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 국가대표 곽민정

피겨 국가대표 곽민정 ⓒ 곽진성


7월 27일 아침, 태릉 실내 빙상장에서는 큼지막한 헤드셋을 낀 한 선수가 지상훈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른 선수는 힘차게 전진했다. 타다다닥, 경쾌한 스텝 소리가 태릉 실내 빙상장에 크게 울려 퍼졌다.

덕분에 적막했던 빙상장은 연습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어두운 빙상장의 명암이 선명해지며 열정 가득한 스케이터의 모습이 또렷해졌다. 국가대표 피겨스케이터 곽민정(18) 선수였다. 그녀는 맏언니 김연아, 막내 조경아 선수와 함께 태릉의 피겨 국가대표 연습장에 제일 먼저 발 도장을 찍는 단골손님,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전 10시, 곽민정 선수는 속절없이 내리는 강우를 뚫고 제일 먼저 훈련을 시작했다. 이마에 송글 송글 맺힌 땀은, 그녀가 훈련에 얼마만큼 집중하고 있는지를 짐작케 했다. 가녀린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이 뜨거웠다. 2011 시즌, 곽민정 선수는 더 나은 비상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피겨 스케이터 곽민정, 지난 여름 태릉 실내 빙상장에서 열띤 훈련을 진행했다

피겨 스케이터 곽민정, 지난 여름 태릉 실내 빙상장에서 열띤 훈련을 진행했다 ⓒ 곽진성


지난해 한 해, 곽민정 선수는 부상 속에서도 의미 깊은 결과를 빚어냈다. 2010 동계 아시안게임 피겨 여자싱글에서 열연을 펼치며 대한민국에 의미 깊은 동메달 선물을 안긴 것이다.

우리 피겨 역사상, 처음으로 따낸 동계 아시안게임 여자 싱글 종목 메달이었기에, 그 의미는 값으로 따질 수 없었다. 하지만 부상의 시간이 길고도 아팠기에, 어쩌면 본인에게 지난 2010년은 잊고 싶은 시간일지 모른다. 그러나 시련 없는 성장은 없다. 피겨 팬들은 부상을 극복하고 더욱 멋진 연기로 은반에 설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2011 시즌의 시작, 첫 대회인 <환태평양대회>(곽민정 선수는 지난 8월 12일 뉴질랜드에서 열린 환태평양대회 시니어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했다)를 앞둔 곽민정 선수의 표정에선 기대와 설렘이 있었다. 은반 위에서 멋진 연기를 선보이겠다는 의지가, 힘듦을 이겨내고 있었다. 빛나는 스케이터의 열정이 고요했던 빙상장의 단잠을 깨우는 아침이었다.

친구는 나의 힘! 피겨 국가대표 힘듦을 이기다

 피겨 국가대표 14살 동갑내기 선수들 왼쪽부터 이호정, 박연준, 김해진, 조경아 선수(박연준 선수는 동갑내기들에 비해 학년이 하나 위다)

피겨 국가대표 14살 동갑내기 선수들 왼쪽부터 이호정, 박연준, 김해진, 조경아 선수(박연준 선수는 동갑내기들에 비해 학년이 하나 위다) ⓒ 곽진성



잠시 후, 태릉 빙상장에는 대표팀 막내 김해진 선수(14)가 도착했다. 그런데 오늘 김 선수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막내는 실내 빙상장 주위를 돌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급기야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단짝 이호정 선수(14)에게 건 전화였다.

"호정아~ 나 도착했어~엉! 너 어디야?"

그 물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호정 선수도 태릉 실내 빙상장에 도착했다. 이 선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제일 먼저 눈에 띈 곽민정 선수에게 "언니 안녕"이라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해진이'를 찾았다.

"아이 졸려~ 해진아! 어딨니?"
"호정아, 나 여기 있어!"
"해진아~ 나 머리아파! 어제 피곤해서 그냥 자버렸더니, 그런가봐!"
"나도 피곤해~"

'졸림'과 '아픔'을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대화는 괜한 엄살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피겨 국가대표 주니어들에게 7월 말은 몹시 고단한 날들이었다.

 피겨 스케이터 곽민정, 연습 중 열연을 펼치고 있다

피겨 스케이터 곽민정, 연습 중 열연을 펼치고 있다 ⓒ 곽진성

8월 3일 열리는 <주니어 월드 그랑프리 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강도 높은 특훈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불규칙한 훈련 시간의 영향도 있었다. 피겨 선수들이 늘 어려움을 겪는 것은 링크장 대관 문제, 경제논리에 밀려 '피겨스케이터들의 대관'은 뒤로 밀리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은 국가대표들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결국 팀 훈련은 밤늦게 시작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국가대표 훈련을 이어가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피곤함과 몸살은 척박한 '피겨환경'에서 자연히 따라오는 부산물이었다.

하지만 김해진 선수와 이호정 선수는 불평 한마디 없이 훈련 준비를 시작했다. 피곤해 보였던 두 사람은 대화 중,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태릉이 떠내려갈 듯 크게 웃었다. 서로의 존재가 컸다. 자신의 힘듦을 알아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 같이 땀 흘리는 동료가 있다는 것은 피겨 국가대표들에게 큰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열연(熱演)

 태릉 실내빙상장에서 훈련에 임하는 곽민정 선수

태릉 실내빙상장에서 훈련에 임하는 곽민정 선수 ⓒ 곽진성


오전 11시 20분, 아침의 태릉 은반 위에서는 달콤한 팝송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 음악 속 얼음 위를 유영하던, 이호정 선수가 환상적인 트리플 점프를 성공시켰다. 이심전심, 단짝 김해진 선수도 뒤이어 멋지게 점프를 성공했다.

