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지전> 포스터

영화 <고지전> 포스터 ⓒ TPS컴퍼니


영화 <고지전>이 개봉 열사흘 만에 178만 관객을 넘어섰다. <고지전>과 같은 날 개봉한 <퀵>은 158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두 편의 한국영화가 지난 주말 흥행을 이끌었다. 세계적인 블록버스터 <트랜스포머 3>(763만)과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2>(375만)의 아성을 뚫고 한국영화가 선전 중이다. 여기에 만화영화 <마당을 나온 암탉>까지 가세하고 있다.

장훈 감독은 2008년 <영화는 영화다>로 데뷔해 신인감독상과 2009년 '대종상영화제' 시나리오 부문을 수상하며 일약 스타덤에 떠올랐다. 그는 김기덕 감독의 <빈집>과 <활>의 연출부와 <시간>의 조감독을 거치면서 실력을 다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는 영화다> 이후 2년 만에 연출한 <의형제>가 크게 성공하며 흥행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고지전>이 평단이나 관객의 호평을 받는 데에는 시나리오 덕택이다. 장편소설 <DMZ>와 텔레비전 드라마 <선덕여왕>으로 유명한 박상연 작가가 <고지전> 시나리오를 맡았다. 그는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의 시나리오를 나현 작가와 공동으로 집필하기도 했다.

<고지전> 이전의 한국전쟁 영화

1964년 신상옥의 <빨간 마후라>는 1952년 겨울 '강릉전투비행단'이 영화의 시간·공간적 배경이다. 영화는 한국전쟁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한다. 오히려 빨간 머플러로 상징되는 공군장교들의 멋과 남성다움, 낭만과 사랑을 전면에 배치한다. '한국전쟁'을 더러운 전쟁으로 보는 시각도 일부 나오지만 그것은 눈 밝은 관객만의 몫이다.

1965년 김기덕의 <남과 북>도 <빨간 마후라>와 동일한 궤적을 그린다. "자유와 사랑을 위해 총질하는" 정보참모나, 개인적인 비극에 함몰된 인물들의 시각은 매우 좁다. 1984년 개작된 김기의 <남과 북>은 매우 폭력적이다. 미국이 만주를 폭격하고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면 남북통일이 되었을 것이라는 판단에 깔려 있는 승리지상주의가 두드러진다.

정지영의 영화 <남부군>(1990)은 이태의 동명원작에 근거한다. 영화에서 전쟁은 반경 15킬로미터 지리산에 갇힌 남부군 병사들의 삶을 향한 본능만 남은 전쟁으로 그려진다. 그들은 왜 남과 북이 갈라서고, 왜 남과 북이 서로 죽이고 죽어가는 지 사유한다. 그런 궁극적인 원인은 외세로 드러나지만, 외세에 밀려버린 무력한 민족에 대한 성찰은 없다.

<실미도>와 함께 천만관객 시대를 개막한 강제규의 <태극기 휘날리며>(2004)는 21세기에 처음 조명하는 한국전쟁 영화다.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이 영화는 한국전쟁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과 사유가 부족하다. '보도연맹사건'이 영화 속에 도입되지만 그것은 삽화 정도로 처리됨으로써 전쟁의 대규모 참상과 비극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영화 <고지전>의 한 장면

영화 <고지전>의 한 장면 ⓒ TPS컴퍼니


'전쟁'영화가 아니라 '전장'영화다

"한국전쟁이 1950년 6월 25일 시작해 1953년 7월에 끝났다는 건 다 아는 얘기다. 그러나 모든 기록은 1951년 1.4후퇴와 휴전협정으로 끝난다. 2년 2개월간의 기나긴 휴전협정 중 어마어마한 공방전이 있었다. 백마고지가 가장 유명하지만 그 외의 이야기는 없다. '한국전쟁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고지전>은 그것의 끝 이야기이다."

박상연 작가의 말이다. 위에 제시한 영화들의 공통점은 영웅주의, 낭만성, 가족주의 등이다. 외세개입에 대한 심도 있는 사유는 끝내 진행되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 가운데 '이거다!' 하고 내세울 영화가 없는 것이다. <웰컴 투 동막골>(2005)의 빛나는 희극성과 유쾌한 남북공존 그리고 짤막한 화해도 이런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고지전>은 이런 영화들과 사뭇 다르다. 전쟁을 들여다보는 시나리오 작가와 그것을 영화화한 감독의 시선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1·4후퇴 전까지 사망자는 100만이었으나, 휴전협정이 진행되는 기간에 사망한 사람은 300만에 달한다. 이것은 1951년 6월에 전선이 교착된 후 38선 부근의 중부전선에서 그만큼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고지전 자체를 잘 보여주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보는 순간, '한국전쟁에 대해선 다 알고 있는 것 아니야?' 하는 선입견이 사라졌다. 기존 전쟁영화와 차이점은 이 영화는 전쟁영화가 아니라 전장영화라는 것이다. 실제 전쟁터에 들어선 것 같은 생생함, 그저 볼거리로 소비되는 것이 아닌 그때 그곳의 상황이 관객에게 공감을 안겨주는 영화이길 바란다."

