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당시 관람한 관객들을 실신시킨 데이빗 린치의 첫 작품 <이레이저 헤드>. 중산층의 정신병적인 긴장과 환상을 표현한 작품으로 컬트의 고전으로 추앙받고 있다.

개봉 당시 관람한 관객들을 실신시킨 데이빗 린치의 첫 작품 <이레이저 헤드>. 중산층의 정신병적인 긴장과 환상을 표현한 작품으로 컬트의 고전으로 추앙받고 있다. ⓒ Eraserhead

예술학교에 진학했지만 낙제. 직장을 구하며 시작한 사회생활도 거듭되는 해고의 연속. 이후 미술 학교를 거쳐 미국영화 연구소에 가서도 그의 인생은 실패자처럼 보였다.

감독 데뷔 작품으로 구상한 이야기는 기형아를 소재로 한 괴상한 영화. 예정대로라면 두 달 만에 끝날 촬영을 5년 만에 겨우 마치고 개봉한 영화의 제목은 <이레이저 헤드>.

소규모 영화관에서 25명의 관객에게 처음 상영된 영화는 구토를 불러일으킨다며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다른 누구의 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함 때문인지 놀랍게도 이후 4년여간 장기상영됐다.

이렇게 영화감독 데이빗 린치의 데뷔작 <이레이저 헤드>는 1977년 이후 컬트무비의 고전이 되어 버렸다.

그의 작품만큼이나 독특한 인생을 산 린치는 시나리오 없이 즉석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천재 감독으로 일컬어진다. 그가 만든 작품들은 몽환적이고 아름답다. 하지만 어둡고 비극적이며 음울하기까지 하다. 2010년 13번째 영화를 발표한 것으로 알려진 그. 아마 그의 작품을 전부 관람한 관객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단순히 우울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괴하고 폭력적이면서 처절할 정도로 안타깝다. 악마적인 어둠 속에서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읽어 낼 수 있는 사람만이 린치의 광팬을 자처할 것이다. 유년 시절 부모님 몰래 TV에서 <트윈픽스>를 보며 공포에 떨고, 청소년기엔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통해 짙은 염세주의에 빠져버린 나조차도 그의 모든 작품을 섭렵하기엔 껄끄러움을 느낀다.

60세가 넘은 그가 14곡의 음악을 직접 작사, 작곡해서 앨범을 내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선뜻 들어볼 생각을 하진 않았다. 영화감독이 직접 음반을 발표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지만, 그는 그동안 자신의 영화에서 작곡의 재능을 선보였기 때문에 전혀 의외라고 할 수는 없다. 장르는 일렉트로니카지만 마냥 신나는 느낌을 기대하기엔 이르다. 그의 영화들이 무시할 수 없는 기괴한 족적을 그리고 있기에.


 지난 달 발매된 데이빗 린치의 첫 정규 앨범. 기존에 그가 작업한 영화 음악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새로 작곡한 14곡의 신곡이 담겨있다.

지난 달 발매된 데이빗 린치의 첫 정규 앨범. 기존에 그가 작업한 영화 음악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새로 작곡한 14곡의 신곡이 담겨있다. ⓒ MUSICAROMA

아니나 다를까 첫 곡부터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의 공개되지 않은 삽입곡 같다. 보컬로 참여한 캐런 오(Karen O)가 아무리 자신의 록 그룹 예예예스(Yeah Yeah Yeahs)에서 신나는 목소리를 들려줬더라도 소용없다.

린치가 만든 노래를 부르는 순간, 그녀는 그로테스크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듯하다. 밀려오기를 반복하는 파도의 선율 같은 기타 음은 청자를 일종의 환각상태로 빠뜨리기에 충분하다. 마무리는 역시 악몽에서 깨어나듯 독특한 괴성이다.

이어지는 곡의 배열을 보면 정말 린치스럽다. 방금 악몽에서 벗어난 사람을 또 다시 이어지는 꿈의 미로 속으로 안내하는 듯 몽환적인 도입부가 시작된다. 적당한 리듬감이 반복되면서도 심상치 않은 효과음이 군데군데 자리 잡은 'Good Day Today'는 기계음으로 변조된 린치의 목소리가 거부감 없는 흥겨운 느낌을 형성한다.

이어지는 'So Glad'는 앨범의 타이틀곡이지만 비주류 컬트영화 감독의 작품답게 전혀 대중적이지 않다. 차라리 다음 곡인 'Noah's Ark'가 듣기엔 훨씬 부담이 적다. 물론 분위기가 어둡긴 하다. 마치 싸이코 연쇄살인범의 읊조림을 듣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 곡은 분명히 청자를 사로잡는 특유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어지는 곡들도 분위기로만 본다면 일상생활 속 배경음으로 깔기엔 다소 부담스러운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 앨범의 음울한 어둠 속에서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린치의 팬이 될 자질이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나마 흥겨운 곡인 'Pinky's Dream'이나 디스코 음악 같은 그루브를 형성하고 있는 'Stone's Gone Up'으로 만족해야겠지만.

데이빗 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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