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탓이었을까, 나이 탓일까. 갑작스런 발병과 부음(訃音)이 유난히 많았던 가을이었다. 남편 친구의 간암 수술, 뇌 지주막하출혈로 쓰러진 선배, 요양병원에 오래 계시던 89세 친척 어르신의 임종과 장례, 35세 젊은 사람의 교통사고로 인한 뇌사와 장기기증 소식, 거기다가 친정 부모님께서 10년 넘게 품어 안고 기르시던 개의 죽음까지….

죽음이 일상이라지만 막상 닥친 구체적인 죽음의 현실은 잘 적응되지 않는 그 무엇이었다. 14년 동안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단 한 순간도 버틸 수 없는 전신마비 환자에게 죽음이란 어떤 현실이며, 목숨 붙어 있는 현실이란 또 얼마나 죽음에 맞닿아 있는 것일까. 영화 <청원>은 이렇게 삶과 죽음을 양손에 나눠 쥐고 내게 다가왔다.

생명은 누구의 것인가
영화 <청원>  영화 <청원> 포스터

▲ 영화 <청원> 영화 <청원> 포스터 ⓒ 씨너스 엔터테인먼트

이름난 마술사 '이튼', 최고 절정의 시기에 사고로 전신이 마비되었다. 그래도 그는 씩씩하게 일어선다. 비록 몸은 묶여있지만 책도 내고, 라디오 DJ로 프로그램도 진행하며 같은 처지의 환자들에게는 희망이요 모든 사람들에게는 장애를 이겨낸 영웅으로 다시 이름을 날린다.

그런 그가 이제 그만 생을 마치고 싶다며 법원에 '안락사' 청원을 낸다. 12년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극진히 보살펴 온 간호사 '소피아'는 펄쩍 뛴다. 의사도 마찬가지, 친구인 변호사도 마찬가지다. 우여곡절을 끝에 오랜 친구인 변호사가 드디어 변론에 나서고, 전국민의 관심 속에서 안락사 재판이 시작된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고,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교과서에 나오는 답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이튼의 고통. 그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고통과 절망과 외로움에 갇혀 있는 이튼의 확고한 결심에 누구는 눈물어린 설득을, 누구는 비난을, 누구는 힘을 내서 살라고 격려하지만 그 모두를 합해도 이튼의 마음 하나를 다 담아내지 못한다.

생명은 누구의 것인가. 자신의 존엄한 죽음의 방식을 미리 고민해서 결정해 놓는 것이 옳으며, 이것이야말로 죽음준비의 핵심 중 하나라고 강의를 하고 있는 처지지만 이처럼 어려운 문제가 또 어디 있을까.

전신마비 환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안락사 허용이 필요하다는 변호사의 주장에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아주 많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했던 변호사가 마음을 돌이키게 되는 것처럼 이튼 주위의 사람들도 아주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렵고 복잡하다고 해서 안락사 문제를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자리에 서 보는 것이 바로 그 시작이다.

아무리 책을 펴내고 방송을 진행하면서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이제는 더 이상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은 이튼. 옳고 그름 혹은 찬반을 떠나서라도 그의 자리에 앉아보고 그의 눈높이로 소통하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이튼은 꼼짝달싹할 수 없는 작고 답답한 상자 안에 꽉 묶여 살고 있는 것 같을 수밖에.

"제발, 이제 그만!"

이것이야말로 이튼의 마음이다. 두려워 끼어들고 싶지 않을 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바꾸어 놓는다면 아마도 같은 바람을 가지지 않을까. 결국 이튼은 자신의 방식대로 결정을 내리고, 비로소 개인의 삶의 자리를 제대로 보게 된 친구들은 기꺼이 그의 손을 잡는다. 거기에는 눈물도 있지만 기쁨이 더 많다. 자유를 꿈꾸기에.

떠남이 행복이며 사랑의 완성임을 보여주었기에...

영화 <청원>의 한 장면  친구들과의 고별파티에서 웃고 있는 '이튼'

▲ 영화 <청원>의 한 장면 친구들과의 고별파티에서 웃고 있는 '이튼' ⓒ 씨너스 엔터테인먼트


친구들을 불러모은 이튼, 고별파티를 할 참이다. 눈물과 웃음은 얼핏 정반대 같아도 결국 그 뿌리가 하나인 것처럼 삶과 죽음 역시 하나로 이어진 일상. 상상할 수 없는 삶의 어려움에서 그는 자발적으로 빠져나오려고 그리도 애를 썼던 것. 그 꿈이 이제 이루어지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부디 안락사에 대한 찬반만 단순하게 이야기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한 사람의 꿈과 사랑과 기대와 소망을 같이 이야기하면 좋겠다. 그래야만 14년 동안을 옥살이했던 육체와 영혼을 자유롭게 놓아주고 싶어하는 한 사람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 역시 안락사 반대라는 평소의 신념이 이튼을 만난 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경우와 다양한 의견에 대해 귀를 열어 놓을 필요를 확실히 느꼈다. 자신의 존엄한 죽음의 방식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게 만들면서도, 떠남이 행복이며 사랑의 완성임을 보여주었기에 아프지만 따뜻했고 안타깝지만 아름다웠다.

덧붙이는 글 <청원 Guzaarish 2010, 인도>(감독 : 산제이 릴라 반살리 / 출연 : 리틱 로샨, 셰르나즈 파텔, 아디티아 로이 카푸르, 아이쉬와라 라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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