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예술극장내 분장실겸 배우 대기실에서 오마이스타를 맞은 배우 정보석. 검은수트와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그가 환하게 웃고 있다.

명동예술극장내 분장실겸 배우 대기실에서 오마이스타를 맞은 배우 정보석. 검은수트와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그가 환하게 웃고 있다. ⓒ 민원기


시트콤에서 시청자들에게 큰 웃음을 준 '보사마' '주얼리 정'과 연극 <우어파우스트>의 고뇌에 찬 파우스트 박사 사이의 간극. 사실 장르를 넘어 이 만큼 연기의 너른 지평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설혹 '하이킥'의 '야동 순재'와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김만석'씨를 연기하는 동시에 작년 연극 <돈키호테> 무대에 섰던 '노장' 이순재 정도를 꼽을 수 있을까.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지평을 무궁무진하게 확대해 나가고 있는 배우 정보석은 우리에게 그런 존재다. 1986년에 데뷔한 이래, 영화와 TV드라마, 연극을 넘나들었으며, 또 주연으로 출발, 조연을 거쳐, 다시금 정보석이란 이름을 대중들에게 반짝반짝 각인시키고 있는 값진 배우 말이다.  

그는 스스로 표현하길, 대하사극에 출연하며 중견배우로서의 일정정도 한계에 다다랐을 때, 파격적인 연기를 펼칠 작품을 만났다고 했다. 그렇게 쉽지 않은 도전이었던 <지붕뚫고 하이킥>으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후, 정보석은 이전보다 더 넓고 배역을 통해 더 깊은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한창 상연 중인 연극 <우어파우스트>도 다르지 않다. "언제라도 연극 공연은 환영"이라는 정보석은 젊은 독일 연출가 다비트 뵈슈가 한국 배우, 스탭들과 작업한 이 괴테의 전통 연극에서 또 한 번 배움의 자세로 연기에 임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연기를 배워 나가고 있다"는 정보석을 9월의 어느 날 <우어파우스트> 공연 연습에 한창이던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났다.

 연극<우어파우스트>에서 악마와의 거래로 부와 명예를 다 이룬 학자 파우스트 역의 배우 정보석이 8일 오후 명동예술극장에서 오마이스타와 만났다. 다비드 뵈쉬가 연출하는 <우어파우스트>는 6명의 등장인물의 중요도가 비슷하다. 정보석이 <우어파우스트>의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정보석은 연극<우어파우스트>에서 악마와의 거래로 부와 명예를 다 이룬 학자 파우스트를 맡았다. 그가 명동예술극장 내 <우어파우스트>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 민원기

"20년 넘은 연기 인생, 그래도 어려워요"

"사실 쉽지 않았어요. 다른 연극과 달리 파우스트의 감정선이 삭둑삭둑 잘려나갔거든요. 파우스트의 감정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아요. 연출가의 상상력이 뛰어나서인지 일반적인 <파우스트>와는 분명 달랐거든요.

결국 제가 그 비워있는 부분을 어떻게 메워가는 가가 중요했죠. 메피스토가 악한 면을, 파우스트가 선한 면을 지녔다고 봤을 때, 이 작품의 파우스트는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죄의식이 확대되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이 '파우스트'는 초인이 아닌 소시민의 허무와 고뇌를 그리는 구나..."

사실 <우어파우스트>는 일반적인 고전극을 상상하면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서른 셋의 나이로 독일에서 인정받은 연출가 뵈쉬는 열린 무대 사용부터 메피스토를 전면에 내세우는 파격적 해석, 그리고 현대적 음악의 사용 등 현대극의 특성을 마음껏 활용했다. 오히려 메피스토보다 신이 줄고 감정선을 파악하기 힘든 파우스트 역할이 손해를 볼 정도랄까. 이에 대해 정보석은 배우로서의 아쉬움을 토로하는 듯했지만, 그 만큼 배움의 시간이 됐다고 설명했다.

"처음엔 속상하기도 하고, 굉장히 괴로운 거예요. 그러다 집에 들어가서 혼자 고민하다 웃어버렸어요. '나이가 이만큼이 됐는 데도 (욕심을)버리지 못하고 엉뚱한 걸 고민하는 구나 하고. 작품도 좋고 연출 의도가 잘 드러나 있는데 말이죠.

