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계속 날고 또 날 수밖에 없는 거지. 그렇게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 잠을 청하며 쉬지. 평생 딱 한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야."

지난 3월 24일 새벽 KBS 1TV에서는 <아비정전>이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비록 더빙된 성우의 목소리였지만 장국영의 고독한 얼굴만은 브라운관 속에서 독야청청 빛나고 있었습니다.

 <아비정전> 속 장국영과 장만옥

<아비정전> 속 장국영과 장만옥 ⓒ 스폰지


벌써 9년입니다. 2003년 4월 1일 홍콩의 만다린 호텔 24층에서 투신자살한 배우 장국영의 만우절 농담 같은 기일 말입니다. 그가 죽은 호텔 앞에 추모의 발길이 이어지는 것도, 포털 검색어에 장국영이란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이 벌써 9년째란 이야기지요.

소설가 김경욱이 <장국영이 죽었다고?>란 동명소설을 내고 그 작품이 동명의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만큼, 장국영의 죽음은 1970년대생들에게는 한 시절이 지나간 것 같은, 그리고 젊은 시절의 <화양연화>를 떠올리게 하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허나 그의 동성애 이력도, 연인으로 알려진 당학덕에게 상속됐다는 460억의 재산과 관련한 의혹도 모두 '발 없는 새'가 남긴 날갯짓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의문의 자살로 더욱 드라마틱하게 완성된 죽음 뒤에 남은 건 역시 그의 유작들뿐이겠지요. 거짓말이 넘쳐나는 세상에 그의 자살만큼이나 드라마틱하고 영화다웠던, 살아있다면 올해로 56세가 되었을 장국영의 '결정적 장면'들을 꼽아 봤습니다.

 영화 <천녀유혼> 속 장국영과 왕조현

영화 <천녀유혼> 속 장국영과 왕조현 ⓒ 비디오코리아



<천녀유혼>(1986)

최근 리메이크된 <천녀유혼>의 '섭소천' 유역비는 왕조현 만큼이나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홍콩의 신예 여소군은 장국영을 출세시킨 바로 그 '영채신'의 미모와 존재감을 따라잡을 순 없었습니다. 오리지널에서 지금껏 한국 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왕조현과 장국영의 키스신만큼이나 말이죠.

판타지와 멜로, 호러를 뒤섞은 <천녀유혼>은 3편까지 제작(3편에서 왕조현의 파트너는 양조위였습니다)되면서 홍콩영화 붐에 일조를 했지요. 여기서 장국영은 '어리버리한' 만년서생이자 순수함의 결정체인 영채신을 연기하며 범아시아팬들의 뇌리에 자신을 각인시키깁니다. '꽃미남'이란 수식어가 없던 시절 절정의 미모를 뽐내면서 말이죠.

 영화 <영웅본색2>의 클라이막스 장면

영화 <영웅본색2>의 클라이막스 장면 ⓒ 클래식시네마



<영웅본색 1, 2>(1986, 1987)

그때까지 장국영은 형보다는 동생이 어울리는 나이였지요. 아니 영화 속에서 '고독'과 언제나 함께였던 장국영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형'이나 '형제' 또는 '가족'과는 어울리지 않는 배우였습니다. 홍콩의 설날용 코미디영화의 시초가 된 <가유희사>에서 주성치와 형제로 등장한 것을 제외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형님'들 영화인 홍콩 느와르의 효시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의 동생을 연기한 건 꽤나 도드라져 보입니다. 특히나 범죄자인 형 소마와 갈등하는 형사 소걸은 드라마를 책임지는 캐릭터이기도 했습니다. 2편의 클라이맥스에서 죽어 가는 장국영이 공중전화박스 안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 역시 주제곡과 함께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지요.

 영화 <패왕별희>의 포스터

영화 <패왕별희>의 포스터 ⓒ 우일영상



<패왕별희>(1993)

1993년 당시 동성애 연기는 꽤나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특히나 남성적인 장풍의에게 보내는 장국영의 눈빛은 칸 진출작인 첸 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의 하이라이트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경극 특유의 분장을 하고선 '가장'을 해야 하는 두지의 운명을 두고 훗날 장국영의 개인사를 연결시키는 해석도 종종 나왔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 후 첸 카이거 감독과 다시 만난 <풍월>(1997)은 비록 <패왕별희> 만큼의 주목을 받진 못했지만, 장국영의 퇴폐적인 분위기만큼은 격동의 중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 오롯이 새겨 있습니다. 장르영화의 분위기가 팽배한 홍콩영화사 속에서 장국영이 연기한 몇 안 되는 굵직한 역사드라마이기도 하고요.

 영화 <동사서독> 속 장국영

영화 <동사서독> 속 장국영 ⓒ 모인그룹



<동사서독>(1995)

지금은 양조위가 완벽히 그의 자리를 꿰찼지만, <아비정전>(1990)을 시작으로 <해피투게더>까지 왕가위 감독 초기작들의 페르소나는 온전히 장국영의 몫이었습니다. 그 중 '발 없는 새' 아비를 연기한 <아비정전>과 함께 "버림받기 싫어 먼저 버리는" 고독한 남자를 연기한 <동사서독>은 그 절정이기도 했지요.

특히나 이어지지 못하는 애달픈 인연을 연기한 장만옥과의 멜로는 사람들의 인연을 무협이라는 장르 속에 새겨 넣은 <동사서독>의 화룡정점과도 같았습니다. <동사서독>의 배우들이 고스란히 연기한 홍콩영화 특유의 '짬뽕 코미디 <동성서취>(1993) 속 장국영의 코믹 연기와 비교해 보며 추억을 길어 올리는 일이 되겠네요.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에서의 장국영과 양조위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에서의 장국영과 양조위 ⓒ 모인그룹


<해피투게더>(1997)

임청하와 연기한 무협영화 <백발마녀전>(1993), 원영의가 남장을 한 로맨틱 코미디 <금지옥엽>(1994), 홍콩판 <오페라의 유령>이었던 <야반가성>(1994), 역시 고인이 된 매염방과 연기한 <연지구>(1987), 유작이 된 호러 <이도공간>(2002) 등 20대부터 배우로 활동한 장국영은 참으로 다채로운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 중 양조위와 출연하고 왕가위 감독이 연출한 <해피투게더>를 마지막으로 꼽은 건 동성애자로 알려진 장국영이 마지막으로 현대물에서 게이를 연기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영화 속 연인 보영과 아휘가 주고받는 "우리 다시 시작하자"란 대사 때문일 겁니다.

이미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인연을 다시 시작하고 있을 '발 없는 새'여, 부디 영원토록 편히 잠드시길.

장국영 양조위 천녀유혼 영웅본색 해피투게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