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영화 형식을 빌린 만큼 두 배우는 장면에 맞게 발성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고. 감독은 둘의 연기력에 이를 맡겼다고 한다. <아티스트>의 한 장면.

무성영화 형식을 빌린 만큼 두 배우는 장면에 맞게 발성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고. 감독은 둘의 연기력에 이를 맡겼다고 한다. <아티스트>의 한 장면. ⓒ 영화사진진


의심할 것도 없이, 스타는 언제나 외로운 법이다. 무대 위, 스크린 속 화려함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고독함과 흥망성쇠의 쳇바퀴 말이다. 무성영화 시대라고 달랐겠는가. 영원할 것 만 같던, 애완견까지도 사랑해줬던 관객들은 그러나 유성영화의 등장에 영화배우 조지(장 뒤르자댕)에게 등을 돌리고 만다. 그리고 상처입어 자포자기해 버린 이 남자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다.

올 아카데미 10개 부문 후보라는 명성이 괜한 게 아니다. 미 영화사이트 IMDB 관객 평점 8.4, 로튼토마토 비평가 신선도 97%라는 평점은 이 한 편의 흑백영화가 관객과 비평가 모두를 미소 짓게 만들고 있다는 증거다. 23일까지 관람한 3만 7천 관객 또한 분명 행복함을 맛봤을 것이다.

<아바타> 이후 3D와 4D가 도래한 이 21세기에 흑백 무성영화 스타일의 로맨스로 우리를 인도하는 영화 <아티스트>. 미국의 유력한 비평가인 <롤링스톤즈>지의 피터 트래비스는 <아티스트>를 가리켜 "액션, 웃음, 눈물, 그리고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까지. 아카데미상이 어떻게 저항할 수 있겠는가"라는 매혹적인 평을 남겼다.

주연인 장 뒤자르댕의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을 필두로 <타임>지가 뽑은 '최고의 영화' 1위, 올 골든글러브 최우수작품상, 남우주연상 수상 등 미국과 영국의 모든 영화상을 휩쓸고 있는 혁혁한 전과를 비단 서구인들의 시선이라 재단할 필요는 없다. 소설가 김탁환의 "영화를 향한 따뜻한 첫마음 혹은 결핍이 주는 새로운 상상력. 별 다섯"이란 평 또한 <아티스트>가 지닌 보편적 감성을 확인케 한다.

1920~30년대를 배경으로 한 무성영화 스타의 사랑과 몰락, 그리고 재기를 그린 <아티스트>는 보통의 젊은 세대에게 낯선 '옛날 영화'에 대한 향수(?)는 물론 삶에 대한 애잔함과 긍정을 회복케 만드는 힘을 지닌 작품임에 틀림없다.

 단역배우에서 유성영화의 스타로 발돋움하는 페피 역의 베레니스 베조.

단역배우에서 유성영화의 스타로 발돋움하는 페피 역의 베레니스 베조. ⓒ 영화사진진


"무성영화라는 환상적인 작업, 참으로 행복하다"

"무성영화는 굉장히 정서적이고 감각적이다. 유성영화처럼 텍스트를 따라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스토리텔링의 기본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이야기는 오직 당신이 창조한 감정들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다. 이런 환상적인 작업을 처음 생각했던 대로 내놓을 수 있어 다행이다. 참으로 행복하다."

메가폰을 잡은 프랑스 출신 미셸 아자나비슈스 감독의 말마따나, <아티스트>는 상영시간 내내 '행복'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건 비단 흑백영화나 무성영화를 접한 경험이 있는 영화 마니아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중후함과 유머를 겸비한 이 조지란 인물이 겪는 희로애락의 정서를 쫓아가다보면 어느새 완벽하게 동화돼 미소 짓고 눈물을 훔치게 될 것이다.

이야기 자체는 그 만큼 보편적이고 친숙하다. 조지의 몰락과 그를 흠모했던 신인배우 페피의 성장, 상처받은 남자와 머뭇거리면서도 그에게 헌신하는 여배우의 이야기는 오히려 통속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흔하고 단순하게 느껴질 수 있는 서사와 흑백 화면의 빈 공간을 <아티스트>는 음악과 자막, 그리고 배우들의 표정연기에 집중하게 만드는 형식을 통해 지극히 영화적이고 인간적인 감정으로 채워낸다.

