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포스터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포스터 ⓒ 팝엔터테인먼트

지금까지 영화 속 첩보원들은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임스 본드('007' 시리즈)와 제이슨 본('본' 시리즈), 에단 헌트('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화려한 액션과 잘생긴 얼굴, 뛰어난 두뇌로 보는 이들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첩보영화라 하면 대개 이런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나와 화려한 액션에 대박 재미를 안겨줄 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그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 영화가 있다. 기발한 신제품이나 본드걸과의 달콤한 로맨스는 없더라도 적어도 화끈한 액션은 있을 줄 알았다. 제이슨 본 정도는 아니라도 근육 빵빵하고 싸움 잘하는 누군가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흔한 액션장면도, 눈길을 확 사로잡는 장면도 없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게리 올드먼, 콜린 퍼스, 톰 하디, 베네딕트 컴버배치, 시아란 힌즈, 존 허트, 마크 스트롱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총 출동한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이야기다. 지난 2월 9일 개봉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마치 '명품배우 종합선물세트'처럼 연기력으로 승부한다는 배우들만 모아놓았다.

도대체 어떤 영화기에 이 쟁쟁한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을까? 2008년 <렛미인>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이 연출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스파이 소설의 대가로 손꼽히는 존 르 카레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였다. 1970년대 말 영국 BBC에서 드라마 시리즈로 만들어 인기를 모았으며, 영국 정보부 내에서 활동한 소련의 이중간첩이라는 충격적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화려한 날들은 가고...

한때 모든 여인네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말, '내 안에 너 있다.' 그러나 보안을 생명으로 하는 정보기관에서 이 말은 바로 스파이, 첩자가 있다는 말씀.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영화는 냉전시대를 지나 화해 분위기(데탕트)가 무르익던 1973년 영국의 비밀 정보국(암호명 서커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커스 수뇌부에 침투한 소련의 이중스파이를 찾아내기 위해 서커스의 국장 컨트롤(존 허트 분)은 헝가리 작전을 지시하지만, 작전이 실패하면서 사임하게 되고 컨트롤의 오른팔인 스마일리(게리 올드먼 분) 역시 함께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얼마 후 컨트롤은 지병으로 사망하고 정부 당국에 의해 스마일리는 비밀리에 스파이를 찾는 임무를 맡게 된다.

영화는 스마일리의 기억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복잡하게 오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른바 미·소를 중심으로 한 냉전이란 시대적 상황은 정보국으로서는 그야말로 전성기였다. 분명한 적이 있고, 그 적을 통해 자신들의 가치를 한껏 드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마일리의 기억 속 화려하고 은성한 크리스마스 풍경은 그런 분위기를 잘 드러내준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한 장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한 장면 ⓒ 팝엔터테인먼트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어떤가? 화려했던 지난날은 갔다. 큰 존재감 없이 미·소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로 전락해 버린 1970년대 영국의 모습은 우울하기만 하다. 서커스의 최고 수뇌부 회의 자리에서 로이(암호명 솔저, 시아란 힌즈 분)가 내뱉는 대사에는 자존감을 잃어가는 당시 영국의 우울하고 쓸쓸한 소회가 잘 드러나 있다.

"지난 25년간 우린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고군분투 해왔어요. 우리는 25년간 제3차 대전을 막아온 유일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옛 영광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의 외침일 뿐이다. 정보국의 현실 역시 조국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 데탕트가 가져온 미·소 간의 화해 분위기는 미국의 CIA와 소련의 KGB 사이에 낀 그들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들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민은 날로 깊어지게 되었다.

스파이, 그 쓸쓸함에 대하여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무겁고 음울한 잿빛 분위기는 이런 시대상황을 잘 드러낸다. 따라서 '나만 잘 났다'를 외치며 온갖 화려한 액션과 기교로 잔뜩 멋을 부리는 허세 가득한 제임스 본드는 이 영화에 없다. 지극히 현실적인 스파이만 있을 뿐이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철저히 혼자인 존재로 유령처럼 존재하는 스파이.

스마일리는 그런 스파이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스마일리의 외모, 걸음걸이, 눈빛, 표정이 보여주는 쓸쓸함이 스파이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듯하다. 평범한 듯 자신을 숨기며 살아야 하는 서글픈 존재가 스파이라는 사실을 영화는 보여준다. 짙은 뿔테 안경과 회색 코트 속에 가려진 스마일리는 너무 평범해 사람들 속에 있어도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것, 그것이 스파이다. 존재가 알려지는 순간 스파이로서의 가치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스파이는 쓸쓸하다. 같은 공간에서 웃고 떠들며 수십 년을 동료로 보낸 이들에게도 철저히 자신을 감추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도 조직의 일부라 눈치도 봐야 하고, 줄도 서야 한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한 장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한 장면 ⓒ 팝엔터테인먼트


인생의 절반은 줄서기다. 지하철을 탈 때, 엘리베이터를 탈 때, 심지어 화장실을 갈 때도 줄을 잘 서야 하니, 스파이라고 예외이기야 하겠는가. 줄을 잘못 서서 망한 대표적인 사람이 토비(암호명 스파이, 다비드 덴시크 분)이다. 서커스의 국장인 컨트롤에 의해 발탁되었지만 토비는 컨트롤이 아닌 퍼시(암호명 팅커, 토비 존스 분)에게로 줄을 섰다.

비행장에서 스마일리는 토비에게 말한다. "자넨 줄을 잘못 섰어"라고. 그 모습에서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합종연횡하며 줄서기에 여념 없는 우리 정치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대의나 신념과 상관없는 줄서기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보인다. 영화는 마치 러시안 룰렛을 하듯이 시종일관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을 준다.

네티즌 평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호불호가 분명한 영화다. <007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처럼 동적인 액션을 즐기는 이라면 고개를 돌리겠지만, 분위기나 미세한 소리, 추리력 등을 통해 느껴지는 정적인 긴장감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충분히 이 영화의 매력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 정보국에 복귀한 스마일리가 수뇌부 6명이 회의하던 회의실에 혼자 앉아 있다. 그런데 카메라를 향해 보내는 그의 야릇한 미소에서 왜 문득 <유주얼 서스펙트>의 카이저 소제가 생각나는 걸까? 영화는 끝났지만 스마일리의 그 미소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미묘한 파장을 남기며 뇌리에 남는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토마스 알프레드슨 게리 올드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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