사실 지금은 개인의 욕망이 판 치는 세상이잖아요. 연출가는 현재를 그렇게 악마의 세상으로 보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러면서 저를 돌이켜 봤죠. 나한테도 그런 허무가, 공허가 있나. 이런 느낌은 충분히 이야기가 될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 겠구나 싶었죠. 또 다른 동기가 생긴 거예요."

그러면서 정보석은 배우로서의 공허감도 토로했다. 그는 "20년 넘게 연기를 했으면서도 '연기가 이거다'라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어요. 언젠가는 알았던 것 같은데 연기를 할수록 더 어려워요. 그게 바로 배우로서의 공허감인 것 같아요"라고 털어 놓는다. 중견 배우에게 드는 이런 진솔한 고백이 오히려 신선할 정도다. 그렇게 정보석이란 배우에겐 여전히 소년같은 구석도 엿보인다. 

 연극<우어파우스트>에서 악마와의 거래로 부와 명예를 다 이룬 학자 파우스트 역의 배우 정보석이 8일 오후 명동예술극장에서 오마이스타와 만났다. 정보석이 객석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연극 <우어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를 연기하는 정보석이 객석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 민원기


'미중년' 정보석은 언제나 새롭고 싶다  

'미중년', 정보석을 비롯해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간직하고 있는 중견 남자배우를 일컫는 수식이다. 그렇게 '보사마'로도 불린 그이지만, 오히려 정보석은 20여 년 전 연기를 시작했을 때의 순수함을 잃지 않고 있기에 진정한 '미중년'일 수 있을지 모른다. 토크쇼 <청담동 새벽 한 시>을 시작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심야심당을 배경으로 선후배들을 초대해 놓고 사는 얘기를 탁 터 놓고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겠다 싶었단다. 하지만 어디 방송이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제의가 와서 시작했는데, 작가들은 참 뭔가 짜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구성을 타이트하게 하는 것 보다는 둘이 앉아서 속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거든요. 자기 개인 사건도 좋고, 또 꼭 사회적으로 빠지지 않아도 교육감이니 서울시장 얘기도 할 수 있고요. 고정관념을 벗어나서 솔직히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얘기들을 나누고 싶어요."

지금의 정보석을 만들어 준 건 분명 2년 여 전 방송된 MBC 일일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이다. 바로 직전 정보석은 대하사극에 출연하며 자신의 입지가 줄어져만 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시트콤을 통해 지평을 넓힐 수 있었고, 그러므로 연기에 대해 다시 고민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연극도 마찬가지다. 배우에게 있어 새로움은 필수 덕목이니까.

 배우 정보석

배우 정보석 ⓒ 민원기

"보여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제가 부족해서 더 공부할 뿐이에요. 배우가 선택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내가 그 선택을 받기 위해 자꾸 새로워지고 가능성을 제시해 줘야죠. 그래야 선택하는 분들이 새로운 느낌이나 신뢰를 가질 수 있고요. 제가 선택을 하는 위치는 아니잖아요(웃음)."

그 선택받는 자의 위치를 신중하게 여겨서일까? 전성기 때 한 우물만 파야지 생각하게 만들었던 영화와의 인연이 제대로 닿지 않고 있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젊은 날의 초상>을 비롯해  청춘스타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 정보석은 물 밑 듯이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고르던 존재였다. 하지만 시장 환경이 변한 지금, "안 만들었으면 좋을 것 같은" 작품에 출연하기보다 독립영화라도 새로운 자신을 발견해줄 수 있는 감독과 작업하고 싶단다. 조만간 스크린을 통해 정보석의 색다른 연기를 볼 날이 멀지 않은 듯 보였다.

"젊은 독립영화 감독들의 의미 있는 작품들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죠. 저에 대한 색다른 이미지를 나타낸다면 배우의 지평을 확장시켜 주는 거 잖아요. 그에 대한 로망은 당연히 존재하죠. 이제는 시장이 좀 커져야 할 것 같아요. 그런 조짐들이 보이고 있는데, 그렇게 아시아권으로 시장이 확대되고 또 더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 진다면 제가 출연할 작품도 곧 만나지 않겠어요?"

정보석 우어파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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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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