그렇게 현대영화에서 자극적이고 현란한 촬영이, 배배꼬아 놓은 이야기 구조가, 거대 예산을 들인 특수효과와 물량공세가 대신하고 있는 영화적 재미를 <아티스트>는 단호히 거부한다. 허나 무성영화 그 자체를 재현할 생각도 없다. 흑백무성영화라는 형식과 시대상, 이 영화 내외적인 고증과 리얼리티가 둘의 만남과 헤어짐, 재회라는 멜로드라마 장르에 온전히 녹아들었다고 할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조지 역의 장 뒤자르댕.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조지 역의 장 뒤자르댕. ⓒ 영화사진진


영화에 대한 영화이자 기술과 세대에 대한 메타포

그렇다고 <아티스트>가 야심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 자체로 영화에 대한 영화라는 하위 장르를 품고 있는 <아티스트>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던 시기, 조지의 좌절을 통해 기술과 시대변화가 개인에게 주는 영향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무성영화를 고집하며 메가폰을 직접 잡은 조지가 몰락하는 과정을 조지의 변화를 한 예술가의 고집과 집념, 그리고 진화로 읽어도 무방하다.

명장면 하나. 유성영화의 도래로 인기를 잃은 조지는 대기실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환각에 빠진다. 하지만 감독은 관객에게 주변 사물의 소리를 모두 들려줌으로서 조지의 공포를 극대화한다. 무성영화 형식에서 살짝 비켜나가는 이 장면은 물론 조지의 감정을 극대화하는 영화적 장치다.

하지만 좀 더 인식을 확장시킨다면, 조지의 이러한 공포는 IT와 3D, 그리고 '스마트'가 점령한 21세기에 적응해나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악몽과도 비견된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건 물론 페피를 위시한 사람들의 애정이다. 빤하고 게으른 결말이라고?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세밀하게 구축해 놓은 감정들과 또 이에 집중하게 만드는 형식들에 취하다보면, <아티스트>의 이러한 장르적이고 또 낙관적인 세계관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떠올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두 주인공의 해피엔딩, 즉 유성영화 시대의 뮤지컬 형식에 맞춰 유쾌한 탭댄스를 선보이는 마지막 장면은 러브스토리의 완성 이전에 이러한 세계관의 매혹적인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아티스트>의 주역들. 좌로부터 조지 역의 장 뒤자르댕과 미셸 아자나비슈스 감독, 페피 역의 베레니스 베조. <아티스트>는 프랑스와 할리우드의 인력과 자본이 행복하게 만난 만난 작품이다.

<아티스트>의 주역들. 좌로부터 조지 역의 장 뒤자르댕과 미셸 아자나비슈스 감독, 페피 역의 베레니스 베조. <아티스트>는 프랑스와 할리우드의 인력과 자본이 행복하게 만난 만난 작품이다. ⓒ 영화사진진


올 아카데미 작품상은 따놓은 당상?

우아하고 세련되며 또 지적인 이 흑백영화가 올 아카데미 작품성을 차지할 가능성? <타짜>속 아귀의 명대사를 빌려온다면, "작품상 수상에 내 손모가지를 건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마틴 스콜세지, 우디 알렌, 스티븐 스필버그, 테렌스 멜릭 등 이미 검증된 거장들의 신작이 즐비하다 해도 각종 영미권의 각종 시상식과 평론가, 관객들의 반응에서 이미 감지되고 있다.

요 몇 년간 코엔형제를 비롯해 독립영화 출신 감독들의 영화들을 지지하며 보수성을 탈피하고자 노력해온 아카데미 위원회 회원들이라 할지라도, 이 매혹적인 동시에 혁신적인 영화를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국내 평단에서도 알렉산더 페인의 <디센던트>, 마틴 스콜세지의 <휴고>를 제치고 <아티스트>의 수상에 무게가 실리는 분위기다.

또 하나, 지난 16일 개봉한 이 영화가 한국에서 아카데미 효과를 누릴 수 있을지도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아티스트>는 분명 3만이 아닌 30만 이상에게 해피바이러스를 퍼트릴 수 있는 영화다. 지레 흑백영화라는 형식에, 스타의 부재에, 블록버스터나 장르영화가 아니라는 선입견에 관객들이 겁을 먹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부디 그때까지 현재 40여개인 상영관이 무사하기를.

아티스트 아카데미시상식 오스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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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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