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은 관객을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애니메이션이다. 디즈니나 픽사의 애니메이션, 혹은 올 상반기 돌풍을 일으킨 또 다른 국산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 등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지도, 어른들에게 순수했던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철저하게 계급화 된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돼지의 왕> 포스터

<돼지의 왕> 포스터 ⓒ KT&G 상상마당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은 포스터의 왼쪽부터 경민, 종석, 철이다. 경민과 종석은 위계질서가 촘촘하게 짜인 교실 안에서 밑바닥에 속하는 계급이다. 영화에서는 이런 피지배 계급을 '돼지'라고 비유한다. 그리고 이 돼지들을 지배하는 무리를, 모두에게 사랑받는 '개'로 표현한다.  그리고 '철'이라는 존재는 그런 개들에게 저항하는 돼지의 왕이다. 하지만 그 저항의 수단은 폭력이기에 얼마 못 가 법적인 제재, 즉 퇴학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철은 최후의 저항수단을 준비한다.

철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이때를 기억하며 '그땐 좋았지'라고 말하는 것을 생각하면 참지 못하겠다고. 그래서 지금 이때를 악몽으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다소 과장된 면은 있지만, 불행하게도 영화의 내용과 우리가 사는 현실은 별반 다를 게 없다. 영화에서는 개의 무리, 즉 힘도 세고 공부도 잘 하는 학생들이 위협을 당할 때만 교사가 나타난다. 그리고는 그 교사는 저항하는 철에게 제재를 가한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에 나오는 개들이 합법과 불법을 교묘하게 넘나들며 돼지들을 사육하는 모습이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은가? 이것은 현실의 모습이다. 기득권층은 약자들이 저항하면 불법은 안 된다며 엄중히 처벌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정작 자신들은 그 법을 슬쩍 위반하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이들은 처벌받지 않는다. 법과 제도는 기득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며, 처벌은 가혹하리만치 약자들에게만 적용된다.

여전히 피지배계급에 머물러있는 종석과 경민

 영화 중 한 장면. 계속 맞고 있던 철이 자신을 때리던 이들을 때려눕히자 교사가 등장한다.

영화 중 한 장면. 계속 맞고 있던 철이 자신을 때리던 이들을 때려눕히자 교사가 등장한다. ⓒ KT&G 상상마당


그리고 영화는 이 다음을 묻는다. 철이 죽고 나서 무엇이 달라졌을까? 약자들을 억압하는 구조가 바뀌긴 했나? 돼지 위에 군림하던 개들은 과연 중학교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철의 바람대로 그들은 중학교 시절을 악몽으로 기억할까? 어쩌면 철의 죽음을 좋았던 시절의 단순한 해프닝으로 기억하지 않을까?

"아 맞아. 너 기억나? 그 왜, 이상한 새끼 있었잖아. 완전 깡패 같은 놈. 그래, 그래. 막 칼 들고 다니던 미친놈 있잖아. 칼질해서 결국 퇴학당한 애..."

어쩌다 이들이 모이면 철이를 술 안줏거리로 삼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며, 철이 바라던 대로 지옥 같은 기억을 갖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모든 것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경민과 종석은 그렇지 않다. 어른이 된 종석은 소설가를 꿈꾼다.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은 다른 사람의 자서전을 대필해 주는 일이다. 종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런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끼며 여자 친구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뿐이다. 경민은 아버지의 사업을 접게 하면서까지 자기 사업을 시작했지만 얼마 안 가 망한다. 경민은 빚더미에 올라앉는다. 결국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피지배계급에 머물러 있다.

철의 죽음은 아무 것도 바꾸지 못했다. 영화는 제아무리 돼지의 왕이더라도, 돼지는 그저 돼지일 뿐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불편한 진실을 현실에서 마주하게 된다.

기득권층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을까?

 철이가 죽던 날을 회상하는 장면.

철이가 죽던 날을 회상하는 장면. ⓒ KT&G 상상마당


지난 11월 9일 쌍용차 노동자가 자살했다. 그리고 다음날, 다른 해고 노동자의 아내가 심장발작으로 숨졌다. 2009년 쌍용의 대량 해고 이후로 열아홉 번째 죽음이다. 이들의 사인은 모두 스트레스 질환과 자살이며,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경우가 반에 달한다.

우리는 앞서 했던 질문과 똑같은 질문을 또다시 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들을 해고한 사람들은, 기득권층은 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걸 알고 있을까? 그렇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을까? 여러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었다는 자각이 있긴 한 걸까? 그리고 우리는 이 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뭔가를 바꿨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돼지의 죽음은 그저 돼지의 죽음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부정할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질문들 가운데 단 하나라도,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경민은 종석에게 이렇게 묻는다. 넌 그때 어디에 있었냐고. 그리고 그 물음은 우리에게 향한다. 우리는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는 돼지와 개 중 어떤 계층에 있었을까? 그리고 이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는, 현재 어디에 있는 걸까?

돼지의 왕 쌍용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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