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들은 시지프스에게 끊임없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려 올리는 형벌을 과하였다. 그러나 이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로 말미암아 다시 산꼭대기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이었다. 무익하고도 희망 없는 일보다도 더 무서운 형벌은 없다고 신들이 생각한 것은 일리 있는 것이었다.(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아마도 시나리오 작가는 시지프스의 신화를 떠올렸던 것 같다. 한국 전쟁에 기록된, 하루에도 몇 번씩 주인이 바뀌곤 했다는 무슨 무슨 고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말이다. 덮쳐오는 죽음을 피해가며 가파른 비탈을 오르는 군인들과 거대한 돌덩이를 맨몸으로 밀어 올리며 산꼭대기를 향해 나아가는 시지프스, 둘 모두 이 고통스런 행위가 언제 끝날지 알지 못했다는 점에서 같은 공간에 놓여있었다. 시지프스가 끌려갔던 그 곳, 바로 지옥이다.

이 영화는 이렇듯 '고지전'이라는 특수한 전투를 통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러나 기억해야만 하는 전쟁의 기억 하나를 끄집어내고 있다. 우리가 이 영화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고지를 오르는 군인들에게 내려진 천형

 고지전은 단 한 명의 영웅만을 표현하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 <고지전> 포스터 ⓒ 티피에스컴퍼니


영화 속 동부 전선 애록고지 아래 던져진 군인들에게 이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을 그 어떤 형벌과도 같았다. 가파른 죽음의 비탈 아래로 끊임없이 던져진다는 두려움보다, 또 단지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보다 그들이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대체 이 모든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고지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라져있던 악어중대의 김현수(고수) 중위에게도 인민군의 현정윤(류승룡) 중대장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겐 저 산 넘어 어딘가에 저지선을 뚫고 탈환해야 할 도시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참호 속에 몸을 숨긴 채 몇날 며칠을 버티기만 하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앞에는 결코 점령할 수도, 그러나 포기할 수도 없는 '고지'가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유도 모른 채 오르고 내려오고, 또 오르기를 끊임없이 되풀이해야만 했다. 이는 먼 옛날 신들이 떠올렸다던 가장 무서운 형벌과 다름없었다. 그들의 전쟁이 진정 고통스러웠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지옥과도 같은 시간들을 견뎌내는 사이, 참호 속에서 십자가를 손에 쥐고 벌벌 떨던 이등병 김현수(고수)는 어느새 중대원들의 두터운 신뢰를 받는 노련한 군인으로 자라났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간이기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그는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의 목표는 오직 살아서 이곳을 나가는 것뿐, 그래서 때로 그의 선택은 서늘할 정도로 차갑다.

관객의 시선은 늘 그를 향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그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싸움터에 던져진 악어중대이자 시지프스다. 그리고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를 통해, 또 고지전이라는 독특한 상황을 통해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여기까지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한국 전쟁 영화, 여기까지 왔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를 시작으로 한국 전쟁과 분단 상황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영화들이 꾸준히 만들어져 왔다. '태극기 휘날리며(2003)', '실미도'(2003), '웰컴투 동막골'(2005), '태풍(2005)', '작은 연못'(2009), '의형제'(2010), '포화 속으로'(2010), '적과의 동침'(2011), 그리고 '풍산개'(2011)에 이르기까지.

물론 이 가운데는 '포화 속으로'처럼 전쟁 영화의 고전적 틀에서 크게 벗어나려 하지 않거나, '실미도'처럼 북한 사람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영화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전쟁과 분단이라는 상황에 던져진 '사람들의 이야기', 특히 남과 북 모두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애썼던 몇몇 영화들은 우리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해주기도 했다. 나에겐 특히 '공동경비구역 JSA'와 '웰컴투 동막골' 그리고 최근에 본 '적과의 동침'이 그랬다('작은 연못'과 '풍산개'는 미처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밝혀 둔다).

