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오후 3시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삼성과 KCC의 경기는 특별했다. 삼성 선수들은 창단 34년을 맞이해 추억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임했다. 2008년부터 매년 하는 이벤트였다. 

이날 더욱 뜻깊은 행사가 있었다. 제12회 김현준농구장학금 전달식이 있었다. 천기범(부산중앙고 2년), 최준용(경복고 2년), 장태빈(송도중 3년), 권혁준(용산중 2년)이 받았다. 총 4명은 810만 원의 장학금과 장학패를 받았다.

 지난해 김현준 농구 장학금 시상식 모습

지난해 김현준 농구 장학금 시상식 모습 ⓒ 삼성썬더스


노력으로 슛을 만들고 잔가지처럼 재능을 뻗치다 

김현준은 183cm의 평범한 신장, 보통은 절대 넘지 않는 운동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끊임없이 노력했다. 농구대잔치 통산 238경기 출전, 연속 3회 득점왕(1889-1992), 통산 6063득점(1위), 통산 어시스트 712개(1위)를 기록했다. 통산 1407개 3점슛 성공으로 경기당 평균 5.9개를 넣었다. 실로 놀라운 수치다. 

김현준은 1988년 농구대잔치에서 삼성에 우승을 안기며 MVP(최우수선수상)에도 올랐다. 1987년부터 6년간 농구대잔치 베스트5에도 이름을 올렸다. 1981년부터 12년간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한국농구 '슈터계보'를 이었다. 

김현준은 금성초등학교 5학년 시절 코치 권유로 농구를 시작했다. "키도 작고 탄력도 부족하다"고 스스로를 판단한 김현준은 남들 보다 배로 노력했다. 그 결과물이 슛이었다. 하루에도 수천 번씩 슛을 던지며 몸에 감각을 새겼다. 뱅크슛과 몸 중심이 좌우로 흔들린 상황에서도 던지는 슛은 김현준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요즘 선수들 중 몇몇은 백보드를 이용해 자유투를 넣는다. 이 '백보드 자유투'의 원조는 김현준이다.

광신중학교와 광신상고, 연세대를 거친 김현준은 1983년에 삼성에 입단했다. 입단하자마자 주전 멤버로 활약하며 '전자슈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현대와 치열한 라이벌 구도 속에서 얻은 멋진 별명이었다. 김현준은 코트 이곳저곳을 휘저으며 정확한 뱅크슛을 넣었다.

1992년 1월 20일 모교 연세대와 경기서 40점을 올리며 이충희가 갖고 있던 4412점보다 28점 많은 4440점을 올렸다. 이후 농구대잔치 최초 6000점 돌파도 김현준의 몫이었다. 연세대 출신 김현준과 고려대 출신 이충희는 1980년대 농구대잔치 양대 슈터였다.

김현준은 슛만 잘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정확한 슛을 바탕에 두고 돌파 능력도 뛰어났다. 또한 패스를 할 줄 아는 선수였다. 1994년 1월 7일 산업은행과 경기서 농구대잔치 사상 첫 600어시스트도 돌파했다. 농구를 알고 했다. 

1994-1995 농구대잔치를 마친 1995년 3월 3일 김현준은 은퇴를 선언했다. 35세였다. 당시 더 뛸 수 있지 않느냐는 물음에 "전후반 고비서 5분 뛰는 건 40살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추해 보일까 걱정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후회하지 않는다"며 은퇴와 관련해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농구코트에서 영원히 잊혀 지지 않는 김현준이 되고 싶다"며 지도자로서 새 출발을 다짐했다.  

영원한 '삼성맨', '전자슈터' 김현준

 故 김현준

故 김현준 ⓒ 삼성 썬더스

김현준은 한창 프로화가 논의되던 시절에도 의식이 깨어있었다. "프로화 해야 한다. 장래 보장이 불안해 현역 선수 절반쯤이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프로화 해야 한국 농구가 한 단계 도약한다"고 앞을 내다봤다. 

은퇴 후 김현준은 미국 UCLA로 유학을 떠났다. 이듬해 유학을 마치고 온 김현준은 다시 '삼성맨'이 됐다. 1996년 3월 삼성 코치를 맡았다. 1997-1998 프로농구 개막을 앞두고 감독대행을 맡기도 했다.

시즌 개막 경기인 기아와 SBS의 경기가 있던 날 계약기간이 2년 남은 삼성 최경덕 감독이 감독직을 그만뒀다. 성적부진에 따른 자진 사퇴로 알려졌지만, 사실상 해임에 가까웠다는 평가가 많았다. 김현준은 어지러운 팀 분위기를 추스르고 감독대행으로 시즌을 맞았다. 이충희(당시 LG) 강정수(당시 SK)와 함께 3번째 30대 감독이 되는 순간이었다.

1999년 10월 2일 오전 10시 지하철 분당선 백궁역(현재 정자역) 부근 도시고속화도로를 달리던 택시와 중앙선을 넘어온 승용차가 충돌했다. 택시에는 김현준이 타고 있었다. 삼성은 시즌 개막을 한 달 앞두고 막바지 전지훈련 중이었다.

김현준은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으나 최악의 경우가 일어났다. 그렇게 '전자슈터' 김현준은 우리 곁을 떠났다. 39세의 젊은 나이였다. 농구계는 슬픔에 빠졌고 뉴스 속보가 전국에 퍼졌다. <체험 삶의 현장>에 출연해 땀을 흘리는 등 김현준은 이미 농구계를 넘어선 사회적 유명인이었다. 대한민국 전체가 충격을 받았다. 

삼성은 1999년 11월 10일 수원체육관에서 신세기를 상대로 개막 경기를 가졌다. 이날 삼성은 '전자슈터' 김현준을 되새겼다. 김현준의 등번호 10번 영구 결번식을 가졌다. 프로 최초 영구 결번식이었다.

3쿼터까지 59-65로 신세기에 뒤진 삼성은 4쿼터 들어 역전에 성공해 84-82로 승리했다. 영구결번식이 갖는 의미를 더욱 높인 것이다.

전자슈터의 바람이 담긴 '김현준농구장학금'

김현준농구장학금은 삼성이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한국 농구계의 전설인 '전자슈터' 故 김현준을 기리기 위해 2000년에 만들었다. 지난해부터 삼성 연고지인 서울에서 전국으로 확대 적용했다. 전국 중고교 농구지도자 추천과 해당년도 각종 기록을 토대로 장학생을 선정한다.

2000년에는 1승당 20만 원, 2002년부터 1승당 30만 원씩 적립했다. 현재까지 총 41명에게 8580만 원을 전달해왔다. 1회 수상자 양희종(KGC인삼공사)를 비롯해 박찬희(KGC인삼공사) 박성훈, 유성호, 이관희, 김태형(이상 삼성), 윤여권(KT), 민성주(오리온스) 등 총 11명이 KBL 선수가 됐다.

25일 제12회 김현준농구장학금 전달식에는 '전자슈터'를 빼닮은 장녀 김세희씨가 장학금을 전달했다. 

한국 농구계는 정말 뛰어난 선수를 너무도 빨리 잃었다. 하지만 "농구코트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김현준이 되고 싶다"던 故 김현준의 바람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

덧붙이는 글 http://blog.naver.com/kom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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