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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라면 공연히 그럴 때가 있다. 말쑥하게 차려입고도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의 와인이 아닌, 시장 좌판에서의 거친 말술이 그리워지는.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탁 소리가 나게 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왠지 쓰디쓴 표정으로 세상을 조롱하고 싶은 일탈의 유혹.

가장 정갈한 모습으로 살기 위해 힘쓰다가도, 가끔은 되는 대로 구겨지고 싶은 본능. 길들여지지 않은 마초성이라고도 하고, 억눌려진 야성의 표출이라는 진단이 뒤따르기도 하는. 하지만 대부분의 성인들은 스포츠 중계나 액션이 가미된 영상물로 대리만족을 택한다.

이런 기분일 때 영화를 택한다면 필름느와르 물에 빠지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필름느와르는 범죄와 폭력이 가미된 암흑가를 배경으로 사립탐정이나 갱, 폭력배, 팜므 파탈의 여인이 등장하는 것이 정석.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어두운 도시의 이면, 거친 숨소리와 묵직한 액션. 때론 그런 날 것의 비린내가 묘하게 당길 때도 있다.

부산만큼 양면의 모습이 공존하는 도시,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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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을 영화의 도시, 국제적 관광지로 일으킨 데는 BIFF(부산국제영화제)가 큰 몫을 담당했다. 하지만 대중들의 인지도 부분에선 영화 <친구>의 공로도 빼놓을 수 없다. 거칠지만 묵직한 영화 한 편으로 부산에 대한 관심이 급상승 한 것. 주인공은 건달이었지만, 좋은 짜임새와 인상적인 대사들로 인해 항구 부산의 이미지는 오히려 좋아진 케이스다.

국제공항이 자리 잡으며 바뀌긴 했지만, 인천에도 여러 이미지들은 뒤섞여 있다. 화교들이 첫 뿌리를 내린 곳. 거대 항만과 공단의 그림자 밑에 사는 서민들. 수도권에 자리 잡지 못한 이들이 '인 서울'을 목표로 삶의 터전을 이루고, 여러 지방 출신들이 흘러들어온.

영화 <악인은 너무 많다>는 바로 이 곳, 인천을 배경으로 촬영된 느와르 물이다. 건달 출신으로 흥신소를 운영하고 있는 강필(김준배 분).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아, 수틀리면 분신 같은 잭나이프 칼이 춤을 춘다. 하지만 그에게도 소망은 있다. 외국인 남성과 재혼한다는 전처에게서 딸을 데려오는 것. 변호사는 힘들지만 해보겠다고 한다. 문제는 돈.

그때 한 여인이 거액의 착수금을 들고 찾아온다. 박용대라는 남자를 단지 미행하고 사진만 찍어오라는 부탁. 어렵지 않은 일이라 무사히 마치고, 이제는 4대 보험이 적용되는 평범한 직장을 구하려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받은 돈이 분실정지된 수표다.

죽일 듯 쫓아가지만, 의뢰인은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미행하던 박용대마저 실종됐다는 뉴스가 터진다. 분에 받히지만 냉정하게 단서를 찾고 사건을 조립해 가는 강필. 하지만 사건은 거리를 줄 듯 일그러지며 오히려 그의 일상을 파괴해 간다.

단 12회 차 촬영, 저 예산으로 뽑아낸 최상의 결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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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한국영화에는 정통의 느와르 물이 많지 않다고 한다. 한국형 느와르의 효시라 일컫는 <게임의 법칙>을 비롯해 <초록 물고기>, <비열한 거리>, <달콤한 인생> 최근작 <아저씨> 등 훌륭한 미장센을 자랑하거나 흥행과 작품성을 동시에 잡은 명작들은 많지만, 필름느와르하면 떠오르는 B급 이미지들에 걸맞는 영화들은 아니었다.

모두 훌륭한 영화들이지만 칙칙하고 어눌한 필름느와르 같은 분위기보다는, 밝게 잘 다듬어진 매끈한 결과물 같은 인상을 풍기는 것이 사실. 당대 가장 비싼 몸값의 배우들과 명감독이 만나 빚어낸 수작들이지만, 너무나 잘 빚어져 거칠고 투박한 맛은 떨어지는.

이 영화는 무척 컬컬하다. 우선 주연배우부터 그렇다. 젊고 잘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마치 이 영화를 위해 태어난 듯하다. 영화 <이끼>를 보았다면 다른 어떤 배우보다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을 배우 김준배. 그저 눈빛만으로도 '내가 이 바닥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영화가 매우 저 예산으로 제작됐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영화의 평균 촬영 회 차는 60여 회. 명성 있는 감독이 맡고 스타배우가 출연하면 100회를 훌쩍 넘기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런데 모든 촬영을 단 12회 차에 끝냈다고 한다.

언론간담회에서 김회근 감독이 직접 회 차를 밝히자, 믿을 수 없다는 탄성이 터져 나올 정도. 지극히 최소한의 금액인 걸 감안하면 영화가 다시 보인다. '다음에 조금만 더 투자를 받는다면…' 이란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하다.

주목해 볼 명품배우, 김준배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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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의 눈썰미를 가진 이라면 주연배우인 김준배와 여배우 송지은 정도나 알아 볼 정도로 다른 배우들은 낯선 게 사실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게 장점이다. 잘 알던 배우의 변신을 보는 것도 기쁨이겠지만, 생소한 이들이 풀어내는 이야기를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히려 영화에 집중하게 된다.

영화는 시종일관 어둡다. 차이나타운의 빨간 불 빛 정도를 빼놓고, 때론 낮과 밤이 분간 안 될 정도로 어두운 조명을 썼다. 장르적 특성을 충실히 따랐다지만, 조금 갑갑한 것도 사실. 하지만 정공법이다. 기본에 가깝다. 과하게 피가 튀지도, 필요 없이 과장된 욕설을 날리지도 않는다. 적당히 침묵하고, 필요한 만큼만 이야기한다.

시종일관 눅진한 영화를 맞춤복을 차려입은 듯 이끌어 나가는 강필 역의 김준배는 이 영화가 첫 주연. 간담회장을 우렁우렁 울리던 목소리도 매력 있고, 눈빛도 신선한다. 덧붙여 생각 외로 몸매 관리도 잘 돼 있다. 꽃미남 배우들도 좋지만, 애초에 이만큼 역할에 맞는 이들을 쓰는 게 어떨까 싶을 정도로 배역이 잘 어울린다.

결말의 반전이나 마무리가 다소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아쉬움이 있는 건 사실. 하지만 '돈 놓고 돈 먹기'인 영화판에서, 돈을 대 줘도 관객의 마음을 빼앗지 못 하는 영화들이 수두룩한 현실을 감안하면 준수하다. 절실한 노력으로 이 만큼의 결과를 얻어냈다는 데 박수를 보낼만하다. 감독과 배우들의 앞길이 밝아 보여 더더욱 흐뭇하다.

덧붙이는 글 개봉 12월 15일.
악인은 너무 많다 김준배 느와르 인천 김회근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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