연습이 가열찼다. 차가운 얼음 위에서 뜨겁게 연습하던 선수들은 몸이 녹았는지 하나 둘, 겉 옷을 벗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각자의 쇼트 프로그램 연습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이호정 선수가 '부에노스의 여름 탱고'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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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정 선수의 예술성은 피겨계에서 정평이 나있다. 가슴 찡한 탱고 선율과 함께 이 선수는 아름다운 연기를 펼쳤다. 14살의 어린 선수가 음악을 즐기며 탄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지난 시즌 '불새' 프로그램에 이어 또 한번의 명 프로그램의 탄생을 기대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김해진 선수는 '월광'에 맞춰, 만개한 기량을 선보였다. 올시즌 세계 시니어 상위 랭커들도 어려움을 겪는, 트리플 콤비네이션을 점프롤 완성한 김 선수는 선율에 맞춰, 세계를 놀라게 할 준비를 끝마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새 프로그램은 지켜보는 이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 곽민정 선수가 은반 위에서 자신의 새 프로그램 '에덴의 동쪽'을 선보였다. 11시 45분, 아련한 선율 속에 시작된 곽 선수의 안무는 아름다웠다. 한 스케이터가 그리는 예술은 고스란히 지켜보는 이에게 전달됐다.

완벽한 하나의 프로그램을 완성하기 위해, 곽민정 선수는 최선을 다해 연기를 펼쳤다. 연기 속 점프 중에, 단 하나 점프만을 놓쳤을 만큼 훌륭한 열연이었다.

그런데, 프로그램 연습을 마친 곽민정 선수는 잠시 고민하더니, 카세트 쪽으로 다가섰다. 그리곤 음악을 틀었다. 다시금 '에덴의 동쪽 연기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연기에서는 아쉽게, 두 번째 트리플 점프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아프게 넘어져, 보기에 안쓰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 한번 자신의 쇼트 프로그램 연기를 시작했다.

피겨 스케이터 곽민정, 최고의 연기를 보았다

 곽민정 선수, 훈련 도중 수분을 보충하고 있다

곽민정 선수, 훈련 도중 수분을 보충하고 있다 ⓒ 곽진성


그렇게 은반 위에서 네 번의 '에덴의 동쪽' 음악이 흘러나왔다. 특히 네 번째 연기는 훌륭하다고 할 만했다. 중간 점프에서 점프 하나를 아쉽게 다 돌지 못했지만, 연습치고는 훌륭했다. 다음 연습에서 더욱 보완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네 번의 쇼트 프로그램 연습을 끝마친 곽민정 선수는 몹시 지친 표정이었다. 곽 선수는 물병을 집어들고 수분을 보충했다. 그런데 물병을 내려 놓은 곽민정 선수는, 또 다시 카세트 쪽으로 향했다.

다른 코치 선생님과 선수들에게 양해를 구한 그녀는, 또 한 번의 '에덴의 동쪽'을 연기를 시작했다. 7월27일 피겨스케이터 곽민정은, 은반 위에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치열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곽민정 선수, 태릉 은반 위에서  훈련에 임하고 있다

곽민정 선수, 태릉 은반 위에서 훈련에 임하고 있다 ⓒ 곽진성



 곽민정 선수, 은반 위에서 자신의 새 프로그램을 펼쳐보였다

곽민정 선수, 은반 위에서 자신의 새 프로그램을 펼쳐보였다 ⓒ 곽진성


곽민정 선수는 자신의 있는 힘을 다해 다섯 번째 '에덴의 동쪽'를 시작했다. 완벽해야 한다는 부담을 떨치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프로그램에 몰입된 것처럼 보였다. 첫 번째 트리플 점프를 깔끔히 성공시키고 뒤이은 점프들도 환상적으로 연결시켰다. 이어진 스텝과 스핀도 프로그램과 아름답게 조화됐다.

7월27일. 이틀간의 기습 폭우를 뚫고 태릉에서 열심히 훈련에 임했던 곽민정. 이날 그녀가 선보인 다섯 번째 연기는, 그저 흔한 연습중의 하나가 아니었다. 

이날 연기는, 지켜보는 이에게 있어선 피겨스케이터 국가대표 곽민정 선수의 최고의 연기 중 하나였다. '에덴의 동쪽'이란 날개를 달고, 은반 위에서 비상할 곽민정. 세계 무대를 향한 그녀의 도전이 기대되는 하루였다.

 훈련 도중, 밝은 웃음을 짓는 피겨 국가대표 곽민정

훈련 도중, 밝은 웃음을 짓는 피겨 국가대표 곽민정 ⓒ 곽진성


지난 시즌, 부상의 아픔을 훌훌 털어낸 듯, '에덴의 동쪽' 선율에 맞춰, 프로그램을 연기하는 곽민정 선수는 너무나 자유로워 보였다. 연기의 끝에서 박수가 절로 터져 나왔다. 완벽한 클린연기, 가슴이 울컥할 만큼 연기였기에.

우리는 피겨 국가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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