럽게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어른이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공간에서 오로지 아이들만 남은 현실이 얼마나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지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한다. 영화 자체는 무겁지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제공은 아낌없다는 것이다.

어른들 모르게 자행되고 있는 아이들끼리의 사건

 지옥의 땅위에 선 소년들

지옥의 땅위에 선 소년들 ⓒ 전주국제영화제


<플레이>의 제목이 은유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재생', '진행'된다는 뜻을 가진 제목은 스웨덴의 어느 도시에서 어른들 모르게 자행되고 있는 아이들끼리의 사건들이 아직도 계속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표현한다.

다섯 명의 흑인 친구들은 무리를 지으며, 백화점 이곳저곳을 부랑아처럼 돌아다닌다. 공을 차거나 던지며 소란을 피우는 건 예삿일이다. 그들의 다른 목적은 또래나 그보다 어린 부유한 아이들의 핸드폰을 갈취하는 것.

그렇다고 무조건 빼앗거나 하는 우매한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들은 지능적으로 서로 역할을 분담하여 핸드폰뿐 아니라 다른 귀중품들도 손아귀에 넣고 만다. 나는 차라리 그들이 핸드폰을 직접 달라고 하는 것이 더 났겠다고 생각했다. 세 어린 소년을 알 수 없는 공간으로 한 나절 동안이나 끌고 다니면서 괴롭히는 모습을 보니, '과연 저들도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저런 모습이 정말 현실일까?'라고 생각될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다가왔다.

이미 유럽 대부분의 나라는 여러 인종의 유입 때문에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부를 축적하지 못한 흑인으로 파생되는 문제는 더욱더 심각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흑인 소년들은 거침없이 행동한다. 또래에게만 욕을 하고 폭력을 행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형이나 노인에게까지 똑같은 행동을 한다. 상황은 이렇게 심각한데, 이것을 바라보는 어른의 대응은 무심하기 그지없다. 경찰에 신고해달라고 하는 소년의 말에 가게 사장은 가게 안에서 기다리라고 말하지만, 그 이후의 상황까지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장면은 버스에서도 이어진다. 버스에 탄 승객은 흑인 소년의 횡포에 이렇다, 저렇다 간섭을 하지 않는다. 사건이 터지고 아이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한 아저씨가 남겨진 백인 소년에게 선심을 쓰듯 다가와 자기가 증인이 되겠다고 말하지만, 이미 소용없는 반응이다. 무임승차를 이유로 절망적인 상황에 부닥친 아이에게 어마어마한 벌금을 남기고 애써주는 척하는 모습은 현실 속에서 어른이 아이를 대하는 모습 그대로다. 어른은 어떤 대책을 말해주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 그의 말에 귀 기울여 하지 않는 것이다.

가해자가 사라진 후, 쥐죽은 듯 숨어있는 아이들

 흑인소년들과 부유한 소년들의 대치. 그 누구도 가해자, 피해자라고 말할 수 없는 현실

흑인소년들과 부유한 소년들의 대치. 그 누구도 가해자, 피해자라고 말할 수 없는 현실 ⓒ 전주국제영화제



예견할 수 없이 아이들을 향해 쉴 새 없이 행해지는 폭력과 고통은 불현듯 그들에게 다가온다. 그 순간을 영화는 여러 번 포착한다. 어느 한 장면도 맘 놓고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이 없다. 폭력이 행해지는 긴 시간이 흐른 뒤, 가해자가 사라진 후 화면에 보이는 건, 쥐죽은 듯 숨어 있던 아이들이다. 앵글은 긴 시간을 한 호흡으로 멈춰 놓는데, 조금만 움직이면 앵글 밖에서는 두려움에 어쩔 줄 모르는 아이들이 숨을 졸이고 있다. 사회와 어른은 이 앵글 안에서만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자 한다. 그 앵글 밖에서 자행되고 있는 일들은 그들의 지나친 관심을 무색하게 만들 뿐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괴로웠던 장면은 여타의 폭력장면은 아니다. 바로 낯선 동산에서 이루어지는 흑인 소년과 백인 소년의 대화다. 괴롭힘을 당하던 세 소년 중 한 명인 세바스찬은 큰 나무에 갑자기 올라가 흑인 소년에게 더이상 따라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세바스찬은 보는 관객조차도 진심으로 묻고 싶었던 "도대체, 왜 우리를 데리고 다니냐?"는 말을 건넨다. 흑인 소년 중 한 명이 대답한다.

"흑인 소년 다섯 명이 핸드폰을 달라고 했을 때, 보여준 너가 잘못인 거야!".

이 말은 은연중 자신의 행동이 이미 못된 짓이며,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뜻이다. 또한 그런 행위 자체가 자신(주변인 혹은 타자)이 스웨덴 사회에서 어떤 존재로 취급받고 있는 지를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그런 대사를 하게끔 권유했을 감독의 모습을 생각해보니, 더욱 괴롭지 않을 수 없었다.

끊임없이 플레이(재생)되는 지옥경

 끔찍하게 자행되는 폭력의 모습을 연기한 흑인소년들

끔찍하게 자행되는 폭력의 모습을 연기한 흑인소년들 ⓒ 전주국제영화제



그야말로 지옥경이다. 이 영화에서 아이들이 견뎌내야 할 시간은 불과 몇 시간이 되지 않지만, 이상하리만치 길게 느껴진다. 그들(흑인 소년들)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그게 바로 지옥경인 것이다. 부모는 아이를 괴롭힌 흑인 소년을 윽박지른다. 어린아이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지나가는 시민은 또 그런 부모를 나무라지만, 달라질 게 없다. 마지막에 가서는 흑인 소년의 그런 폭력 행위 자체가 무감각해질 만큼 다른 결말을 내보인다.

소년 중 가장 고가의 귀중품(클라리넷)을 빼앗겼던 욘은 학예회에서 클라리넷 연주를 선보인다. 분명히 욘은 흑인 소년들에게 자신의 것을 빼앗겼기 때문에 결국에는 없어야 하지만, 그 비싼 클라리넷을 다시 가지고 있다. 욘의 표정은 아무 변화도 없고, 흑인 소년들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연주를 보일 뿐이다. 순간, 그 장면은 무시무시하리만치 피부의 움직임을 증폭시킨다.

흑인 소년에게 그 귀한 물품들을 다 빼앗기고도, 트램(전철) 안에서 승무원에게 고가의 벌금을 부여 당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소년의 표정을 다시 한번 이해하게 됐다. 폭력을 행사했던 흑인 소년에게도 절대로 이겨낼 수 없는 계급이 존재하는 현실. 그러니 지옥경은 끊임없이 플레이(재생) 된다. 생긴 게 어떠하건. 사는 게 어떠하건 말이다.

덧붙이는 글 플레이(2011) / 전주국제영화제 시네마페스트 영화궁전 부문 / 119분 / 5월 2일, 5월 4일 상영됨.
전주국제영화제 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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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전주국제영화제 관객평론가 2008 시네마디지털서울 관객심사단 2009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관객심사단 2010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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