하지만 이들 영화의 한계도 뚜렷했다. 이들이 '한국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실체를 비껴간 채 그 안에 담긴 '작은 이야기'만을 끄집어내서 들려주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라고 해서 꼭 역사의 무게를 무겁게 짊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제 우리에게도 '한국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국 전쟁 영화' 한 편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바람을 전하고 싶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전쟁을 비껴가지 않은 영화 '고지전'은 무척 반가운 영화다.

남과 북 양쪽 모두가 그토록 고지에 매달렸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전쟁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양쪽이 한 번씩 상대를 턱 밑까지 밀어붙였다 밀려나는 과정을 거치며 이 전쟁이 더 이상 어느 한쪽의 욕심대로 마무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1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 뒤로도 휴전을 위한 협상은 무려 2년 동안이나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 지도 위에 마지막 경계선을 긋기 위한 힘겨루기가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질러 곳곳에서 펼쳐졌다. 한국 전쟁은 그렇게 남은 힘을 모조리 쏟아 부으며 무려 2년간이나 끝을 향해 내달렸던 것이다. 무려 2년간이나!

"37개월간의 내전, 그 400만 명의 사상자 중 300만 명이 휴전협상이 진행되던 중 중부전선의 '고지쟁탈전'에서 희생되었다는 것은 그간 어떤 전쟁영화에서도 주목하지 않았던 것"

영화 '고지전' 공식 홈페이지에 소개된 글이다(엄밀한 집계라고 보긴 어렵지만, 민간인을 포함한 한국 전쟁의 전체 '사망자' 수가 당시 한반도 인구의 1/10을 넘어서는 400만 명에 이른다는 조사도 있다). 작가와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이야기 하고 싶었던 한국 전쟁의 기억이 바로 여기에 있다. 1년간의 전쟁 끝에 이어진 2년간의 지루한 휴전 협정, 다시 말해 모두가 이 전쟁을 계속해야 할 의미를 잃어버린 바로 그 순간, 어이없게도 또 하나의 전쟁이 시작되고, 그 의미 없는 시간 속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야 했던 아픈 기억 말이다.

다음 한국 전쟁 영화에 기대를 거는 이유

 영화 <고지전> 촬영현장. 배우들의 말을 빌리면 가장 무서웠던 것은 피로보다 추위였다고 한다.

영화 <고지전> 촬영현장 ⓒ TPS company


왜 더 이상 싸워야 할 이유가 사라진 뒤에도 전쟁은 2년간이나 계속되었는지, 그리고 한국 전쟁의 마지막 12시간은 과연 누구를 위한 선택이었으며, 누구의 선택이었는지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비록 며칠 지나긴 했지만, 스크린을 통해 마주했던 안타까운 죽음들만으로도 앞으로 내게 정전협정일인 7월 27일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 같다. 그만큼 이 영화가 던진 질문은 무겁게 남아있다. 영화관을 나서던 순간까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몇몇 관객들에게도 아마 그럴 것이다.

우리의 전쟁에 대해 잃었던 기억 하나를 되찾게 해주고, 또 묵직한 질문을 던져줬다는 점만으로도 이 영화는 큰 의미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앞으로 나올 비슷한 소재의 영화에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다음 영화가 무척이나 기대된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시작이 아니라 끝의 이야기를 담아보고 싶었다"고 말했지만, 그의 말은 절반만 맞았다. 우리는 아직 우리의 전쟁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족 같지만 비슷한 영화를 볼 때마다 늘 따라다니던 궁금증이 하나 있다. 대체 왜 영화 속 북한군의 얼굴에는 항상 흉한 상처 자국이 새겨져 있는 걸까. '태풍'의 북한 출신 해적 씬(장동건), '웰컴투 동막골'과 '포화 속으로'의 인민군 장교 리수화(정재영)와 박무랑(차승원), 그리고 이번 영화의 인민군 중대장 현정윤(류승룡)까지 모두가 무시무시한 상처를 지니고 있다. 혹시 나만 궁금해 하는 걸까.

고지전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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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2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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