장훈 감독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고지전>은 싸움에 초점을 맞춘 '전쟁영화'가 아니라, 싸움터에 방점을 둔 '전장영화'다. 왜 그들은 그토록 치열하게 '땅'을 두고 싸웠는가. 그리하여 그것이 오늘날 던져주는 문제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 <고지전>의 관전 포인트다.

영화를 지탱하는 두 축, 은표와 수혁

학도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은표와 수혁이 인민군 중대장에게 호되게 당한다.

"너희들이 왜 전쟁이 지는 줄 알아. 왜 싸우는지 몰라서 그런 거야. 이 전쟁, 딱 일주일이면 끝난다. 그때 공화국에 쓸모가 있을 테니, 목숨만은 살려주겠어."

개전초기 의정부 전선에서 있은 일이다. 하지만 인민군 중대장 현정윤의 생각과 달리 전쟁은 삼 년이 넘도록 끝나지 않는다. 은표와 수혁은 그날 이후 헤어져 생사를 모른 채 삼 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다. 방첩대 중위 은표는 휴전회담 업무를 보다가 과도한(?) 민족주의적 발언 때문에 동부전선으로 밀려난다. 거기서 우연처럼 조우하는 은표와 수혁.

<고지전>은 이 지점부터 전쟁과 인간, 죽음의 공포와 인간관계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현저한 차이를 축으로 진행된다. 은표는 모든 것을 논리와 군법, 선과 악의 이분법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반면에 수혁은 대담한 배포와 실행력, 논리 이전의 직관과 인간중심의 열린 시각으로 세상과 관계를 본다. 그들의 시선을 합하면 6·25에 대한 전체적인 관점이 잡힌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알지 못한다. 왜 남과 북이 그렇게 치열하게 싸워야 했는지.

전쟁의 와중에서 수혁과 '이초'의 연정이 움튼다. 아군을 암살하는 뛰어난 저격수 태경의 별명은 이초다. 사람이 총에 맞은 다음 2초가 지나서야 총성이 들린다는 데서 붙은 별명이다. 수혁은 그런 태경의 사진을 가지고 다닌다. 아군과 북한군이 만나는 장면에서 은표는 수혁이 가지고 있던 태경의 사진을 전달한다. 전장에 핀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니!

 영화 <고지전>의 한 장면

영화 <고지전>의 한 장면 ⓒ TPS컴퍼니


7월 27일, 마지막 열두 시간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마침내 휴전협정이 체결된다. '애록고지'에서 대치하던 은표와 수혁의 악어부대원들과 현정윤이 이끄는 북한군은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다. 그들은 처절하고 지긋지긋한 전장을 떠나 부모형제, 아내와 자식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얼마나 힘들게 살아온 날들이었는가. 하지만 휴전협정은 12시간 뒤에 발효된다.

영화는 안개 자욱한 애록고지를 보여준다. 어디선가 노래가 들린다. <전선야곡>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유호가 노랫말을 짓고, 박시춘이 곡을 만들고, 신세영이 불렀던 불후의 명곡 <전선야곡>. 그런데 노래를 부르는 쪽은 아군이 아니라 북한 인민군이다. 노래는 놀라운 파급력을 가진다. 남과 북의 병사들이 하나가 되어 <전선야곡>을 부른다.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 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 그 목소리 그리워.(1절)
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길 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 정안수 떠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아~ 쓸어안고 싶었소.(2절)

안개가 걷히지 않는다면 그들은 살아서 고향 땅을 밟을 수 있다. 허옇게 머리가 센 어머니를 부둥켜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열두 시간이 그냥 흘러갈 수만 있다면…. 하지만 시간은 너무도 더디게 흘러가고, 안개는 바람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끝도 없이 죽고 또 죽어나간다. 생사의 기로에서 정윤이 은표에게 말한다. 

"나도 처음에는 분명히 알았더랬어. 왜 우리가 싸우는지 말이야. 근데 하도 오래 싸우다보니까 왜 싸우는지 그걸 잊어버리고 말았지."

영화가 남긴 '육중한' 문제들

우리는 숱한 전쟁영화를 보았다. 태초 이래 인간이 싸우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전쟁이 끝나면 그것을 기억하는 기막힌 영화가 제작되었다. 가까이는 월남전을 다룬 <디어 헌터>(1978), <지옥의 묵시록>(1979, 2001), <플래툰>(1986)과 이라크 전쟁을 다룬 <엘라의 계곡>(2007), <하트 로커>(2008), <그린 존>(2010)까지.

영화가 전쟁을 반추하는 것은 전쟁이 가져온 치명적인 문제를 성찰하고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으려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어쩔 수 없이 숱한 인명을 살상한다.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는 때로 아군이 되기도 한다. <고지전>에서 이것은 1950년 8월 포항전투에서 살아남은 '악어부대' 병사들의 처절한 기억으로 낱낱이 그려진다. 

한국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평화협정이 아니라, 휴전협정 아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진영과 중국을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이 대거 참전한 한국전쟁은 국지전이 아니라, 일종의 세계대전이었다. 적어도 우리는 왜 그렇게 죽도록 싸웠는지 그 까닭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전쟁을 쉬는 것이 아니라, 멈추고 서로 화해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가신님들의 넋을 기리는 진정한 길이기도 하니까.

한국전쟁 전선야곡 애록고지 고지전 휴전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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